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말 할 것이 있는 한

E.L.

2010년 11월 29일, “트윗은 초보지만 딴 건 꼭 그렇지 않아요”라는 말로 트위터를 시작했다.

이미 다수는 소셜 미디어의 치어리더들에 이끌려 폭발적인 트위터 쓰나미를 즐기고 있었다. 자기 과잉의 시대, 똑똑한 개인들은 다 개인 출판업자나 다름 없었다. 트위터가 태초 이래, 한 순간 몇 백만이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고, 계정수가 많지 않은 몰도바나 이집트의 트위터 혁명이 (과장되었건 아니건) 최고조의 위력을 타전할 때, 트위터를 도외시하는 건 만담 콘테스트에 나가 입을 꾹 닫는 것과 같았다, 기보다는… 나에게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필요한 미디어 지형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약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막상 그 판에 끼어들고 나니, 트위터는 놀랍도록 다양한 범주의 수다가 웅성거리는 텐트였다. 상대의 실수나 감당 안되는 언행을 찾아 농담하고 희롱하는 자료실이기도 했다. 그 말석에 앉아 빈 방을 울리는 혼잣말 대신 뭔가 핵심이 되는 말을 찾을 수 있을까?

우울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관심을 필요로 한들 그게 늘 여의하진 않을 터다. 그러나 트위터에서는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지처럼 뻗어있었다. 트위터는 친구를 ‘경작’하는 콘테스트이기도 했으니. 곧, 자판 없이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는 숱한 ‘친구들’이 생겼다. 현대의 삶에선 모든 것이 커다란 근심인 듯 보일 때, 모르는 이의 격려는 좋은 세상이 당장 도래했다고 일러주는 것도 같았다.

멀리 떨어진 분야의 사람들이 지리학상 학계상의 경계를 넘어 사건이 발발한 곳에 모일 때는 광속보다 빨랐다.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며, 그들의 의견을 타전하는 건 아주 중요한 기준이었다. 한편, 약하게 이어진 연결 고리는 같은 목표나 위험 앞에선 강하고 빠르게 변했다. 강아지를 찾아달라는 멘션조차 강력한 행동주의로 바뀌었다. 트위터는 신속히 밀집된 상호참조의 팸플릿이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어디서 점심을 먹는다는 극히 사적인 문제를 공중이 모인 데서 떠드는 게 뭐 대단해서 액정을 들여다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위터에 로그인하여 디지털 플랫폼에 엉덩이를 걸친 채 정치와 정책을 시시비비 따지는 이들이 우리의 희망이야? 그런데 무엇을 허락하고 무엇을 지지해야 하지?

트위터는 내가 얼마나 미련한지 보여주는 도구였다. 하지만, 매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장인 어른이 돌아가신 날 빼곤 2년 내내 트윗을 했다거나, 운전할 때, 기획회의 중에, 볼링 치는 중간에, 영화를 볼 때도 멘션을 날렸다거나, 트위터를 안할 때조차 나중에 쓸 가식적인 경구를 속으로 지어내는 식은 아니었으되, 트위터를 닫는 건 항생제를 거부하고, 전서구傳書鳩를 가두는 것과 같았다.

심리학이 만연했다. 다른 데선 맛 볼 수 없는 스릴과 만족, 통제력과 물리력을 만끽하는 심리학. 동시에, 자기가 아는 정보와 경험을 낱낱이 적용시키려는 혁신적 유아들, 자격 없는 권위로 몸부림치는 소수 미디어, 15픽셀의 인기를 좇는 ‘마이크로 – 유명인’, 몇몇 인사에게 더 쉽게 다가가 가학적으로 조롱하는 순진한 저격수, 뚱뚱해진 아이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먹을 음식과 못 먹을 음식을 가려주는 기운 센 보모, 공익과 시민 담론과 인식으로 무장한 진실의 화신이 바로 자기임을 내세우는 전도사들이 범람했다. 행위와 주제가 기존 질서와 대중적 표준에 부적절하기 십상인 어떤 개척기라서일까. 결국 트위터는 보고 보여주는 거울의 방에서 자신을 공매하지만, 기본적으론 타인을 스토킹하는 곳이었다.

마녀도 넘쳐났다. 누군가 기존 정서의 ‘대본’대로 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순간 도덕성까지 위협받는 일이 속출했다. 사용하도록 허락된 언어가 무엇인가, 적절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언어의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논의도 새삼 발화했다. 그래서
<오즈의 마법사> 원작에서 마법사가 도로시에게 이렇게 말했는지도 몰랐다. “그 여자가 못된 마녀라는 걸 기억해. 아주 그냥, 굉장히 못된 년이라서 꼭 없애버려야 돼.”

오류 투성이인 칼 마르크스가, 역사를 바꾸는 건 기술의 변화라고 한 부분만은 확실히 맞는 것 같다. 기술 혁신은 필시 조직화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옛날 방식대로 일을 다루도록 학습된 법 구조와 충돌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트위터는 서로 흡수되기 어려운 의견과, 개인이 받아들인 형태와 행태가 몇 백만개 존재하는 곳일진대, 구태로 새 기술이 만든 새 힘에 적응할 순 없다. 진짜 쟁점은 어떤 제재가 있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트위터는 연장된 신체이자 또하나의 피부가 되었다. 급기야 주변엔 삶을 반영해 트윗을 하기보단 트윗팅 자체가 삶이 된 이들이 널렸다. 트위터가 길고 사려 깊은 대화를 말려 죽일 거라고 우기는 이들도 늘었다. 그러나, 전화가 시를 대체한 것보다 트위터가 산문을 대체하긴 더 어려울 것이다.

가끔 140자 공간이 광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적어도 말할 것이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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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편집장] 2001년부터 GQ KOREA 편집장을 맡고 있음. 잡지를 통해 문화와 스타일을 다루어온 그 시간 동안, 정작 자신이 얼마나 세속적인지 허무하게 깨닫게 됨. 그래도 잡지 만드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해보지 않은 ‘여타의 것’들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