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고요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2012.03.16정우영

시인 장석남을 만났다. 그의 세속 생활에 대해 들으면서도 안심한 건, 그의 걱정처럼, 만약 고요가 도망간 데도, 아주 멀리 가진 못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책이 나오는 날 뵙는 건 좋은 일인가요?
책도 나왔는데, 소주 마셔야죠. 좋죠. 하하.

첫 시집이 나왔던 날과 오늘의 기분은 어떻게 다른가요?
아, 전혀 달라요. 첫 시집은 아주 짜증나게 나왔어. 제 날짜에 안 나와서 애태우고 기다렸죠. 겨울이었는데, 그땐 애기여서, 늦게 나와서 책 안 팔리는 거 아닌가 했거든. 허허. 근데 오늘은 큰 감흥이 없네요.

<물 긷는 소리>에서 이런 문장을 봤어요. “문학은 나무를 심는 것처럼 무심한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의미를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시집을 묶는 일은 무심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구성하고 배치하는 건 좀 다른 얘기니까요.
한 권의 시도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게 되지 않는 시는, 일종의 아마추어죠. 그 사람은 한 편의 시에도 통일성이 없을 거라고 봐요.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계예요. 한 시기를 산 시인의 세계. 다루는 사물이 달라져도 내적으로 흐르는 건 같고, 그걸 변주하는 거기 때문에 정교하게 만들어줘야 하는 게 맞아요. 진짜 뛰어난 편집자라면 그걸 요구하거나 만들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 시대가 시에 대단한 걸 걸고 있지 않으니까, 시인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야죠.

이제 막 일곱 번째 세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가 완성됐네요.
일찍 데뷔하긴 했지만 너무 많이 냈어요. 하지만 나처럼 시집이 여러 권 있을 경우 그 사물들의 변주가 재미있을 거예요. 클래식 연주가로 치면 30대 때의 ‘숭어’ 연주랑, 50대 때의 연주가 다르죠. 근데 우리나라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따지지, 시 자체를 보는 사람이 드물어요. 나는 시에 대한 글은 논문이나 평론이 아니고 에세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냥 자기가 본 거니까. 잘만 쓴다면, 그건 예술적 에세이일 거예요. 자기 삶과 그 텍스트의 삶이 겹쳐 있는 거죠. 시인이 다른 시인에 대해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봐요.

평론가가 한 시인의 세계를 읽어내는 방식에 대해선 회의적인가요?
그 방식도 필요해요. 하지만 이른바 유명한 메이저 평론가들이 짚어내서 화제가 된 시인들의 그 시가 괜찮은가?, 하는 의문이 좀 있어요. 정치에서 민중은 우매하다고 하지만, 차라리 그 우매한 중에 몇몇이 끝까지 뭔가 있어요. 요즘처럼 새로운 소재를 좇아서 그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건 참 촌스런 생각이에요.

비단 시만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스티브 잡스가 “인류 최고의 발견은 죽음”이라고 얘기했는데, 사실이에요. 최고의 첨단은 죽음이고, 예술은 죽음과 밀접해요. 죽음이 없다면 이런 아름다운 걸 하지 않을 거예요. 이런 게 다 아주 오래된 생각이고, 우리는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그 오래된 생각에서 0.0001밀리미터 정도 나가는 거예요. 그 정도 나가는 거지 성큼 나갈 수 없어요. 붓글씨를 하면, 처음에 한일 자를 연습하거든요? 제일 쉬운 게 한일 자인데, 한 달을 써도 잘 안 돼요. 안 된다는 건, 찌익 긋는 게 아니라 양식에 맞게 쓸 수가 없단 거예요. 양식이 없다면 그럴 필요 없죠. 배운다는 것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내가 만든 게 아니라 공동체가 만든 거고, 거기에 미가 있어요. 내 마음대로 한일 자 긋겠다고 따지면 안 돼요. 그건 자유도 첨단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미숙. 그걸 명징하고 명확하게 통과해야 아주 쪼금 나아가요. 누가 대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그래서 수련하는 그 자체가 예술이에요.

외람된 말인데, 이번 시집에선 저번보다 조금 나아갔다고 보시나요?
허허.

이전과 다른 시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있어요. 그건 확실히 있죠. 하지만 내 자신에게 불만이 많아요. 내 의지의 문제지만, 생활에서 쑥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만한 용기가 나에겐 없어요. 쑥 빠져나오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웃음거리와 관계없이, 내가 그걸 버릴 만한 뭔가가 못 돼요, 사실은. 그게 내 갈등이지. 생활인이 하는 것에서 예술가는 단호히 떨어져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어떤 게 반복돼요. 그러니까 과감하게 건너뛰지 못하고, 기어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생활을 떠날 수 없는 슬픈 존재들이죠. 그런 의미에서 스님을 크게 봐요. 결혼하면 스님이 될 수 없다는 건 규정이 아니라, 불가능한 거예요. 스님들에게도 처자식이 있다면 그들을 먹여살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위대한 건 그 신분과 생활을 버렸다는 거죠.

불교를 ‘믿는다고’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겠네요.
불교는 신자라고 얘기하지 않죠. 닦는다고 얘기하니까. 아주 이성적이에요. 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뭘 믿어요. 믿을 수가 없잖아. 한 단계만 나가도 아무 대답이 안 나오는 세계라고. 근데 그걸 믿으라고 하는 건 방편이지.

