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속초에서 권부문을 만났다

1월에 서울 학고재에서 <산수>전을 보고, 11월에 속초로 가서 그를 만났다. 손수 타준 커피에선 분명 돌 맛이 났다.

권부문이 속초에 있다는 말은 사뭇 낭만적이기도 합니다. 마침 속초에 왔더니 날이 흐리고 비도 옵니다. 오늘 날씨 보셨어요?
계절에는 호불호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흐린 날을 굉장히 좋아하죠. 안 그래도 좋은 날에 왔다고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비 오고 눈 오고 날이 흐리면, 왠지 일상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보여요. 모든 사람이 옳다 그러는데, 봐! 아니잖아, 하늘이 증명하는 날 같아요. 하늘은 푸른 게 좋은 거야, 하던 사람들이 날이 흐려지면 뭔가 망쳤다는 표정을 짓는데, 저는 그거 봐 이런 날이 있단 말야, 얘기하고 싶죠. 폭풍이 몰아치고 변화무쌍한 날이면 자연재해를 입는 사람들한테는 미안할 지경으로 좋아요. 인생살이도 그렇게 해야 돼요, 스스로 파도 뒤집듯이.

1월에 전시회가 열렸고, 지금은 11월입니다. <산수> 전시부터 부쩍 ‘권부문’ 얘기를 자주 접했습니다. 반향은 아무래도 반가운 일일까요?
반갑죠. 예전 같으면 그런 말이 별로 저한테 기준이 안 됐는데, 미술계 예술계 자체가 전혀 반향이 없는 나라니까요. 한편으론 섭섭한 게 있어요. 제가 그런 식의 입장에서 전시를 했으면, 예술계 자체에서의 반향이 있고, 그 다음 단계가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는 건데. 우리는 없어요. 오히려 일반 관객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근데 일반에 자꾸 회자되어서 뭐 하죠? 출마할 것도 아니고, 서커스 공연 입장권 받을 것도 아니죠. 이외수처럼 말도 안 되는 거 지껄이며 CF 뛸 거예요, 뭐 할 거예요? 기껏 연락이 와도 전부 ‘노’했어요. 사보, 화장품 회사 축제, 무슨 백화점 초대, 또 네이버에선 작가 등록을 위해 작품을 주면 작가 페이지를 만들어주겠다, 다 ‘노’하게 되더라고요. 그걸 받아들이면 이상한 놈 되는 거죠. 근데 다 ‘노’하니까 죽일 놈 되는 거죠. 개새끼 잘난 척한다, 이거지. 근데 난 그런 욕에는 별로 의미 안 둬요. 근데 이게 서글프다는 거죠. 도대체 작가가 좋은 전시를 하고, 뭔가 작가 인생의 전환기를 이뤘다면, 작가의 실질적인 전환이 와야 하는데, 무슨 화장품 뭐, 인터넷 뭐, 사보 뭐…. 내 작품을 소개하겠다니 그냥 줘? 그래서 뭘 하겠어요. 점점 사회환경이 안 좋다고들 하는데, 안 좋을수록 그 표면에 빤빤하게 소금쟁이같이 있어야 해요. 안 좋다고 계속 받아주니까 뻘이 물렁물렁한데도 계속 들어가는 거지. 그럼 저 밑바닥에, 저어 밑바닥에 가라앉는 거예요. 이름난 거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쓰레기 같은 놈이 되는 거죠. 못됐더라도 표면에 살아남으려고 무단히 버텨야 해요. 소금쟁이도 실수하면 빠져요. 걔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아요? 한쪽 발이 더 깊숙할 때, 자기 무게가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안다고. 근데 작가가 되는 대로 찌라시같이 뿌리고 살아야 되나, 이거죠. 그래서 거절하다 보니 이렇게 올해가 다 가는데, 그냥 이게 다구나. 그죠? 올해가 다 가는데, 1월에 전시를 해서 장우철 씨 말마따나 반향이 있었는데, 그게 다구나. 그래서 ‘올해의 남자’가 되었다니, 하하, 이게 귀결일 수도 있다, 참 묘하게.

갤러리는 많고, 전시는 더 많고, 미술은 재테크가 되었다는데, 정작 작가의 자리는 단단하질 않지요.
뭐, 설경 특집 전시에서 작품 팔아주겠다고 백화점에서 연락이 와요. 그거 참 비극이에요. 작품은 좀 팔려서 돈은 되겠죠. 생각보다 훨씬 큰돈이 될지도 몰라. 그러나 이게 완전히 장돌뱅이 난장에 앉는 거죠. 제 작업에도 모독이고요. 그게 힘든 건 아니에요. 나한텐 너무 심플한 얘기니까요. 하지만 불행한 겁니다. 20대 천재 작가가 할 얘기 못할 얘기 쏟아내겠다 할 때, 쏟아내게끔 하는 환경이 돼줘야 해요. 혼신을 다해 시대를 살아내게끔 해주는 거지. 물론 그런 환경 없어도 되는데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쪽이 더욱 활발하니까. 결국은 눈에 보이는 기회조차도 거부해야 되는 입장에 놓이는 거죠. 남은 고비를 알기 때문에 더 그렇죠. 모를 때는 겁없이 막 하지만, 점점 작업 규모가 커지면서 역할이 많아지는 상황에, 앞으로의 시간을 예측해보면 만만치 않은 거죠.

<산수>전엔 무엇보다 눈이 있었습니다. 작품 앞에서 그 눈을 겪어야 했지만, 어떤 편안함도 있었습니다. 눈이니까요. 북극의 빙하는 알 수 없지만, 눈은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속초에서 살다 보니 2년에 한 번 대설이 오는 걸 알겠어요. 대설이 오고 나면 또 눈이 별로 없고요. 근데 작년에 작업할 때는 그 리듬이 안 지켜지는 거야, 고개를 넘으면 환한데, 돌아보면 계속 눈이 오고요. 구름이 고개를 안 넘은 거죠. 작업하라고 구름이 안 비켜가는 거예요. 대상의 반대쪽 산을 타면 해가 쨍쨍하게 나니까 작업 참 많이 했죠. 생각대로 한 거죠. 마치 그리듯이, 평소에 봐왔던 장소가 눈이 많이 오면 이렇게 될 거고, 적게 오면 이런 톤일 거고, 내리는 중엔 이런 톤일 거야, 했던 것들이 거기 있었죠.

평소엔 전혀 모르다가 이가 아프면 그제야 동네 치과 간판이 보이는 이치와 같다고 말씀하신 걸 기억합니다. 생각하고 그리다 보면 분명히 만난다는.
사진가라는 게 숙명인 듯 사냥꾼처럼 될 수 있어요. 대상을 찾아서 꿩사냥꾼처럼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한 방 쏠까 하는 입장에 빠지게 되는데, 단호히 거부해야 하거든요. 대상 앞에 서야 하는 필연을 어떻게 잘 가꾸느냐가 중요하죠. 이미지가 나한테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하죠. 찾아가는 게 아니라. 대상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이미지는 달라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