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놀이는 끝났어요 2

2012.06.04GQ

하지만 철없는 마음은 끝나지 않았다. 배두나는 유치하게, 말랑말랑, 들쑥날쑥 살 거라고 했다.

자기가 뭘 해야 즐거운지 안 거네요. 아주 일찍.
맞아요. 현장에서 제가 이렇게 졸고 있다가도 봉준호 감독님이 무전기로 “영화배우 배두나 씨?” 하면 벌떡 일어났어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매달렸어요. 스타니 뭐니 다 때려치우고, 윤여정 선생님이랑 한다 그러면 일일 연속극 하고, 고두심 선생님이랑 한다 그러면 주말 연속극 하고, 미니 시리즈 조연부터 연극까지 뭐 별의별 걸 다 했어요.

영화를 해서 지금처럼 취미가 많다고 말하던데, 그건 무슨 뜻이죠?
허전해서요. 에너지를 쏟아 부을 데가 없어서 자꾸 뭔가를 배워요. 빵 굽고, 쿠키 굽고, 꽃꽂이 하고, 사진 배우고, 집착할 데가 필요해요. 취미라기보단.

당신에게 카메라는 좀 다른 것 같던데요? 카메라도 그냥 허전해서 하는 거라고요?
예. 똑같아요. 허전해서. 저보고 아마추어 포토그래퍼라고 하는 게 제일 창피해요. 사진이 좋은 이유는 카메라 앞에 서서 느끼는 것과 카메라 뒤에 서서 느끼는 게 비슷해서예요. 피사체일 땐 제가 사랑을 좀 받는 것 같고, 찍을 땐 사랑하는 것 같고. 작품을 하다 보면, 의도적으로 카메라 앞에 안 서야 할 때도 많잖아요. 가령, 안 좋은 작품을 쉬기 싫어서 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내가 카메라를 잡는 것. 그렇게 허전함을 달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낸 책 이름도 ‘놀이’예요. 무슨 사진가의 범주에 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다 그 사진집이면서 수필집이 너무 잘돼서 그래요.
네. 베스트셀러였죠.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다들 반대했는데, 전 될 것 같았거든요. 큰 출판사랑 미팅을 해도, 정보가 없는 책은 안 된다고 그랬어요. 근데 제가 외국 다녀 보면 정보 없이 정서로만 다가가는 책 많았거든요. 애들 막 놀고 싶게 충동질하는 책 있잖아요. 우리 애들도 그런 게 필요하다고 했는데, 가이드북 아니면 안 한대서 친한 드라마 제작사에서 그 책 하나 때문에 출판사 만들어서 내줬어요. 그런데 <런던놀이>가 대박이 난 거죠. 날 믿고 책 내준 게 고마워서 인세도 안 받았어요, 진짜. <도쿄놀이>부터 베스트셀러 작가 인세로 받았지만. 하하.

<런던놀이> 이후 두 가지 경향이 생겼어요. 소위 ‘감성 에세이’와 ‘연예인 책’.
미니홈피 들어와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는 애들만 하루에 1만 명이었어요. 제가 노는 모습이 재밌는 사람이 1만 명이었던 거죠. 제가 읽지는 못해도 외국에 나가면 사진집이나 조그만 에세이집을 꼭 사왔거든요. 그 책, 그 사진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림만 봐도 기분 좋아지는 책들 있잖아요. 내 사진 자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난 너무 못 찍으니까. 근데 지금 <런던놀이> 보면 창피해요. 진짜 최근에 <런던놀이>보고 깜짝 놀랐어요.

<서울놀이>는 좀 낫나요?
좀 나아요. 사람이 세련돼졌달까? 아하하. 제가 영화는 허영을 부려도, 드라마나 책 이런 데서는 뭐가 대중적인지 아는 것 같아요. 그죠?

출판 시장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서, 차기작 구상한 건 없나요?
20대 때 놀이 시리즈 한 걸로 만족해요. 이제는 그렇게 가볍게 접근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20대였으니까, 10대 친구들한테 보여줄 생각으로 할 수 있었던 거지.

놀이는 이제 없어요?
네. 놀이는 끝났어요. 저는 그걸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녀요. 주변에서 그렇게 확신하지 말라고, 뉴욕놀이나 파리놀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하는데,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일단 다른 연예인들이 다 비슷한 종류의 책을 내고 있잖아요. 난 남들이 다 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책은 다시 보는 것 같은데, 당신이 출연한 영화도 다시 보나요?
가끔 봐요.

어떤 작품을 제일 많이 봐요?
<린다 린다 린다>를 제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전 그 영화가 그렇게 웃겨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그 어색한 유머가 정말 좋아요.

<린다 린다 린다>에서 당신이 노래 부르는 장면을 많이 돌려 봤어요.
진짜요? 우, 창피해.