차라리 당신의 종교는 음악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예전에는 시를 두고, “음악까지 타고 가야 할 뗏목”이라고 했죠. 아, 음악 다시 듣고 싶어요. 애들 키우면서 음악을 잘 못 듣게 됐는데, 또 음악 좀 멋지게 듣겠다고 양평의 오두막으로 갔더니 자연 속에서는 음악이 필요 없더라고. 다 음악인데 뭐. 모순이야 그게. 진짜 그래요. 어제 방 구조를 바꾸면서 십몇 년 전 일기를 뒤적이니까 음악에 대한 얘기를 굉장히 많이 써놨더라고요. 음악을 진짜 많이, 재미있게 들었구나, 했어요.

음악과는 어떻게 가까워졌나요?
유행가를 좋아했어요. 우리는 팝송 세대였고, 비틀스는 우리 윗세대지만, 비틀스의 세계까지도 금방 갔어요. 꿈이 오디오 하나 장만하는 거였는데, 그렇게 처음으로 싸구려 오디오를 하나 장만하고 들은 게 재즈예요. 처음부터 쫙 오더라고. 하지만 재즈는 현장에서 연주를 듣는 게 좋죠. 90년대만 해도 박성연 씨가 하는 <야누스>밖에 없었어요. 거기서 대단한 연주가들이 연주를 하는데 손님은 나 하나,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한두 분 있고.

지금도 서울은 그리 다르지 않아요. 재즈 페스티벌이란 이름을 내거는데, 출연진은 팝가수가 대부분이죠.
허허. 팝 가수요? 나도 박성연 씨한테 노래 좀 배웠는데.

하하. 무슨 노래요?
배웠다기보다 흉내를 낸 건데, ‘물안개’ 같은 곡. “물안개가 자욱하게 밀려오는 바닷가에 하이얀 물거품이….” 그런 노래를 계속 중얼거렸어요. 정말 아름답다고. 우리 토종 재즈 음악인데, 그건 연주가 없어서 이런 데서 부를 수가 없어, 술집에서는. 재즈가 용량이 좀 차고 클래식으로 넘어갔는데, 장가도 안 갔을 때 봉급 한 60만원 받으면, 40만원을 CD 도매점 가서 사고 그랬어요. 아, 근데 진짜 클래식은 조금만 들어가면 쭉 빠져버려서 문학 같은 건 싱거워서 재미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지. 추상 세계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다 구체 세계가 있으니까. 문학이란 게 사실 찌질하잖아. 언어로 돼 있으니까. 그리고 뭐, 알아주지도 않고. 그런 한계가 있긴 있어요. 하지만 음악이든 시든 예술은 거기에서 나오는 색채 같은 걸 즐길 줄 알아야 진짜 즐기는 거죠. 그런 미묘한 세계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분홍색 종이에 녹색으로 글씨를 쓴, 이번 시집의 ‘색채’는 어때요?
사실 나는 이 색이 썩 달갑지 않아요. 뭐 다들 좋다고 하는데….

이 색이 말씀하신 ‘색채’ 같은데요? 미묘한 색이죠.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이 당신의 시를 이런 색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색으로? 그럼 다행이고. 수류산방 방장님이 굉장히 신경 써서 만든 색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이게 좀 에로틱한 색 아니에요?

독자가 다 면벽수행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럼 또 어때요.
이 시집에서는 그런 충돌하는 부분이 재밌어요. 분홍색에 녹색이 올라온 거랑, 고요와 도망이라는 단어랑. 맞아요. 도망과 고요는 맞지 않는 단어죠.

고요라는 단어를 선택했어요. 적막도 정적도 침묵도 아닌.
침묵은 대상과 나 사이의 시끄러움이에요. 소리는 없지만, 대상과 나 사이의 소리 없는 시끄러움이에요. 적막은 소리랑 관계없이 마음의 종합적인 상황인 거고요. 하지만 고요는 적멸과 가장 가까운 말 같아요. 멸에 들었다. 무와 가장 가까운 우리말은 없음이지만, 없다는 것과는 또 다르죠. 무이지만, 우리를 안아주는 것. 고요를 그렇게 인식했어요.

김연수가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의 해설에서 이렇게 썼죠. 장석남에게는 예의를 갖추려다 보니 생기는 대상과의 거리감이 있는데, 거기에서 독특한 비유법이 나오는 것 같다고요. 그 말에 동감하는데요. 덧붙이자면, 당신의 시어는 뜻으로서 대상을 품는 것도 있지만, 발음이나 생김새로 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네. 정확히 그거예요. 고요라는 말의 생김새, 그 형체죠. 포근하잖아. 우리는 남이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어 해요. 그러면 고요한 데를 가야 해. 아무도 신경 안 써도 되는. 그러니 고요는 도망가면 안 돼요. 근데 막상 가면 고요는 도망가요. 모든 말의 엄마, 태반은 침묵이지. 근데 그것이 통과된 다음은 고요. 침묵에서 말이 나와서 말이 다 끝난 다음의 그것. 다시 침묵으로 가진 않아. 알았어, 끝났어, 더 할 말이 없어, 는 고요. 고요는 침묵처럼 대상이 없어도 돼요.

    에디터
    정우영
    포토그래퍼
    손종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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