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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남자, 약한 여자

2012.05.14유지성

자신감이 부족해 약을 챙긴 남자와, ‘그날’을 피하기 위해 약이 필요했던 여자의 여행 이야기.

남자는 바빴다. 여자와는 주말에나 겨우 한 번 만났다. 여자는 토요일에만 사랑받는 예능 프로그램 같았다. 가끔 파업을 생각하다 그만뒀다. 좀 섭섭하긴 했지만, 대신 봄이 오면 같이 휴가를 쓰기로 약속했다. 첫 목련이 피었을 때, 여자는 꽃잎의 개수보다 달력의 날짜를 먼저 셌다.

남자는 약속을 지켰다. 교외의 펜션도 미리 예약해놓았다. 여자는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쳤다. 같은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두 개로 늘었다. 하필 휴가가 ‘그날’과 겹치다니. 여자의 주기는 무척 정확한 편이었다.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몇 번째 날이 제일 고통스럽고 불편한지까지 매달 거의 똑같았다. 여자는 난처했다.

남자가 바쁜 건 결코 여자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이 여자의 섭섭한 맘을 한 방에 풀어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선물을 사갈까? 이벤트를 준비할까? 그러다 스스로 선물이 되어보기로 했다. 우람한 이 남자는 침대에선 쑥스러울 때가 많았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만나지만, 집보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핑계로 횟수를 줄였다. 오래오래 참지 않으면 잘 서질 않아서였다. 속옷을 내리면 로켓이 하늘로 치솟듯 배꼽을 탕! 하고 때리는 기분을 다시 한 번 찾고 싶었다. 남자는 즐겁고, 여자는 놀라겠지.
여행 얘기를 꺼내자, 친구들의 조언 또는 증언이 잇달았다.
“약 먹으면 연달아 세 번도 할 수 있대.”
“자다가 딱딱해서 깬다. 아침까지 계속 그래.”
한 번도 발기약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원래부터 선물은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걸 해줘야 한다고 믿었다. 여자가 알아채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일탈하는 것 같은 묘한 스릴도 있었다.

여자는 달력을 볼 때마다 울상이었다. 남자는 ‘그날’만 되면 영 내켜하질 않았다. 그날이 오면 사정을 참을 필요가 없다고 좋아하는 부류의 남자는 아니었다. 오랜만의 여행인데 섹스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속상하고 또 미안했다. 불 끄고 모르는 척 있을까? 모텔에서나 가능한 일. 여행지 펜션에서 시트를 더럽히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대책이 영 마뜩찮았다. 아직 여행까지는 한 달이 남았다. 문득 블로그에 섹스 칼럼을 쓰는 절친한 친구가 피임약을 꼬박꼬박 먹으며 연재 원고를 쓰던 게 떠올랐다. 약의 효능과 부작용에 대해선 이미 몇 번 들은 바가 있었다. 잘못 알려진사실이 많다는 것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 먹으면 날짜를 조절할 수 있었다. 요즘은 중요한 시험이나 면접을 앞두고도 많이 먹는다는데, 이번 여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토익 시험보다는 훨씬 중요한 것 같았다. 여자는 남자에겐 비밀로 하고, 여행 가기 전까지 딱 한 달만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피임약의 장점에 대해 떠올렸다. 그날이 다가오면 꼭 여드름이나 뾰루지가 나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단 약을 먹고 나면 피부가 좋아진다. 여행 며칠 전부터 찾아올 짜증이나 두통, 가슴 통증도 잠잠할 것이다. 혹여나 고비를 못 넘기고 다툰 후에 여행지에서 어색하게 화해할 일도 없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단지 여행 갈 때도 약을 챙겨가야 한다는 게 좀 걸렸다. 남자들이 피임약을 보고 반가워했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었다. “네 건강이 걱정되어서 그래. 왜 먹는다고 미리 말 안 했어?”라고 안쓰러운 눈으로 말하면서 이 여자가 과연 선수는 아닌가, 하는 의심을 숨기는 게 보통이겠지. 똑같은 피임 아니냐고 항변한다 해도, 콘돔은 편의점에도 있지만 약은 병원까지 가서 처방 받아야 한다고 정색하면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건 사실이니까.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글로만 읽었을 뿐 진짜로 먹어본 적은 없었다. 몸 안에서 나도 모르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감기약만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먹어도 환자가 된 것 같고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데, 이걸 먹으면 눈치까지 봐야 하니 괜히 더 빌빌대는 건 아닐까? 그래도 여행까지 가서 기껏 침대에 누웠는데, 남자의 바람 빠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달력에 자기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렸다.

