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헌진의 서울블루스

하헌진은 올해 세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세 번의 계절을 부지런히 따라온 이 블루스맨은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라 말한다.

의상 협찬/ 스웨터와 셔츠 모두 비바스튜디오
의상 협찬/ 스웨터와 셔츠 모두 비바스튜디오

하헌진은 혼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월 23일, 김일두와 하헌진의 스플리트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공연. 실내는 어두웠다. 조명은 발 뒤에서 객석 쪽을 향했다. 손을 움직이자, 약지에 낀 은색 보틀넥이 반짝거렸다. 하헌진이 노래를 시작했다. 보컬과 기타 소리의 구분이 사라지는, 언어와 기타의 우위를 가릴 수 없는 한판대결. “사실 기타가 말한다는 표현까진 잘 모르겠어요. 곡과 멜로디, 가사를 같이 만들긴 해요. 곡을 먼저 만들어놓고 나중에 다시 가사를 붙이는 곡들은 거의 없고요.” 한쪽이 더 세다고 판단하기보다 그저 어우러진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그댈 사랑하는 내 마음엔 쉬는 날이 없다”던 5월의 하헌진은, “언젠가 만나면 헤어지는 법”이라며, 어느새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올해 세 장의 앨범을 냈다. 데뷔 음반인 <개> EP는 아이폰으로 녹음했다. 초판으로 200장을 찍었는데, 다 팔렸다. 첫 앨범답게 흥분과 긴장, 분노가 조금씩 섞여 있다. 울림이 너무 가깝고 살가워서 마이크가 어떤 현에 가까이 있는지, 하헌진의 고개가 어느 쪽으로 쏠려 있는지, 심지어 방의 크기마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여름>은 뻔뻔하고 능란하다. “지난 여르음!”이라 굼뜨게 치고 들어올 땐, 굵은 현이 손가락에 오래 머물렀다. 뙤약볕 같은 하모니카 소리. 차라리 어디든 눕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루지’하다는 말은 이런 노래를 위해 있는 거겠지. “<개>는 오랫동안 만든 곡들이에요. 델타블루스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고민했고, 그래서 좀 펑키했던 거 같아요. <지난 여름>은 더 북쪽 지방의 블루스처럼 연주했어요. 굉장히 힘든 시기였고, 스스로 늘어지기도 했고. 어쨌든 곡 묵히지 말고 빨리 내자는 결심이었죠.”

두 장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김일두와의 스플리트 앨범 에서 그는 어딘가 다른 일곱 곡을 또 내놓았다. 12분을 간신히 넘기는 짧은 기록이지만, 기타는 정교해졌고 목소리엔 부드러운 결이 생겼다. 블루스맨의 아르페지오 위로 수더분한 자기고백이 올라앉았다. “올해 정말 별일이 다 있었던 거 같아요. 좋은 일 슬픈 일 다 섞여서 이제 별 느낌이 없다고 해야 하나요? 두리반도 해결되고, 만리동 집도 나오고, 연애도 다 접고…. 정리하는 느낌이 그제야 왔어요. 아 뭔가 끝나는구나. 지난 1~2년 동안 노래 만들고 공연하면서 고양됐던 것들이 가라앉던 시기에 만든 노래들이에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냈다는, 열심히 일하는 젊은 뮤지션의 멋진 수상소감. 고작 두 장의 EP를 발표한 스물다섯 살 뮤지션에게서 이렇게 떫고 쓴맛이 동시에 날 줄이야. 신인 투수의 미덕이 칼 같은 컨트롤보다 시원한 구속인 것처럼, 새로운 뮤지션에겐 정제된 기술보단 펄떡거리는 영감이 먼저일 것이다. 그러나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하는 선수라면 그런 구별은 별 의미가 없다. 하헌진은 이치로나 류현진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신인이라는 보호막을 격파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 사람이 할 수 있는 블루스 음악을 한다. 델타블루스의 원형을 간직한 노래를 만들고, ‘블루스맨 인 서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별명은 ‘블루스의 한국화’나 ‘한국적 블루스’ 같은 말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델타블루스는 델타 음악이잖아요. 텍사스블루스는 텍사스 음악이고. 서울블루스는 서울의 블루스다, 해서 그렇게 지었어요. 특별한 의미를 붙이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다르냐고요? 일단 로버트 존슨이 귀신한테 영혼을 팔았느니 그런 헛소리는 없으니까요 하하. 프로레슬링 선수처럼 ‘기믹’에 침식되고 싶진 않아요. 한국을 대표하는 블루스맨이라는 타이틀을 단 분이 많은데, 들어보면 목소리는 비비 킹이고, 기타 톤은 누구고 그래요. 그런 건 안 해요. 로버트 존슨, 존 리 후커와 제 블루스는‘ 바운스’가 달라요. 많이 들으면서,
어떻게 제 것을 만들까 생각해요. 거리 유지랄까.”

서울의 블루스맨이 동호대교에 오르자 자동차가 마침 밀리기 시작했다. 중앙선에 서고 난간에 앉을 땐 경적이 울리기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음, 행복한 순간이여 나를 떠나지 마라. 음, 행복한 날들이여 나를 떠나지 마라.” 자동차 소리보다 더 높은 권역에 있는 것처럼 선명한 소리. 고함쳐야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 센 바람이 불었지만, 하헌진의 기타는 유유히 한강 쪽으로도 퍼졌다.

“서울은 재미있어요. 영감이라기보다 오기를 쓰게 하는 도시. 이건 하면 안 된다는 걸 빨리 알려주죠. 혹은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텐데.” 다리 밑으로 해가 급하게 굴러떨어진 날, 서울의 오후 다섯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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