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부순 명필름

<건축학개론> 개봉 즈음,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를 만났다. 그녀는 이렇게 17년을 버텼다.

3월 22일, <건축학개론>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기존 영화 중에서 염두에 둔 영화가 있을까?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이다. 대표곡이 영화 전반을 이끌고 나간다는 점에선 <접속>과 비슷하다.

요즘 한국영화에 정통 멜로 영화가 뜸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직한 사랑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재작년 개봉한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 나왔을 때도 로맨틱 코미디는 한물 갔다는 평을 받을 때였다. 이번에도, 최근 트렌드하고는 다르지 않느냐는 우려가 있지만, 시나리오 자체의 매력이 있고,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트렌드와 상관없이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라면 장르의 유행과는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라노>를 만든 김현석 감독은 명필름에서 데뷔해, 주로 명필름과 작업을 함께했다.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도 앞으로 그럴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취향인데, 김현석 감독이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이 찌질한 남자여서 좋다. 마찬가지로 이용주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건축학개론>도 소심하고 좌충우돌하는 남자를 잘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유약한 남자를 잘 그려내는 감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마초적인 남성을 다루는 영화를 명필름에선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캐릭터를 잘 표현하는 배우의 발견도 계속 이어져 왔다.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주혁이 의외였듯이 강한 역만 하던 엄태웅도 <시라노>를 통해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엔 이제훈이 그렇다.
꼭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캐스팅을 하면서 답을 찾았다. <건축학개론>이 남자의 반성문 같은, 서투른 사랑 이야기여서 캐스팅이 상당히 어려웠다. 원래는 한 배우가 어린 시절과 성인 모두를 연기하려고 했는데, 이제훈과 엄태웅으로 나눠 연기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한데, 캐스팅을 하고 보니까 기존에 명필름과 같이 영화를 하던 배우들과 맥락이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제훈은 박해일의 과거를 보는 것 같고.

최근엔 이제훈, 김수현, 유아인 등 이십대 안에서도 폭넓게 주목할 만한 배우가 있는데, 주목받는 여자 배우도 있을까?
음…. 몇 명 떠오르기는 하는데, 다들 스펙트럼이 좁아서 조금 아쉽다.

과거 인터뷰에서는 내성적인 배우를 좋아한다고 했다. 제작자는 어떤 면을 보고 배우를 선택할까?
연기를 잘한다는 기준은 모호할 수 있을 거다. 몰입과 집중력이 강한 배우를 신뢰하는 편이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한 부분 중에서 선택을 받는 쪽이다 보니까,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배우가 훌륭한 배우로 거듭난다. 그런 몰입을 위해선 섬세한 관찰력과 예민한 성격이 있으면 훨씬 유리한 것 같다. 그래서 연기를 탁월하게 잘하는 배우들이 대부분 내성적인 것 아닐까? 자기 안을 깊숙이 들여다보니까.

이런 제작자로서의 노하우를 <마당을 나온 암탉>에선 살리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은 처음이니까 기존의 인적 인프라를 활용할 수 없었을 텐데.
픽사나 지브리와 달리 우리나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정규직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같이 작업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오돌또기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쪽도 우리도 장편 애니메이션은 처음이어서 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 속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가장 믿었던 건 원작이었다.

명필름에선 원작이 있는 영화가 <공동경비구역 JSA>를 포함해 두 편이 전부다. 최근 한국영화계에선 원작이 있는 영화가 속속 개봉되고 있다.
원작이 있는 영화가 딱 두 편인데, 크게 성공해서 원작이 가진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어떻게 재해석하고 시나리오로 옮기느냐가 중요하다. 원작이 굴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명필름은 오히려 실화나 새로운 이야기를 개발한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화하는 것은 탐탁해하지 않는다. 굳이 일본 소설을 가지고 해야 할 이유를 못 느낀다. 한국 소설도 충분히 많다. 왜 굳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일본 원작을 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까?
일본 상황을 한국 상황으로 바꿨을 때 시대와 어긋나거나, 심지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해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원작이란 텍스트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실패할 확률도 굉장히 커지는 것 같다. 명필름은 공포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 사실, 공포영화는 제작자 입장에선 굉장히 좋은 장르다. 최소의 제작비로 극단의 성과를 예상할 수 있으니까. 잘 몰라서다.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잘할 자신이 별로 없다. 공포영화는 장르적 이해나 습득이 정말 많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깊숙이 알아야 만들 수 있다. 어떤 감독은 기자 간담회에서 자신이 연출한 장르를 잘 모른다고 하더라. 예를 들면 블록버스터 괴수영화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감독이 왜 그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난 공포영화를 전혀 못 보니까 못 만든다.