남자는 결국 발기약을 처방 받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거친 후 별 문제없이 약을 받아서 돌아왔다. 이게 정말 필요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총 네 알을 받았다. 시험 삼아 한 알을 먼저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몇 시간이나 갈지, 얼마나 딱딱해질지, 그리고 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남자는 궁금했다. 일 년에 몇 번 있지도 않은 휴가인데, 밋밋하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가만, 혹시 여행 날짜가 여자의 그날은 아니겠지? 지난달 스케줄 표를 보니 딱 그맘때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물어볼까? 어쨌든 그렇다 해도 휴가를 바꿀 순 없었다. ‘나나 잘하자.’ 남자는 서울을 떠난 후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늠름하게 행동하리라 맘을 먹었다. 피만 보면 화들짝 놀라는 게 문제였지만, 이제 발기약도 준비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여행지에서 숙소로 정한 호사로운 펜션엔 락스에 막 담갔다 뺀 것 같은 하얀 리넨 시트가 깔려 있었다. 이불도 흰 색, 베개도 흰 색. 여자는 맘을 쓸어내렸다. 약을 먹길 잘했군. 남자는 시트 색이 맘에 걸렸다. 여자에게 물었다.
“너 혹시… 그날 아냐?”
“아냐, 어제 끝났어.”
남자는 안심했다. 마음이 편해지자 밤은 금방 찾아왔다. 낮 내내 같이 돌아다니느라, 남자와 여자는 아직 약을 먹지 못했다. 화장실엔 물컵이 없었다. 여자가 좀 더 급했다. 싱크대 앞에 뒤돌아 서서 약을 꺼냈다. 딸깍, 플라스틱이 구겨지는 소리.
“어? 감기 걸렸어?”
눈치 빠른 남자가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생긴 감기약이 있던가? 여자는 당황했다. 남자에게 지금이라도 전부 실토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친구의 섹스 칼럼에서부터 동그라미를 세 개나 친 달력까지 꺼내 보여주며, 남자가 물어보지 않은 약의 효능까지 줄줄이 털어놓았다.
“정말이야. 나 처음 먹어봐. 이게 이렇게 생긴 건지도 몰랐어.”
남자는 여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오럴을 기가 막히게 해줘놓고, 자긴 ‘야동’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 없다며 교태를 부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약이 혹시 건강에 안 좋은 건 아닐까 걱정되긴 했지만, 여자의 고백에 어떤 거짓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현명한 여자였고, 자기 몸에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남자는 그보다 뒷주머니에 감춰둔 약이 더욱 신경 쓰였다. 짠! 하고 밝히려면 지금이 찬스일 텐데. 그래도 이왕 준비했으니, 내일쯤 얘기하는 게 나으려나? 일단 써보고.

남자는 여자 몰래 약을 먹었다. 껍질은 변기에 버렸다. 여자가 이 여행이 끝나고 약을 끊는다면, 이번이 콘돔 없이 섹스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 피임약을 먹는 동안에도 콘돔은 쓰라고 했나?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었다. 미리 발기약 한 알을 먹어본 바에 따르면, 아무리 슬프고 처절한 생각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부터 한 시간만 기다리면 됐다. 쓸데없이 욕조에 거품을 가득 채워놓고 물장구를 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남자는 로마의 집정관이 된 양 허리에 수건을 둘둘 만 채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차양처럼 수건 가운데가 볼록 솟아 있었다. 누워 있던 여자가 다리를 길게 뻗어 발가락으로 수건을 낚아챘다. 차양처럼 앞으로 쭉 뻗어 있던 것이, 자석에 달라붙듯 아랫배 위로 찰싹 튕겨 올랐다.
“웬일이래?”
“뭘 좀 먹었지.”
“뭐, 개불이라도 먹은 거야?”
물렁한 개불을 들먹이기엔 남자는 너무 빳빳해져 있었다. 남자의 이런 자신감은 여자에게도 처음이었다. 여자는 좀 전의 당혹스러웠던 상황도 다 잊어버린 채, 남자의 선물을 즐겼다. 한 번, 두 번, 좀 쉬었다 세 번…. 리넨 시트가 솜이불처럼 눅눅해졌을 때, 남자가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너도 약 먹었어?”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시계를 쳐다봤다. 두 시간 삼십 분. 엎드려 있는 여자의 몸이 선풍기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가방엔 두 알이 더 남아 있었고, 교외의 밤은 도시보다 좀 더 어두웠다. 선물의 영수증은, 당분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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