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연기, 기준을 말해주세요

영화배우의 연기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세 명의 평론가가 생각하는 색다른 연기 기준들.

신체적 제스처 연극이나 드라마와 구별되는, 영화만의 고유한 연기 방식이 있다면 ‘신체적 제스처’가 아닐까? 시각문화의 진화한 형태로서 영화는 몸을 이용한 표현 방식을 개발해왔다. 클로즈업 쇼트, 바스트 쇼트와 같은 영화 어휘들이 신체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간단히 입증된다. 소리가 영화에 입혀지고, 지문이나 대사 같은 문자적 기술이 가능해지면서부터 퇴화하기 시작한 신체적 언어야말로 흥분시키는 지점이다. 그래서 ‘내면 연기’라는 걸 신뢰하지 않는다. ‘슬프다’는 느낌을 가지고 지어내는 추상적 내면연기 보다 배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을 때 슬픔은 ‘감각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탁월한 집중력과 표현 기술로 배역에 몰입해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표현해내는 연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개인의 기량이 돋보이는 그런 연기가 영화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적 제스처란 감정 표현에 연연하지 않고 몸의 표현을 우위에 둔 영화에서 확인된다. 이를테면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폭발하는 현란한 몸의 제스처들. 종결부 기차역 액션 시퀀스에서 이명세 감독은 초 단위로 쇼트를 나누어 장면을 찍었는데, 안성기와 박중훈은 말 없는 독백과 표정만으로 침묵의 액션 신을 연기한다.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땀과 빗물의 범벅으로 윤이 나는 피부, 고통과 피로로 찌푸려지는 미간 등 조각난 신체의 부분들을 재료 삼아 깊은 감정을 뽑아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박찬욱의 배우들에게 있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은 깊게 파인 주름과 움푹 함몰된 눈두덩, 굴곡진 얼굴 라인으로 기억되며,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는 백짓장 같은 낯빛에 어린 미묘한 표정의 클로즈업을 통해 ‘금자’라는 인물의 다성적 뉘앙스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올드보이>의 저 유명한 장도리 퍼포먼스는 겹겹이 둘러친 장벽에 포위되어 점차 소진돼 가는 자신의 비탄을 신체 리듬과 템포로 전달한다.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무력감이 최민식의 신체적 제스처로부터 전달되는 것이다. 신체적 제스처는 지문으로 표현하기에 어려운 미묘한 뉘앙스까지 관객에게 감지시키기에 감정의 변화 속도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말보다 낫다. 그래서 영화의 신비를 육감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위력적인 장치이며, 삶을 인상적으로 기술하는 영화만의 방식이다. 장병원(영화평론가)

우연의 리액션 하나. 연말의 연기대상 시상식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 있다. 혼신의 힘을 다 쏟는 건 좋은 연기와 등치시킬 수 있을까?’ 마음속엔 상 후보로조차 거론되지 않은 배우들을 품고 있다. 둘. 배우들의 단골 멘트. “배역에 너무 몰입해서 현실로 돌아오는 게 힘들었어요.”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 있다.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연기를 잘하게 되는 걸까? 그 말은 배우라는 직업의 특수성을 설명해주기는 해도, 매혹적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소위 ‘연기 좀 한다’는 배우들의 연기를 볼 때마다, 연기력을 평가하지 못하고, 그 ‘연기 좀 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삐딱하게 쳐다보곤 한다. 저 유명한 로베르 브레송의 말을 빌리면, 삶을 재복사하고 꾸며진 감정들 위에 삶이 표절되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움을 위장한, 위선적인 톤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그 느낌을 흔히 ‘사실적인’이라고 수식된 연기에서 자주 느낀다.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었음을 어떻게든 쏟아내려는 액션은 전형성이란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영화 속 인물을 보는 동안, 배우 개인의 본연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찬사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적어도 정서적 울림을 주는 연기는 그와 반대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의미의 액션이 아닌 우연의 리액션. 상대 배우의 말투, 몸짓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고, 날씨 혹은 촬영 장소를 지나가는 분위기에 대한 대응일 수도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계산된 것인지, 관객도, 배우도, 감독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섬세하되 대담한 반응들. 그건 영화만이 가진 현재의 생기다. 홍상수의 세계를 사는 여인들은 매번 그걸 경험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찌질한 남자를 조금은 능글맞게 씩 쳐다보는 고현정의 표정,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냉소하는 자들을 향해 일침을 날릴 때 귀엽게 부산해지는 문소리의 화난 손가락, 젊은 애인이 화장실에 간 사이 나이 든 애인의 뒷모습을 보며 묘하게 일그러지는 정유미의 미간, 눈 오는 새벽 담배를 들고 비틀거리는 송선미의 자태. 이들은 미리 분석하거나 감정을 쥐어짜지 않고 그저 그 순간에 온전히 반응할 뿐인데, 그 반응은 어떤 표현보다 위대하다. 상투적인 상황과 말들은 더없이 생경해지고, 배우들의 말투와 시선, 신체는 현란한 카메라의 움직임 없어도 신비로운 리듬을 탄다. 지금 우리 눈앞의 그 여인들은 배우 자신인가, 영화 속 캐릭터인가. 그런 구분은 부질없다. 그들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햇볕을 쬐는 풀잎처럼 거기, 존재의 촉수를 모두 열고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이 감동적이다. 남다은(영화평론가)

