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할아버지 피터팬

2011.11.25이충걸

E.L.

우리는 항상 어제보다 늙어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참신한 게 없다고 맨날 찡찡댄다. 텔레비전과 음악도 모두 허튼소리가 됐다. 할아버지가 된 남자의 흔한 불평이지만, 도대체 볼 만한 TV 프로그램이 없다. 노래는 더 소름끼친다. 우리 땐 진짜 음악이 있었어. 패티 김 노래엔 멜로디와 감정과 가사가 있었어. 하물며 우리 때 듣던 팝송도, 가사가 ‘감정. 무엇보다 감정’, 이랬다고. 그런데 이제 진짜 음악이 있나? 있다고 한들 어떤 가치가 있나? 또 누가 상관하나?

노골적으로 호르몬이 넘실대는 광고나 짝짓기 프로그램을 볼 때도 , 저딴 건 아무것도 아니야. 예전 섹스가 훨씬 값지고 청교도적이었어,라고 읊조린다. 폭력도 옛날이 순진했지. 카인과 아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들 놀랬잖아. 뭐? 뭐라고? 몇 번이고 묻고 또 물었지. 동생이 형을 때렸다고? 돌로 깠다고?

옛날이란, 고작 아이폰이 나오기 전을 말하는 이 세대의 할아버지 앞엔 도표가 놓여 있다.지위를 의미하는 상징이나 북실북실 거품 목욕 같은 건 몰랐던 할아버지, 상승하는 집값과 1인당 GNP에 기대 살아온 할아버지, “내가 일할 땐, 마누라가 첫 애를 낳는 데도 야근하러 가야 했어”라면서, 똑같은 상황에선 더 까다롭게 구는 할아버지…는 생각한다. 난 문제가 뭔지 알아. 내가 늙었다는 거지. 성적으로든 뭘로든 쇠락하다 못해 단순해진 나이가 됐다고….

그의 자조는 진중한 문화의 쇠퇴, 고전적 가치의 훼손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모든 것들에 의해 엎질러져버린 규율에 대한 분개일 것이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엔 어딘지 소년기의 잔해가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이젠, 늙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한때는 누구나 어렸으나, 요샌 아무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 아버지 때 나이를 먹던 방법도, 자연이 나이 들게 하는 방법도 아니다. 표준 시간은 사라졌다. 그런데 성장할 수 없거나 성장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피터팬만 그런 게 아니라서, 새치인지 백발인지 분간되지 않는 이라도 머리 스타일만은 젊다. 퇴행성 관절염이라 조기 축구회에 나갈 수 없으면서도 축구 유니폼을 입는다. 사월과오월만 한 요즘 밴드가 있나? 고개를 외로 꼬면서도 노래방에선 비트가 얍삽한 ‘요즘 트로트’를 부른다.

퇴화에 관해서라면 요즘 청년들은 두 술 더 뜬다. 불운이 떠안긴 엄청난 빚, 알 수 없는 미래가 만든 분노, 붕괴된 직업 시장과 불분명한 직업 윤리, 무미한 무력감에 상관없이, 이전 세대에 비해 자아상이 훨씬 높은데도 잡동사니 직업 혹은 무직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를 이불처럼 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후반전에 완전 잘했어.” 아니, 너네가 한 게 아니거든. 그 축구선수가 했거든. 스포츠에 열광하는 거야 자유지만, 어떤 축구팀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 왕자들을 추앙하는 건 성인 남자가 아니라 소년들의 영역이다.

어린이들은 자기들이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애들이 틀렸다. 노인들은 자신들이 반드시 죽으리란 걸 안다. 그들이 옳다. 하지만 노년은 죽음이나 죽어감이 아닌 거칠고 황량한 세월이다. 이윽고 원하는 걸 맘대로 할 수 있게 된 세월. 그럴 때 나이는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니, 도처에서 늙음이라는 지위로 윽박지른다. 일상이 된 잔소리는 멎을 기미가 안 보인다. 지하철에서 젊은 여자에게 자리를 안 비켜준다고 호령하고, 플랫폼 가장자리에 멀뚱히 서 있다며 삿대질을 한다. 그럼, 늙은이를 선로에 던져버리는 대신 의무로서 참으며 자문한다. 왜? 노년은 지혜, 경험, 지식을 의미해서? 노년은 이 미친 삶의 여정을 거치며 뭔가 배웠기 때문에? 그러므로, 어르신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건 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게 나을까? 우린 존재 하나로 너무 충분해요. 당신은 당신의 스타일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그러니 참견하지 마시라고요,라고 말하는 게 옳을까?

어릴 땐 어서 크고 싶었다. 주위 일들로부터 벗어나면 덜 불행해질 것 같았다. 물론 호르몬과 화학의 고속도로에는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남은 건, 박살난 차처럼 지치고 슬픈 추억 뿐이다. 생각해 보니, 평생 젖니를 갖고 산다는 게 피터팬의 영광이었을 것 같지도 않다. 피터와 웬디가 나온 지 백 년이나 된 지금, 자라지 않는 소년이란 폭풍처럼 추앙받다가도, 종국엔 다들 싫증내기 마련이다. 늙지 않는다는 건 모든 가능성을 막는 회색, 혼수상태의 지붕일 뿐이라서. 웬디도 마지막엔 피터팬을 떠났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웬디는 유부녀였고 피터팬은 그녀의 장난감을 보관하던 박스의 먼지보다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웬디가 안쓰러울 이유가 없는 건, 그녀도 어른이 되고 싶었던 부류였기 때문이다.

4초마다 화를 내던 어린 불길은 오래전에 꺼졌다. 이제 무너진 경계와 해어진 끝에서 다른 것을 깨닫는다. 어떤 시간엔 끊기지 않는 이음새가 있다는 걸. 하지만 시간이 내 편이라는 착각은 집어치워야 한다는 걸.

마지막 깨달음은, 진짜 삶은 노인들이 본 나라와, 지금 그들이 사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놀랍기는, 우리가 멸시해온 가까운 조상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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