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그때와 지금의 나는

2012.02.27이충걸

E.L.

그때와 지금의 나는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11년을 회상하는 마음엔 범절 있게 먹은 뒤 물린 밥상을 보는 기분이랄까, 담담하고 덤덤할 뿐 괜한 자조도 턱없는 과장도 없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직업적 긍지야 못 숨긴다 해도.

처음엔 채무가 있었다. 탈진, 불쾌, 권태, 불신, 미숙함으로 둘둘 만 남자들이 높은 안목을 지니고, 세심하게 감정을 다루고, 일에 헌신하는 가치를 알고, 관계 속에서 스타일을 익히길 바랐다. 머릿속은 무의식으로라도 정제된 취향, 유산으로서의 기품, 따뜻한 분별, 룩에 대한 일반 상식, 인본주의적 창의성, 어떤 심오함, 문화적 본능, 높은 도덕적 규범을 좇았다. 보통 남자들이 열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참 멋진 남자에 대해 새로 정의를 내리려는 본능이었으므로.

미숙함 속엔 믿음이 숨어 있으니, 그때는 스타일이, 술이나 음악처럼 공부하면 마스터할 수 있는 어떤 범주로 보였다. 세상엔 고쳐주고 싶은 목록들이 꽉꽉 차 있기도 했다. 곧, 처음 재판장에 간 듯 애매하게 위축된 눈으로 <GQ>를 보는 주변 사람들을 내 거만한 기대치에 맞게 바꾸는 사이클을 반복했다. 아마 <GQ>에 쓰인 강령대로였을 것이다. “그 재킷 멋지긴 한데, 어깨 하나 더 있네. 한라장사 같애.” “와, 괜찮다! 바지만 빼고.” “거위 주둥이 구두만 아니면 네가 감각적인 줄 알았을 거야.” 옷 입기는 기실, 타인과의 경쟁이자 복잡한 퍼즐과 독단, 모호함(이라는 절망)과 확실함(이라는 난폭함)의 콘테스트였다. 안목이 쥐뿔도 없는 착장, 의뭉스럽게 비어져 나온 코털, 고답적인 생각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직설적으로 지적할 때마다 그가 나에게 빚진 것 같아 쑤신 듯 기분이 좋았다.

특정한 나이를 넘겨 한 시절이 남긴 것들이 증발되면, 남자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분별 있는 남자는 인생의 적당한 때에 내적으로 도약해야 하므로.

새로움이란 말은 잡지에도 예외가 없다. 하지만, 잡지를 지탱해온 오랜 계모임 같은 시스템이 애당초 죽어버렸다는 게 부담스럽도록 명료했다. 의문은 진작 냉혹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잡지를 읽는 게 삶을 바꿀 만한 경험인가? 잡지가 교내 폭력, 알코올 중독, 사대강, 상호비방, 저소득층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나? 안드레아스 거스키풍의 파노라마를 좋아하고, 한탄할 만한 능란함으로 넥타이를 매며, 조미미의 ‘단골손님’을 부르고, 갤럭시 노트와 문고판 신랄한 시집과 함께 하는 여행을 좋아하면 잘나 보이나? 티셔츠가 스타워즈의 R2 -D2만큼 가치 있고, 휴고 보스 로고가 최상급을 의미하나? 이때의 긴장은 어떤 계급인지 찾아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나?

사람들의 관심은 항상 빨리 왔다가 금방 떠나 연속성이 없으니, 다른 질문도 기다린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인가?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거세 당한 디자이너가 제작한 젖꼭지 보이는 셔츠를 입으면 새로워질까? 새로움의 선택과 필요는 누가 정한단 말이냐?

모든 게 다 반짝거려서 더 참신한 건 눈에 띄지도 않는 마당에, 새로움이란 돔이 열리는 순간 말라버렸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잡고 말하자면, 이달 <GQ>는 새롭다. 모습은 필시 봄볕 아래 진달래 꽃 묶음을 안은 듯 화사해졌다. 그러나 <GQ>를 지탱해온 가치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으니, 굳은 지조는 태산과도 같구나, 혼자 도취되어 중얼거린다.

… 모순되는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그 역설성을 주시한다. 이쪽엔 근엄한 보수성을, 다른 끝엔 개인적 취향을 배치한다. 소신을 강요하진 않고 호전성을 혐오한다. 도회 성향과 의고 취미를 적당량 조절한다. 더 알고 싶어 하는 한편 다른 지식도 환영한다. 논리적 질서로 문구를 고르지만, 가끔 서정시처럼 뭉뚱그려진 모호함도 즐긴다. 그리고, 3분 동안의 농담이 몇천 배 재앙으로 불어나 역습한다는 걸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꿈과 악몽을 다듬어 간절한 사물로 표현하는 한편, 패션의 외잡한 속성 대신 농부의 수고로 다린 화이트 셔츠를 더 사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늘은, 그들이 바라는 내일과 관계가 없다. 시간이 지났으나 태양은 하늘 위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달의 모양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그냥 별들만이 알고 있다. 결국, 나를 포함해 남자는 결함에 또 다른 결함을 보탠 종족이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건, 남자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인 동시에 남자가 될 수 있는 최악의 상태였다. 무식하고 거친 행동에 대한 허가로서….

어쩌다, 시어서커가 해리스 트위드와 자유롭게 어울리는 한 가지를 볼 때, 지금 바뀌는 남자들의 기호 속에서 얼핏 <GQ>가 바라는 외연을 본다. 결국 남자에게 스타일은 과거의 순수, 정체성의 관대한 해석, 언어의 촉감, 이성으로부터의 순간적인 도피가 합쳐진 만족스러운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발견한 것은, 나는, 11년 동안 <GQ>를 공부해온 사람이 아니라, 스타일을 통해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어 했던 그때의 나와 꼭 닮았다는 점이다.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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