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처절한 천명관의 웃기는 세계

2012.04.02GQ

사건은 의지와 관계없이 벌어진다. 개인은 대개 무력하다. <나의 삼촌 부르스 리>에서, 천명관은 그런 세계를 굳이 창조해놓고 히죽, 익살까지 얹어놓았다.

우연과 사건이 쉴 틈 없이 벌어지는데 사람은 어쩔 도리도 없이 흘러가는 소설을 썼다.
하하. 나도 평탄하진 않았다.

대학 대신 군대를 갔고, 막노동판에 있다가 보험회사에 취직했고, 첫 소설 <고래>를 내기 직전까진 영화판에 있었다. 소설을 쓰면서도 시나리오나 희곡 작업을 했지만, 소설을 쓴 후엔 좀 안정되지 않았나?
나이가 들고 에너지가 떨어지면서 격정도 사라졌다. 본의 아니게 차분해졌다. 난 원래 차분한 인간이 못됐다. 항상 불안했다.

당신 소설은 새벽 2시경의 경찰서 형사계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잔혹하게 죽고, 누가 누굴 찌르고, 베고 죽이는 사건이 몇 건이나 벌어지는지.
기자와 경찰은 그게 일상인 직업이다. 몇년 전에 어떤 어린 기자를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피부가 아주 희고 맑아 보이는 여자였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였는데, 그 일을 계속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자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나보고 “그럼 뭘 하면 좋겠냐?” 묻기에 “작가를 해라” 대답했다. 그 예쁜 여자가 겪을 험한 세계가 우려돼서 한 얘기긴 했지만 내가 해보니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 작가더라.

그거, 쉽게 동의할 순 없는 결론인데?
이탈리아 맨체스터 시티에 마리오 발로텔리라는 축구선수가 있다. 지금 공격수인데 굉장한 악동이다. 내가 되게 흥미롭게 지켜보는 친구인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을 가졌는데 만족할 줄 모른다는 비판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이 프리미어리그 축구선수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의 관심, 돈과 명예, 건강한 육체, 아름다운 여자들. 거긴 모든 게 다 있는 세계니까. 하지만 평생 할 순 없다. 삼십 대 중반만 넘어가도 축구선수 생활은 끝난다. 인생 전체를 길게 보면 작가가 참 좋은 직업이 아닐까? 먹고살기가 힘들긴 한데….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스타인 세상이 됐는데, 작가의 위상도 예전 같진 않다.
맞다. 경제적인 걸 생각해보면 그다지, 뭐 그럴듯한 직업은 아니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나는 괜찮은 것 같다. 사실 나도 최근에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 되고 나서도 ‘작가 이거 재미없다’ 생각했다. 첫 장편 <고래>내고 나서도 5~6년간 그랬다.

<고래>가 2004년 작인데, 그럼 최근에 와서야 작가로서 편안해진 건가?
1, 2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생겼고, 그 와중에 이 직업이 참 괜찮다 생각했다. 전에는 내가 소설가라는 것에 대한 정체성이 없었다. 이게 내 평생의 업이 될 거란 생각도 안 했다. 그냥 하긴 하는데, 궁여지책 끝에 한다고 할까? 그런 마음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작가가 됐을까?’ 그러면서. 나한텐 다른 선택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런 마음치곤 작가로서 부지런했던 게 아닌가? 벌써 세 편의 장편, 한 권의 단편 소설집을 냈다. 영화 <이웃집 남자> 시나리오 작업도 했고, 희곡도 쓰지 않았나?
아니다. 마음이 이쪽에 없었다. 뭐, 원래 소설에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얼떨결에 소설가가 됐다. 근데 재미도 없었다. 우리 동네, 놀던 물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원래 영화판에 있었으니까 그쪽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다 시나리오 작업도 하고. 또 연극 쪽과 연결이 돼서 연극도 한 번 만들고 그러면서 계속 모색을 한 거다. 이쪽에선 내가 좀 다른 동네에 온 느낌이 있었다. 내내 약간 외진 곳에 고립돼 있는 느낌이었다.

‘문단’이라는 곳의 성격이 워낙에 그렇지 않나? 문단 밖에 있는 사람도 그 폐쇄성을 짐작할 정도니까.
어느 정도. 그분들이 보기에 나는 영화판에서 온 애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을 거다. 그래서 ‘우리 동네 애가 아니다’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문단에 교류하는 사람도 없었고 잘 아는 문인도 없었다. 이 시스템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이미 굳어진 관행이 있었다. 그래서 별로 큰 뜻이 없었다. 지금도 큰 뜻은 없지만, 나한테 시간이 많이 없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곧 오십이 되는데, 나는 사람의 창작 활동은 오십 대가 마지막이라고 본다. 육십이 넘으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발표는 하겠지. 근데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나이는 사십 대, 길게 봐도 오십 대 아닐까? 인간의 신체적, 물리적 조건이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나한테 남은 시간이 10년 남짓이었다. 근데 괜히 또 딴 짓 하고 그러다간 또 몇 년이 금방 가고. <고래> 출간한 지가 벌써 8년 됐다. 그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렸다.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장편 <고령화 가족> 낼 때까지도 계속 그랬다. 문학에 대해 별 야심이 없었다. 마음에 많은 변화가 생긴 건 최근이다.