마초적 몸짓 영화배우는 ‘몸짓’이라는 또 다른 언어를 갖는다. 그들은 몸짓으로 말하고, 분노하고, 슬퍼할 뿐만 아니라, 말과 글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인물의 세계를 몸짓으로 펼쳐 보여야 한다. 육체적 한계 너머로 도약하는 버스터 키튼부터 아크로바틱한 몸짓의 세계를 보여준 성룡까지, 좋은 배우는 자신만의 몸짓을 통해 이미지에 불과한 영화 속 인물들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몸짓에 대한 평가는 어떤 선입견의 지배를 받는 듯하다. 특히 자신의 육체적 활동성을 전면에 내세운 마초 배우들은 ‘힘만 센 머리 나쁜 배우’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몇몇 마초 배우는 감정적 진동을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몸짓으로 번역하는 ‘몸짓의 연금술사’라 부를 만한 경지로 보여주곤 했다. 이러한 연금술 중에서 이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 또는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숭고해지는 순간은, 육체적 한계와 마주하며 탈진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몸짓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을 표출할 때다. 차라리 마초 배우에게 필요한 것은 ‘허세’가 아니라 ‘폼’이다. 폼이란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나 세계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기계적인 고집스러움’ 같은 것이리라. 진정한 마초 배우는 축적된 힘을 과시하는 자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몸짓으로 전환하며 완전 소비의 신화를 완성할 수 있는 자다. <테러리스트>의 마지막 액션 신에서 최민수는 마초 배우만이 할 수 있는 격정적 몸짓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그가 출연한 어떤 영화나 드라마도 이 장면만큼 최민수라는 배우의 마초적인 ‘폼’을 보여주지 못한다. 한국 액션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장면인 이 액션 장면에서 최민수는 육체적 한계에 다다라서도 의지의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장면의 격투 대부분은 길게 촬영되었기 때문에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는 이는 영화 속 주인공 수현이 아니라 최민수 자신이다. 이처럼 자신의 육체적 한계와 싸우는 마초 특유의 근성이 인물의 질감으로 녹아든 모습은 <주먹이 운다>의 류승범에게서도 발견된다. 엔딩 장면에서 최민식과 류승범은 혼신의 힘을 다해 서로의 주먹을 내민다. 그 처절한 주먹 하나하나에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담아내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마초의 세계다. 육체적 한계와 마주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기계적인 고집스러움. 제아무리 피트니스클럽에서 다진 조각 근육을 자랑한다 해도 그 에너지를 폭발하는 몸짓으로 연소할 능력이 없는 이라면, 그는 그저 거세된 마초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남자의 징표가 사라진 마초? 안시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