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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함정

2011.12.16GQ

제원만으로 차의 가치를 짐작하는 건 위험하다. 지능지수만 보고 사람의 됨됨이를 속단하는 것만큼.

말리부는 쉐보레 최초의 글로벌 중형차다. 6개 대륙 1백여 개국에 판매할 예정인데, 지난달 4일 한국에 가장 먼저 선보였다. 말리부는 우리에게 낯설 뿐 전통이 깊은 차다. 반세기 전인 1964년 데뷔해 지금까지 8백50만 대나 팔렸다. 이름은 캘리포니아의 부유층 거주지에서 따왔다. 이번 말리부는 8세대째, 유럽 GM의 자회사 오펠이 개발한 뼈대를 토대로 만들었다.

한국지엠은 말리부를 출시하면서 토스카 이후 손 놓고 있던 황금시장에 다시 뛰어들게 됐다. 국산 중형차를 염두에 둔 소비자도 현대 쏘나타와 기아 K5, 르노삼성 SM5와 쉐보레 말리부의 네 차종 중에 고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말리부를 선보이던 날, 한국지엠은 썩 편치 않았을거다. 기자들의 마뜩찮은 질문이 이어져서다. 질문은 경쟁 모델보다 뛰어난 앞설 말리부의 장점에 집중됐다. 의구심이 피어오른 배경은 제원이었다. 가령 말리부의 길이는 K5와 같다. 반면 쏘나타와 SM5보단 짧다. 높이는 K5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무게는 가장 많이 나간다. 같은 배기량의 쏘나타와 K5보다 1백15킬로그램 무겁다. 공인연비도 리터당 12.4킬로미터로 라이벌 가운데 가장 열세다.

말리부의 엔진은 직렬 4기통 2.0리터 1백41마력과 2.4리터 1백70마력 두 가지다. 2.0리터 엔진의 최고출력은 휘발유를 실린더에 직접 뿜는 쏘나타와 K5에 24마력 뒤진다. SM5와는 같지만, 200rpm 높은 7천2백rpm에서 나온다. 가속 페달을 더 밟아야 한다는 뜻이다. 최대토크도 라이벌을 밑돈다. 이렇게 객관적 수치로 우위를 가늠할 수 없으니 기자들이 말리부만의 무기를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한국지엠의 판매를 책임진 안쿠시 오로라 부사장은 “제원도 중요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도 의미가 있다. 이점을 고객에게 알리겠다”고 밝혔다. 한국지엠의 기술을 총괄하는 손동연 부사장은 “지엠의 부품 내구성 기준은 굉장히 엄격하다. 변속기가 다소 뜸 들여 반응하게 설계한 이유다. 10년 이상 차를 탄다면 말리부의 우위를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제원이 뭐기에, 이렇게 자동차 회사의 임원까지 진땀 빼게 만들까. 제원은 크기와 성능, 연비 등을 숫자로 표시한 자동차의 신상명세서다. 소비자는 제원을 통해 차의 전반적인 내용을 쉽게 훑어볼 수 있다. 다른 차종과 저울질할 지표로도 삼을 수 있다. 제원은 자동차 등록증에 간략히 나온다. 각 자동차 업체 홈페이지엔 보다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차를 살 땐 꽤나 신경이 쓰이는 정보이기도 하다.

숫자 자체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과장과 축소, 왜곡의 설 자리가 없다. 모호한 구석도 없다. 냉정하고 정확하다. ‘최고수준’, ‘최대급’ 등 홍보책자의 두루뭉술한 자화자찬과 달리, 꾸미고 포장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핵심이다. 때문에 객관적 근거를 찾는 소비자는 제원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최고출력과 공인연비는 메커니즘에 관심 없는 소비자도 챙겨 보는 수치다.

제원은 차종의 항목별 우열을 가릴 때 요긴하다. 현재는 현대기아차가 우월적 지위에 있다. 동급에서 최고출력과 공연연비가 상대적으로 높고 공차중량은 낮다. 이렇다 보니 나머지 업체는 신차를 내놓을 때마다 상대적으로 뒤처진 제원을 변호하기 바쁘다. 한국지엠뿐 아니라 르노삼성, 쌍용차도 같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차의 본질이 왜곡되기도 한다. 쌍용은 코란도C를 선보이면서 정숙성을 내세웠다. 소음측정기까지 동원해가며 공개 테스트도 벌였다. 남보다 조용하다는 장점이 부각되긴 했다. 하지만 소형 SUV는 정숙성 때문에 고르는 장르가 아니다. 세단보다 넓은 트렁크와 전천후 주행성능으로 승부하는 게 맞다. 한국지엠은 기아 모닝보다 스파크의 엔진 기통수가 하나 더 많고 실연비가 앞선다고 강조했다. 언론을 앞세우고 전문가를 동원해 비교시승까지 치렀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긴했다. 갈팡질팡하는 소비자를 잡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간접 마케팅은 부작용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공인연비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알페온을 출시할 땐 도서관 수준의 정숙성을 내세웠다. 방음에 공들인 건 모두가 인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도서관 수준’이란 잣대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어떤 도서관이냐에 따라, 이용시간대에 따라 소음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한국지엠의 주장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알페온보다 더 조용한 차가 있기는 한지 궁금해진다.

