CULTURE

나란 배우 이제훈

2011.09.09GQ

배우라고 부르면 아직은 조금 부끄러워 한다. 하지만 배우라는 말을 빼고 이제훈에 대해 말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블랙 수트는 슬링 스톤, 블랙 타이는 H&M, 런닝 톱은 타투이스트 김영빈의 것, 카메라는 라이카.

런닝 톱은 타투이스트 김영빈의 것,

찾는 곳이 엄청 많았을 텐데, 왜 텔레비전엔 안 나갔나?
혼자 나가기는 좀 뻘쭘하고, 예능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대신 지면 인터뷰를 정말 많이 했다. 그것들을 안 빼고 거의 다 봤는데….
어땠나?

정말 진중하고 바른 청년이구나, 하지만 재미는 없다.
하하. 꼭 그렇진 않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한 말이 무슨 콘셉트를 가지고 한 것도 아니다.

바른 생각만 하는 사람이 <파수꾼>과 <고지전>의 그 콤플렉스 덩어리 연기를 보여줄 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이가 어리지 않으니까. 경험한 게 없지 않다. 근데 역할들이 그래서, 나이보다 어리게 본다.

스스로는 젊다고 생각하나?
젊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새로운 걸 접하는 데 두렵지 않다. 경험이 쌓여서 가리는 게 많아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뭐든지 젊어서 하지 나이 들면 어떻게 하겠어, 하고 생각하면서부터 더 과감하게 하고, 그런 것 같다.

한편으로 나는 아무리 나이 들어도 애구나, 하는 순간은 없나?
단 거 찾을 때. 스키틀즈.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는데, 지금도 나도 모르게 집곤 한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안 버린 물건이 있나?
시디 플레이어? 아직도 그걸로 가끔 듣는다. 소니에서 몇 주년 기념으로 나온 건데, 아마 고 1 때 샀을 거다. 그 당시에는 슬라이드 방식이 없었고, 굉장히 비쌌다. 지금도 보면 갖고 싶어서 몇 달 동안 뒹굴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떤 물건이든 시간이 지나 구형이 되어도, 처음 샀을 때의 느낌이 있다. 그 때의 가치가 지금도 안 변했다는 생각을 한다. 평생을 갖겠다는 생각으로 물건을 산다.

가장 최근에 쇼핑한 게 뭔가?
지금 신고 있는 운동화. 한국에 사이즈가 없어서, 저걸 사야 되는데, 사야 되는데 하면서 못 사다가, 홍콩에 갔을 때 샀다. 이것도 산 다음 한두 달 동안 방안에 모셔놨다. 비 올 때 신기 싫어서. 뭐든 애지중지해서, 낡고 헤져도 잘 못 버린다.

그렇게 아끼며 품고 있는 물건이 망가지면 어떡하나?
이사 갈 때 잡지가 너무 많다고, 부모님이 버리라고 해서 하나씩 꺼내서 전부 훑어본 적이 있다.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한데,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배우 이제훈 역시 잃을 게 생겼다.
이전에는 그냥 하면 됐다. 이제는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견제를 하는 상황이다. 이전까지 그런 적이 없었는데 걱정이다.

당신은 ‘영화’배우로 불리길 바라나?
그냥, 배우. 시작할 때는 연극도, 뮤지컬도 했다. 스스로 영화배우라고 얘기하는 건 좀 웃기다. 그런데 아직 저 배우예요,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자신감이 있거나 자부심이 있지도 못하다. 아직 더 배워야 하는 학생?

이미 현장에 나왔는데, 여기서 잘해봐야지, 뭘 더 배우나.
어우, 아니다.

자연스럽게 자기를 믿고 헤쳐나가면서 얻는 게 더 진짜가 아니냐는 말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와서, 더더군다나 이렇게 말하는 거다.

당신에겐 어떤 콤플렉스가 있나?
쌍꺼풀이 없는 거. 어렸을 땐 거울 보면서 막 혼자 쌍꺼풀 만들고 그랬다. 이게 배우로서 가능한 얼굴일까, 하는 의문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봐주시는 주변 분들이 하나둘 괜찮다고 하니까, 내가 진짜 괜찮나요? 하면서, 나 연기해도 괜찮겠지? 하고 스스로 조금씩 생각했다.

쌍꺼풀 수술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래? 난 괜찮던데. 하하하.

남들이 보기엔 가벼운 것도 자기한텐 중요할 수 있다. <파수꾼>의 기태만 봐도, 모든 결손 가정의 자녀들이 기태 같은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고지전>의 신일영 대위도 그렇지만, 두 경우 모두 누가 봐도 중대한 결여가 있다. 그에 비해 ‘쌍꺼풀’은 좀 가볍지 않나?
가벼운 건가? 내가 배우를 선택하고 연기 한다는 건 인생을 걸고 하는 건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캐릭터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 어느 순간 나와 동화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을 순순히 따라가는 것 같다. 크지는 않지만, 하나뿐인 아들로서, 성공해야 된다는 책임감, 아무 보장 없이 선택받는 위치에 놓인 압박감이 콤플렉스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내 인생에서는 이게 전부일 수 있으니까.