작년에는 1백억 이상을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 명필름이 안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까?
아니다. 명필름도 큰 규모의 영화를 해볼 생각이 있다. 큰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화적 매력이나 미덕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시장 안에서 견인해내는 영향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 어디선가 할리우드에서 봤던 기시감을 주는 이야기가 문제 아닐까? 그런 영화를 개인적으로 굉장히 좀 혐오한다. 창의적인 이야기가 본질이고 중요하다.

결국 명필름이 경쟁력으로 삼을 만한 건 ‘이야기’말곤 없을까?
그것이 전부다. 테크놀로지를 제대로 발휘하는 건 윤제균 감독이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테고, 강제규 감독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명필름처럼 연식이 오래된 회사가 가져갈 수 있는 색깔, 가치관,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이야기만이 이 모든 걸 담을 수 있겠지.

독특한 색의 모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들이 많이 사라졌다. 반대로 대형 제작사들은 리서치를 통해 조금 더 안정적인 영화 제작을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어떤 리스크를 줄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단한 모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성공이나 영화적 성취에서도 멀어진다.

명필름에선 그런 식의 리스크 관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
우리같이 일 년에 한두 편 만드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영화라는 건 굉장히 개인적인 창의력에서 출발하는 거다. 스필버그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80년대에 스무 명의 직원이 앉아서 전화로‘ 어떤 이야기를 영화로 보고 싶으냐?’고 물었다면‘ 외계인이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주세요’라고 누가 이야기했겠냐는 거다. 스필버그 스스로 E.T를 상상할 수 있다. 영화는 여러 사람의 공통분모를 찾아서 만드는 게 아니다. 굉장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객관보다 직관의 힘을 더 믿나?
당연하다. 대신 제작자는 감독처럼 스스로 창작에 나서는 것이 아니고 거간꾼 역할을 한다. 조력자, 리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 그 직관에서 출발한 것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제작자의 역할이겠지. 하지만, 객관화가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거나 창의성을 훼손시키는 방식은 정말 미련한 제작자일 것이다. 새로운 것을 어떻게 꽃피우게 하느냐, 이것이 제작자의 역할이다.

그래서 제작자의 역할 중 하나가 신인 감독 발굴이기도 하다.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명필름 초기에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금 막 입봉 하고자 하는 감독과, 쉰이 된 나와 세대 차이가 큰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조금 더 겁을 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작업했던 감독 혹은 기성 감독과 작업한다.

단편을 만들어 장편으로 입봉하던 시절은 지났다.
지금은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니까. 아이폰으로 찍기도 하고, 진입 장벽도 낮아졌다. 그래서 얼마나 관객을 놀라게 하는 영화를 만드느냐가 더욱 중요해졌다.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또 누구나 좋은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상업영화에서 입봉 작품부터 충격적인 감독은 많이 사라졌다.
영화 산업 환경의 변화도 이유가 되겠지. 대부분 독립 장편영화로 입봉을 하는 시대니까. 천재 감독이나 패기를 보여주는 감독이 과거보다 수적으로 조금 덜 나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글쎄, 조금 더 기다려봐야 되지 않을까?

최근 독립영화 제작에서 가장 떠오른 문제는 음원 저작권에 관한 것이다. 영화계에선 저작권료가 부당하게 비싸다고 말한다.
음제협(한국음원제작자협회)과 영화계에서 그 갈등에 대해 협의 중에 있다. 음제협 쪽에선 극장 개봉 시 저작권료를 내고, 케이블 TV로 갔을 때 또 저작권료를 내는 방식을 주장하는데, 지금 한국영화계에 대한 현실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책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영화인들이 답을 찾아내야겠지.

<건축학개론>에서 중심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다. <접속>때 OST로 괜찮은 수익을 내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어떤가?
아쉽게도, 원곡자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OST 발매 계획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