르노삼성은 SM7을 내놓으면서 비교우위의 언급을 피했다. 핵심 라이벌인 현대 그랜저는 거론조차 안 했다. 맞부딪혀 득될 게 없다는 심산에서였을 거다. 객관적 비교를 거부한 대신 ‘유러피언 프레스티지’란 문구로 포장했다. 르노 플랫폼과 닛산 엔진 등 외국계 모기업의 기술력에 기댔다는 사실을 은근히 앞세웠다. 그 결과 SM7의 정체성은 한층 흐릿해졌다.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건 홍보 마케팅의 기본이다. 드러난 제원의 열세를 차별화된 장점으로 만회하겠다는 전략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 소비자를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보가 넘쳐 나서다. 제원 비교쯤은 포털 검색만으로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럼 제원으로 라이벌을 앞서게끔 개발하면 되는 거 아닌가? 현대기아차를 제외한 나머지 업체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된다. 섣불리 독자행동에 나서기 어렵다. 자동차 구성요소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은 따로 개발할 수 없다. 외국계 자본의 지배를 받는 데서 비롯된 구조적 한계다.

이른바 글로벌 기업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전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큰 밑그림을 그리고 손익을 따져 개발과 생산기지를 구분한다. 택배회사의 시스템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여의도에서 분당 갈 제품을 대전의 물류센터를 거쳐 배달하는 식이다. 르노삼성은 파워트레인을 외국에서 사온다. 르노삼성 입장에선 국내에서 생산하는 편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이해관계와 부합되지 않는다. 비싼 부품을 수입하느라 팔아도 남는 게 별로 없다. 글로벌 기업은 스케일이 큰 만큼 특정 시장의 요구에 맞춰 발 빠르게 대응하기도 어렵다. 출력과 연비는 언감생심이다. 쉐보레 올란도는 가족용 차를 표방했지만 내비게이션 없이 출시되었다.

한국이 한 해 1천만 대 이상 차를 파는 시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럽 브랜드가 미국인의 취향에 맞추지 못해 안달이다. 승차감을 부드럽게 다듬고, 컵홀더 개수를 늘리며 ‘다운사이징’의 열풍과 상관없이 V8 대배기량 엔진을 오롯이 남겨놓는다. 중국 시장을 위한 롱 휠베이스 중형차를 만드는 데도 열심이다.

결국 시장논리다. 글로벌 기업이 한국만 어여삐 여기길 기대하는 건 착각이자 과욕이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독기로 똘똘 뭉쳤다. 안방시장에 안주했다간 살아남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일찌감치 해외를 겨냥했다. 인지도가 형편없으니 상품성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어디서 누굴 만나 싸우든 이겨야 하니 제원에서 악착같이 앞서야 했다. 따라서 제원과 관련해 가장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건 현대기아차일 것이다. 하지만 늘 정점을 찍는 제원만큼 만족도가 크지는 않아 의뭉스럽다. 비슷한 출력과 연비의 현대기아차와 수입차를 비교하면, 머리와 가슴으로 느끼는 성능의 괴리가 크다. 출력엔 거짓이 없겠지만, 바퀴까지 전달되는 과정의 효율이 차이 나는 까닭이다.

자동차의 가치는 여러 요소로 판가름 난다. 제원은 상품성의 일부다. 오로라 부사장의 말처럼, 자동차의 품질과 성능 가운덴 수치로 객관화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감성품질과 승차감, 내구성이 좋은 예다. 말리부는 치밀한 조립품질과 묵직한 주행감각이 매력이다. SM7은 정갈한 조형미와 나긋한 승차감이 장점이다. 스파크는 의젓한 회전감각이 일품이다.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은 냉정하다. 애매하고 어중간한 가치가 스며들 여지가 없다. 우열 또한 확연히 갈린다. 그건 숫자의 존재당위성이기도 하다. 동시에 함정이기도하다. 숫자의 쨍한 테두리 이면의 가치를 놓치기 쉬워서다. 시야를 넓혀보면 지구상엔 다양한 가치를 웅변하는 차가 존재한다. 모두 일등일 리 없다. 아깝게 정상을 놓친 이등도 있고 만년 꼴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들이 존재하는 건 나름의 매력과 코드가 맞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차 고를 때 제원을 눈여겨보는 건 바람직하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시승도 해보며 고민하는 게 옳다. 숫자만 보고 속단하기에, 자동차는 심오하고 복합적인 기계다.

    에디터
    컨트리뷰팅 에디터/ 김기범
    포토그래퍼
    김종현
    아트 디자이너
    아트 에디터 / 김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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