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예를 갖추시오

2012.03.19GQ

관혼상제는 고사하고 웃자고 만든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도 예의가 넘쳐나니, 과연 여기는 21세기의 동방예의지국이 아닌가?

이상한 풍경. 한쪽에선 자기만의 색깔이 없어 아쉽다며 참가자들을 계속 낙방시키는데, 다른 한쪽에선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 강해 ‘싸가지가 없다’며 반감을 산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면, 장단을 치는 사람 마음에 들도록 그때그때 춤을 바꿔야 한다. 아무렴, 장단을 치는 사람이 ‘비호감’이라 하거든, 일단 사과하고 자숙하며 노심초사 호감으로 올라갈 기회를 엿봐야 한다. 행여 ‘호감’이라 해도, 안주하지 말고 ‘배꼽인사’와 ‘매너손’을 앞세워 딸이든 아들이든 고양이든 금붕어든 그것의 ‘바보’가 되길 주저하지 않으며 이왕지사 얻은 ‘호감’에 ‘개념’ 소리까지 얹어서 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쩔 텐가. 텔레비전 앞은 이미 판관들로 가득한 것을. 누구든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 우선 판결을 받으라.

확인할 것도 없다. 얼마나 말이 많은 세상인가? 입 있는 자 누구나 말하고, 귀 달린 자 누구나 들을 수밖에 없는 ‘평등’의 시대가 도래했다. 싫으면 싫다고 말 못하나? 싫으니까 싫다고 하지, 좋은데 싫다고 하나? 더구나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의 창궐은 온 시청자의 심사위원화를 초래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좋아하는 자들의 권리는 점점 큰소리가 되어 퍼져나갔다. 시청자의 권리장전, 네티즌의 실권장악, 대중의 압제.

화제의 프로그램 <KPOP STAR> 2월 12일 방송. 생방송 진출자 10인을 가리는 평가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유명한 이미쉘이 ‘보류’ 판정을 받았다. 다소 낙심한 그녀가 대기실로 들어서자 먼저 자리에 있던 다른 참가자가 뭔가 말을 건네려 한다. 이미쉘은 듣지 않고 말한다. “말 시키지 마.” 자, 판관들의 긴급 출동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판결이 시작된다. “이미쉘은 안 되겠다. 지가 무슨 벌써 가수야? 소녀시대도 아직 폴더인사 하는데 뭐가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ㅋㅋㅋ.” “이미쉘 1등 가긴 글렀네요. 노래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 ‘공인타령’도 어김없이 나온다. “공인인데 말을 너무 함부로 하네요. 좋게 봤는데 딴 사람 응원해야 할 듯.” 응원인지 헷갈리는 이런 것도 있다. “나 지금 목 안 좋으니까 말 걸지 말아주라, 라고 좀 부드럽게 얘기해주면 좋았을 텐데. 이미쉘 파이팅!”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이미쉘이 사과를 한다면 당사자에게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시청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할 일이 무엇인가?)

판관의 득세와 더불어 어느새 텔레비전엔, 판에 박힌 인물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의와 긍정의 탈을 뒤집어쓴다. 경쟁을 표방한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내가 잘했다’는 말은 일종의 금기다. 더구나 타인에게 어떤 비평을 가하는 건, (대놓고 호통치는 박명수식 유머가 아닌 이상) 부정적 판결을 호출하는 사이렌일 뿐이다.

경솔하든 되바라졌든 유해하든 무해하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보다, 틀에 박혀 하나마나 한 소리나 하는 게 ‘예의’라며 환영 받는다. 유명인이면서 ‘안티가 없다’는 것이 엄청난 칭찬인 마당에 더 말해 무엇하나? 요컨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중의 의지는, 비장의 무기로서 ‘예의’를 장전하고 있다. 남과 다른 것, 내가 싫은 것이 있으면 ‘다르다’와‘ 싫다’에 그치지 않고, ‘예의 없다’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얼마나 손쉬운가. 유난히 연예인의 도덕적 결함에 예민한 촉수를 세우는 마당에, 예의가 없다는 건 가수가 노래를 못하는 것보다, 배우가 연기를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지적사항이다. 그러는 동안 대중은 다같이 좋아할 스타, 다같이 우러를 영웅, 다같이 매장시킬‘ 연놈들’을 모색하는 게 아닐까? 맙소사, 이건 파시즘이 아닌가.

‘예의’를 둘러싼 이 해괴한 풍경에는 파시즘의 유령과 더불어 권위주의의 귀신도 합세한다. 그 귀신은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더더욱 활개를 친다. 그런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는 아마추어고 심사위원은 프로이므로 ‘어떤 말을 들어도 싸다’는 동의가 갑자기 형성된다. 이건 숫제 평가가 아니라, 명령이거나 짜증이기 일쑤인 데도 말이다. 가정해볼까? 누군가 심사평에 상처를 입은 나머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혹은 그러지 못했다. 눈물을 흘릴지언정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게 꼭 한 가지 진심이기만 할까?

노래 못하면 무례일까? 클럽 가면 무례일까? 숨겨진 뱃살이 무례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말하면 무례일까? 볼에 뭘 넣으면 무례일까? …. 그런데 그런 판결이 얼마나 우스운가 하면 예를 들어, 같은 보톡스라 해도 김장훈의 보톡스와 채정안의 보톡스는 천지 차이의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김장훈은 이미 국민적 ‘호감’이기 때문에 괜찮다? 도대체 ‘예의’를 앞세운 그 많은 판결은 무엇을 향하는 걸까? 스스로 그토록 무례한 것은 아무 상관할 바도 아닌가?

    에디터
    장우철
    아트 디자이너
    일러스트/이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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