자연스럽게 가라앉은 느낌이지, 어떤 계기때문에 변한 것처럼은 안 보인다.
맞다. 계기 같은 건 없었다. <고령화 가족> 후기에 이런 말을 썼다. 존 어빙의 <가아프가 본 세상>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런 문장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마흔 살이 되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갔으며, 그녀가 원하는 바는 그 것을 글로 쓰는 것이었다.” 그 즈음의 나도 그와 비슷한 마음이 조금 들었던 것 같다. ‘이제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갔다. 이제 나한테 남아 있는 노동 시간이 많지 않다.’ 그걸 깨닫고 나니까 마음이 좀 급해졌다.

이유 없이, 시기나 시간 때문에 깨달음이 온다는 것도 사실 좀 허탈하다. <고래>와 <나의 삼촌 부르스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우왕좌왕하던 시기였다. 항상 여지가 있었다. 내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뭔가 기대를 갖고 문단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준비도 없이, 우연한 기회에 캐나다 같은 나라에 이민을 온 거다. 바로 적응이 안 된다. 모든 게 낯설고, 적응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하고 그런 시기 같았다.

하지만 작품을 읽을 땐 작가가 쓰면서 느끼는 신명이 그대로 전해지기도 했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가? <고래> 때는 좀 신이 났는데, 이번엔 사실 그렇게 못 썼다. 일일 연재를 하던 작품이어서. 원고지로 한 3천 매 분량을 10개월 동안 연재했다. 생각해봐라. 하루에 12매씩 매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좀 아쉽다. 원래 작품에 만족하는 게 어렵긴 한데…. 그래도 하루에 12매씩 질주하듯 쓰면서 이렇게 마무리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 혹은 뿌듯함은 있다.

아름다운 여배우 얼굴을 면도칼로 긋고 강간한 걸 16미리 카메라로 촬영하고, 삼청교육대에서 죽도록 맞고, 칼에 찔리고 비틀고. 주인공들을 그렇게까지 막장으로 괴롭힌 이유는 뭔가?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마냥 잔혹극이라고 생각하겠지?
요즘 그런 게 좀 유행인 것 같던데, 김영하 씨가 이번에 소설 내면서 이전의 두 작품과 묶어서 ‘고아 3부작’이라는 말을 했다. 박민규는 요즘 <매스 게임 제너레이션>이라는 작품을 <문학동네>에 연재하는데, 그 친구는 <삼미 슈퍼스타즈>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묶어 ‘80년대 3부작’이라 그런다. 나도 그래서 3부작이라는 이름을 붙여보면 <고래>,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이번에 쓰는 <길의 노래>라는 앵벌이 얘기를 ‘고난 삼부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신의 주인공들은 죽도록 고생하는데 안 죽는 게 장하다.
누가 그랬다. 왜 이렇게 주인공들이 다 힘들게 사냐고. 의도한 건 아닌데, 난 그걸 고난의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고래>의 춘희도 외롭고 지난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나의 삼촌 부르스 리>의 삼촌도 교도소 혹은 삼청교육대에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지금 쓰는 ‘앵벌이’ 얘기는 길거리에서 또 고난의 시간을 보낸다. 내가 그런 고난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최근에 깨달았다. 고난을 거치고 나면 뭔가를 얻는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대단하고 큰 건 아니라는 것. 이번 주인공 삼촌이 사랑하는 여자를 드디어 얻었을 때 그들은 이미 오십이 넘은 나이였다. 젊음은 다 지나갔을 때 얻은 씁쓸한 보상. 그런 거였다. 모르겠다. 내가 고난을 겪어서 그런 걸까? 그 시간들 때문인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차가운 건지 모르겠다.

주인공들이 대체로 어렸던 1권의 활기가 2권에선 없어졌다. 1권의 싸움은 재기가 있었지만 2권의 싸움은 명예와 이권을 건 싸움이었다. 그들이 어른이 됐다는 증거인가?
주인공들이 십대, 이십대를 거치고 청소년기의 유치함이 사라지면서 유머와 활기도 사라졌다. 좀 무거워졌다. 활기도 잃었다. 엄정한 현실만 남았다. 나는 그렇게 봤다.

한편, 당신이 굉장히 여린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매번 굉장히 많은 인물이 나오는데, 그들을 모조리, 반드시 챙긴다. 모두가 완결된 이야기를 갖는다. 물론 잔혹하지만.
다 비참하게 죽는다. 난 왜 그런 걸 쓰지? 진짜 모르겠다. 원래 더 허탈했다. 연재했던 작품과 책으로 출간한 작품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아예 다른 결말이었다. 원래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가 죽고, 삼촌은 복수에 성공한다. 여자를 죽인 그를 죽이는 거다. 그러고 사형 당하는 얘기였다. 나는 그게 진정한 무협의 세계, <정무문> 같은 권격 영화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복수를 완성하고, 주인공은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는 콘셉트를 선택했었다. 그런 통속적이고 관습적인 걸 좋아한다. 그런 걸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편이다.

    에디터
    정우성
    포토그래퍼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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