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그날의 장혁 1

장혁은 인터뷰가 좋다고 했다. 어떤 정리 혹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에 대한 환기로서.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은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홀로 불협으로서 존재했다. 요컨대 그는 흐름 속에 있지 않았다. “그건 정말 확연한 부분이거든요.” 이건 무슨 말일까.

의상 협찬/ 재킷은 존 로렌스 설리번 by 퍼블리시드, 셔츠는 구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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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는 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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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드라마는 끝난다. <뿌리 깊은 나무>도 결국 끝났다. 끝난 드라마라는 건 뭘까?
그 부분에 대해 굉장히 냉정하다. 그냥 정리가 된다.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DVD장에 잘 꽂아둔다. 그러곤 전혀 볼 생각을 하지 못한다. 손대지 않는다. 여운이 없다. 두 번째 작품 이후에는 계속 작품을 했는데, 프로라면 그 간격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개념이 섰다고 할까? 자기 무대는 자기가 만들어야 하고, 그 다음 무대도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 어쨌든 프리랜서 아닌가? 내가 픽업을 하는 게 아니라 픽업을 당하는 거니까. 어쩌면 좀 추상적인 생각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캐릭터 정리를 잘하게 되었다.

사실 배우를 가장 만나고 싶은 순간은 드라마를 보는 중간이다. 특히 <뿌리 깊은 나무>의 ‘강채윤’에겐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가령 이런 말. 채윤아, 넌 누구니?
채윤은 똥개라고 본다. 그냥 어디에나 있는 강아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돌아다니고, 추우면 어디 들어가 있고, 그러다 누가 밥 주면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아니다 싶으면 막 짖어버리는. 근데 <뿌리 깊은 나무>엔 이성적인 사람이 너무 많다. 거기에 확연하게 감성적인 사람이 하나 있다는 거다. 뭘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감정으로 느끼니까, 그때그때 이게 맞구나 싶은 쪽으로 갔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많은 대결을 봤다. 그중 하나는 연기 대결이다. 이도(한석규)를 중심으로 보면, 이신적(안석환)과는 착착 톱니가 물리는 느낌이었고, 정기준(윤제문)과는 언어가 다른 듯 리듬도 엇나갔다. 그런데 강채윤과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맞질 않는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대본이라는 정해진 ‘상황’이 있으니까, ‘5’에 맞춘 장면이라면 ‘5’에서 왔다 갔다 하는 틀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도와 강채윤 사이에선 그저 감정적이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이성적으로 아, 이랬으니 이 톤을 맞추기 위해 이렇게 가야지, 이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러니 밖으로 튀는 느낌을 준 거다.

같이 있으면 불안했달까? 반면 채윤이 혼자 있는 장면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강채윤이 숲에서 뛰어간다, 강채윤이 생각한다, 강채윤이 뭔가를 본다, 모두 완성되어 있었다.
왕을 죽여야지, 모든 게 그 코드로 맞춰졌는데 어느 순간 없어졌다. 이 인물에게 새로운 목적이 생겨야 하는데 그것은 굉장히 추상적이었다. ‘담이와 행복하게 살아야지’는 이 드라마의 주된 흐름과 거리가 멀다. 끝에도 ‘아, 당신이 훌륭한 한글을 창제했으니 나도 당신에게 발맞춰 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다만 ‘지켜보겠다’ 고 말한다. 강채윤은 드라마 전체에서, 굉장히 이기적인 인물이자 동떨어진 인물이다. 인물 자체가 이미 불협화음이다. 어딜 가더라도 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거다.

<추노>의 이대길과 <뿌리 깊은 나무>의 강채윤은 캐릭터로는 다를 수 있지만, 이미지는 내내 비슷하게 온다. 말하자면, 장혁은 왜 저런 것만 하지? 라고 쉽게 말할 여지도 있다.
모두 자기 주관대로 생각할 일이라고 본다. 어떤 식의 캐릭터를 특별히 좋아해서 그걸 간직해야겠다, 그걸 오래 가져가야겠다, 이런 생각은 아예 없다. 확연하게 말하면,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틀은 결국 자기 자신만이 정확하게 만들고 다가설 수 있다. 사극만 하냐는 소리는 좀 억울하다. 스물네 작품을 하면서 사극은 세 작품이었다. 왜 자꾸 그런 식으로 가냐고 묻는다면, 확연하게 “아닙니다, 제가 그런 색깔이 아니라, 그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표현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휴대폰이 어떤 스타일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겐 통화가 잘되느냐가 중요한 거고, 그런 휴대폰을 선택한 것이다.

그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모습이 유난히 잘 어울렸기 때문에 기억하는 건 아닐까? 사랑을 해도 목숨을 걸거나, 피를 흘려야 하는 사랑일 듯하니, 이를 어쩌나.
인물의 캐릭터보다 더 강한 건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다. <추노>와 <뿌리 깊은 나무> 사이에도 여러 캐릭터를 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말 했던 거 기억하나? “이제까지 드강영약(드라마에 강하고 영화에 약하다) 이었다”
결국 끌리는 걸 할 거다. 대중의 잣대가 아니라 나의 잣대로 고르게 될 거다. 좀 더 깊이 있게 연기를 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내 색깔을 확연하게 말하기 어렵다. 담백해졌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추노> 할 때 성동일이라는 배우를 보면서, <마이더스> 할 때 김희애라는 배우를 보면서, <뿌리 깊은 나무>할 때 한석규라는 배우를 보면서, 내 연기에 대해 뭔가 정의를 할 만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뭔가 확연하게 찍거나 그랬나?

글쎄,<연기대상> 대상?
캐릭터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에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그럼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확연하게 잘했다? 대상은 한석규 선배가 받았으니 한석규 선배는 그만큼 더 잘했다? 이런 잣대로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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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피처 디렉터] 곧 두 번째 책을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