티셔츠는 타투이스트 김영빈의 것.

다른 데는 어디가 맘에 안 드나?
입술이 좀 두껍다. 이걸 반으로 잘라버릴 수도 없고. 근데 정말 심각하게 누나랑 상의한 적도 있는데, 누나도 그렇게 생각한대서 절망했다. 하하.

쌍꺼풀도 없고, 입술도 두꺼운데, 감독들은 당신을 선택했다. 이를테면, 당신이 <파수꾼>에서 정말 일진처럼 침 뱉는 걸 알아본 ‘좋은’ 감독은 그걸 기가 막히게 살려준다.
현장에 갈 때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을 항상 갖고 있자고 다짐한다. 완벽하게 준비해서 보여주기보다는, 나한테 빠져 있는 공기를 누군가가 채워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다. 영화가 공동 작업이라는 걸 이해하면서 알게 된 측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의 능력 중 하나는 좋은 작품을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
맞다. 그리고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잘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배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질은 뭔가?
맞는지 틀리는지 계속 의심하고 있기는 한데, 뭔가를 표현한다기보다 먼저 느끼려고 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걸 중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해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연기는 누군가가 바라봐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걸 몇 편의 작품으로 배웠다. 내가 굳이 느끼지 않아도, 그걸 표현해서 상대방이 옳게 받아들였다면 그것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슨 역할을 해도 자기 자신인 배우가 있고, 무슨 역할이든 다른 사람이 되는 배우가 있다. 당신은 전자이길 바라나?
작품에서는 그 역할로만 존재하는 배우이고 싶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많은 사람이 나를 알게 되면, 전작들을 처음부터 다시 봐도 모든 역할이 나로 보이는 그런 배우이고 싶다. 내 생각에 명배우는 무슨 역할을 해도, 그 사람이다. 아무리 캐릭터가 작품에 녹아들어도, 당시에는 모르는데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이다.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찍었으니까, 이제 사람들이 배우 이제훈과 일반인 이제훈을 혼동할 만도 하다.
<친구사이>라는 퀴어 영화를 찍었을 땐 다들 여성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친근하게 봤다. 그런데 <파수꾼>을 찍고 나니까 한 대 때릴까 봐, 다들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다.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각인이 된 거니까.

당신이 연기 말고 제일 욕심을 내는 건 뭔가? 물건도 좋고, 여자도 좋고.
여자일 수도 있다. 남자는 아니다. 하하. 여행이 아닌가 싶은데? 새로운 곳에 가서 일어나는 나의 감정의 변화들? 그런 걸 많이 느껴보고 싶다. 이번에도 대만, 홍콩, 필리핀에 다녀왔다. 뭘 해야겠다는 강박관념 없이, 사람 많이 관찰하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 있으면 오래 머무르면서, 그저 보고 느끼는 게 내 관심이다.

근데 여행이야 다들 꿈꾸지 않나. 그런 무채색 꿈 말고 없나? 다른 직업이라든지.
아주 나중에, 테이블이 네 개 정도 있는 작은 식당을 차려보고 싶다. 가까운 사람들과 차 마시고, 술 마실 수 있는, 음식 먹고 싶은 사람들이 오면 음식도 대접해줄 수 있는 식당.

근데 그렇게 단출하게 장사할 수 있을 것 같나? 당신이 한다고 알려지면 개미떼 처럼 몰려올 거다.
아, 그럴까? 예전엔 그렇게 생각 못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모르겠다. 어쨌든, 뭘 해도 연기는 계속할 거다.

연기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언제인가?
작품에 대해 좋게 얘기해줄 때.

이제훈에 대한 칭찬 한마디 없어도?
좋은 작품인데 걔는 별로였어, 는 괴로울 거다. 근데 작품이 좋았다면 그걸로 정말 충분하다. 작품은 나쁜데 걔가 좋더라, 그게 진짜 최악이다.

혹평을 받는다면, 배우에게는 그걸 되돌아보고 새기는 능력이 중요할까? 후회하지 않고 곧장 나아가는 능력이 중요할까?
곧장 나아가는 능력이 좀 더 중요할 것 같다. 그렇게 하려면 매 순간 진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어쩌겠나. 계속해야지. 내 능력을 인정해버리면 끝이다. 적어도 연기하는 순간엔 나한테 한계를 주지 않는다. 어떤 건 고치고 싶고, 다시 연기하고 싶고 그런데,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그때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에디터
    손기은
    포토그래퍼
    김지양
    스탭
    스타일리스트/ 최성호, 헤어/ 난영, 메이크업/ 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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