그 노래가 당신 같단 생각을 했어요. 노래 가사나 분위기가 당신 같다는 게 아니고요. 블루 하츠의 ‘Linda Linda’는 멋 안 부릴 준비만 돼 있으면 누구나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당신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Linda Linda’는 당신 같은 노래죠.
되게 좋은 말이네요. 아, 나 감동 받았어요.

하하. 뭘 또 그렇게.
제가 연기에서 추구하는 방향이니까요. 누구 흉내 내지 않고, 멋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는 거요. 그게 저와 어울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어요, 진짜.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하하. 솔직히, 좀 그래요. 특이하진 않고, 평범해요. 현실적이고요. 근데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 같아요. 특별한 부모님을 만나서, 제 인생이 굉장히 특별해진 것 같아요. 특별한 부모님 밑에서 좋은 교육과 좋은 영향을 받았고, 공부가 아닌 다른 데서도 많은 걸 배웠어요. 그래서 제가 영화쪽에서 걸었던 길도 특별했던 것 같고요. 나는 그런 자부심은 있어. 내가 인기 스타는 아니지만, 다른 걸 희생해서, 그러니까 돈과 인기를 희생해서라도, 특별한 길을 걸어 왔다는 거요. 그리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요. 제가 <코리아>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자신감일걸요?

친구들이 말하는 당신의 특별함은 뭔가요?
사람들은 저보고 다 잘 모르겠대요. 제일 친한 강세미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매일같이 드나들어도 저는 세미가 온다면 미리 청소를 하거든요. 세미는 그게 배두나스러운 거라고 해요.

당신에겐 거치적거리는 관계가 없을 것 같아요.
오죽하면 아빠가 몇 년 전에 저한테 선물한 책 제목이 <부탁 좀 합시다>예요. 넌 반드시 부탁하고 살아야 된다고, 그래야 성공한다고요. 제가 그런 걸 못하는 성격이에요.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개인적인 부분이 있는 거죠. 전화 하나도 먼저 못해요, 사람들이 보고 싶어도, 외로워도, 우리 만날까, 이런 말을 못해요. 걔 바쁠까봐! 제가 생각해도 좀 이상해요.

<부탁 좀 합시다>에서는 어떻게 하라던가요?
그 제목을 딱 읽는 순간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았어요. 그게 얼마나 삶에 유용할지도 알겠고. 근데, 죽어도 안 보죠. 남들이 나한테 부탁하는 건 내가 참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좋은데, 나는 못하겠어요. 왜 그럴까?

어쨌든 스스로 억울하다고 느끼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억울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상해지는 거죠.
옛날에는 억울하단 느낌을 종종 받았던 게, 나는 남한테 폐 안 끼치려고 하는데 남들은 나한테 폐 끼친다? 이상하게 손해 보는 느낌이 들잖아요. 특히 이런 업계에서 일하면서 스태프 막내부터 윗사람들까지 다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스케줄 다 맞춰주고 그러면 나를 제일 뒷전으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착하니까! 하지만 그건 또 아닌 거야. 그래서 막 화병 생기고 그러니까, 만약에 누가 나한테 이십 분 기다리게 하면, 난 다음에 이십오 분쯤 늦게 가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나아요. 뭐 다들 남한테 못된 짓 하면 발 못 뻗고 잔다고 하잖아요? 근데 잠 잘 오던데요? 이제는 마음이 좀 편해요.

마음이 너무 편해지면 늙는 거 같지 않아요?
맞아요. 목소리가 바뀌더라고요. <코리아> 보면서 처음으로 제 목소리가 그렇게 낮다는 걸 알았어요.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몸이 반응해요. 내 목소리로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직 젊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아, 젊죠! 어리진 않지만, 아직 젊다고 생각해요. 저는요, 계속 유치하게 살고 싶어요. 저는 몸과 마음을 다 쓰는 직업을 갖고 있잖아요? 몸과 마음을 다 쓰는 직업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몸은 어쩔 수 없더라도 마음만큼은 어른이고 싶지 않아요. 계속 유치하고, 애 같고, 말랑말랑하고 싶어요. 왜 사람들이 상처 많이 받다 보면 면역이 되잖아요? 면역되는 것도 싫어요.

함민복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이 생각났어요.
영화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상황을 표현하려면, 제 자신이 되게 말랑말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울음도 웃음도 잘 못 참고 그래서 감정 컨트롤 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고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들쑥날쑥, 좀 애처럼, 철들지 말고.

배두나는 그런 배두나에 적응했고요?
아니요, 아직.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아, 힘들죠. 하지만 배우들은 다 그럴걸요? 저처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배우 하면서 마음을 쓰고,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덮고 그런 거죠.

잘 덮이긴 해요?
아우, 지금 다리 저려요.

 

 

    에디터
    정우영
    포토그래퍼
    신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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