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유약한 남자의 가을

2011.10.25이충걸

E.L.

집 전체를 지렛대로 들어올려 완전히 해체했다 다시 조립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배전반을 열거나 벽에 못을 박는 사소한 일로 누군가 도구 박스를 들고 집에 올 때마다 남성성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가 현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엄마가 매의 눈을 하곤 “누굴 부르기 전에 네가 한번 고쳐봐라!” 그럴까 봐. 치사해하며 집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그가 출장비 얼마라고 말하면 무력감을 닮은 증오가 바로 터진다.

세상에는 원래 자기 집을 수리할 줄 아는 남자와, 남에게 맡기는 남자, 두 종류가 있다. 그럼, 혼자 고치지도 못할뿐더러 남에게 맡길 변변한 통장도 없는 남자는 신종인가.

사실, 못 박을 줄은 안다. 내년까지 박는다. 전기 제품을 건드릴 때 스위치를 꺼야 한다는 상식은 있다. 드릴 사용법은 모른다. 자동차 보닛을 홀로 연 적도 있다. 냉각수 통에 엔진 오일을 넣었다. 타자는 친다. 조금만 서식이 바뀌어도 누굴 부른다. 즉, 뭐든 내 손만 닿으면 탈이 났다. 나사는 빗나가고, 접착제는 쏟기고, 냄비 손잡이는 휘고, 자동차는 멈추고, 제대로 붙인 줄 알았던 문은 반대로 열렸다.

무력감보다 남자답지 못한 용어는 없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과 같다. 지금이 남자의 역량에 따라 가족의 흥망이 좌지우지되는 옛날은 아니지만, 내가 잘하는 것 역시 생존에 절대적이진 않다. 그런데 모유 수유나 월경에 대한 교육 같은 건 예외라 쳐도, 집 수리만큼 남자를 위한 일도 없다. 여자가 자식을 잘 먹이고, 깨끗이 씻기고, 고이 재우는 데 만족해하는 속성과 똑같다. 만약 내가 막힌 세면대를 뚫을 줄 알았다면 이런 암묵적인 역할 분담을 잘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일을 잘해야 한다고 믿는 건,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내 역할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기들에겐 당연하고 마땅한 능력으로 뭐든 뚝딱 해치우는 사람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시늉할 수조차 없는 나의 상처 입은 내면을 알 리 없다.

욕실등을 갈지 못하고, 가스레인지 타이머에서 왜 소리가 나는지 모르고, 벽걸이 TV도 벽에 걸지 못하지만, 나는 분수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다. 진작에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과, 절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걸 구분해두었다. 정직하기도 하다. 콘센트를 잘 못 만져도 나에겐 시민의식이 있어, 마감만 아니었어도 에어컨 정도는 고칠 수 있어, 라고 거짓말 치지 않는다. 남자가 그런 것 하나 못한다면, 그가 보이는 사랑과 박애가 아무리 커다랗다 한들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어떤 땐, 무서운 철물점과 DIY라는 영어가 지구에서 사라졌음 좋겠다, 영원히.

 

얼굴

완전히 갈아엎지 않는 한,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얄짤없이 이 얼굴로 살아야 한다. 무슨 생각으로 날 낳았는지 도대체 부모가 밉고, 인격을 얼굴만으로 판단하는 세상이 더러워도 이미 늦었다. 그러니, ‘규격’에 안 맞아도 네게 어울리고, 또 넌 있는 그대로 아름다워,라고 누가 말하면 자다가도 확 일어나 그 입을 돌려차고 싶다. 어쨌든, 얼굴은 작은 면적으로도 남과 다름을 알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인 채, 경험과 성격과 감정(다윈이 말한 본능적인 감정, 프로이트가 말한 억눌린 감정)이 생각과 의도에 섞여 드러나는 신경계 시스템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누군가를 알아보는 건 얼굴을 인식하는 게 인생의 조건이라서다. 그런데, 사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미성숙한 남자와 부딪혀 사과했는데 그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라거나, 식당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는데, 한참 지나서야 딴 사람을 보고 있었다는 식은 아니더라도, 파티나 큰 모임에서 아는 사람을 못 알아보거나, 처음 보는 사람이 왜 나에게 친한 척할까 영문 모르는 채 태연해하는 일은 별수 없이 일어난다. “날 언제 알아볼까 기다리고 있었어”, 이런 말은 악수와도 같다.

얼굴 대신 행동이나 옷, 목소리, 걸음걸이 같은 일정한 특징으로 그 친구를 기억하는 건 좀 쉽다. 얼굴의 특징과 움직임, 표정도 잘 포착하는 편이다. 표정에 따른 감정을 읽는 것도 문제없다. 어쨌거나 공간과 지형에 대한 지각 자체는 부족하단 얘기다. 수십 번 들른 큰형 집에 갈 땐 여전히 길을 묻는다. 가던 길로 가도 길을 잃는다. 모험심을 장착하고 신세계로 떠나고 싶어도 혼자선 곤란하다. 가끔의 박약한 태도, 수치심, 사회적 역량 미달은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아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익숙하지 않아도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목구비를 분해하듯 뜯어본 연후의 일이 아니라, 전체적인 추억과 경험을 재조립한다는 이야기다. 특정한 장소나 얼굴이 생각날 땐, 거기엔 분명 의미가 더해졌을 것이다. 기억은 지식에 의해 터득된다. 익숙함은 느낌으로부터 온다. 결국 누구와 어떻게든 만나 저녁을 먹고 나서도 상대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에게도 내가 지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게 꼭 내 잘못은 아닐 테다. 사람 얼굴은 아무리 자주 봐도 여전히 특징적이며 새로운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