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속물들

2012.06.26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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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되도록 한 번도 인스턴트커피를 마셔본 적 없다던 여자애를 볼 때마다, 인생 다 제 잘난 멋에 사는 건가 봐, 싶다. 사람들이 다 알아준다는 착각으로 세상이 자기에게 빚진 양 살아가는 CF용 연예인도, 두 쪽밖에 없으면서 벌판처럼 꿋꿋한 중화요릿집 배달부도 다를 게 없다.

2012년의 현실에도 여전히 계급 이슈가 만연하지만, 이제 계층은 계급이 아닌 취향으로 나뉘기도 한다. 한편, 취향은 난데없이 속물을 불러모은다. 마키아토가 새끈한 음료인지 아는 커피 속물, 장미리의 ‘두남편’이 좋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음악 속물, 마트용 포도주가 마냥 창피한 와인 속물, 피카소라면 못 그린 스케치조차 가보인 미술 속물, 파스타를 먹을 때 스푼과 포크를 동시에 쓰는 게 구리다고 생각하는 음식 속물, 돈을 안 들이고는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다고 믿는 교육 속물, 죽어도 영어를 원어민처럼 해야 하는 발음 속물, 그 해변은 자기 말고 아무도 가지 않아야 마땅한 여행 속물….

속물들은 한 번도 닭똥집을 먹지 않은 척, 연탄 아궁이를 보지 않은 척하지만, 누군들 자기 식대로의 속물 아닌가. 나도 스테이크를 웰던으로 주문하는 건 범죄라고 생각한다. 뚝뚝 흐르는 피맛을 모른다면 스테이크를 먹을 자격이 없지. 나의 변명은, 어떤 점에선 음식에 관해 속물적이지 않다면 식문화도 80년대 다이닝에 멈춰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정량의 허세, 열망의 게임. 속물됨이란 또 하나의 생존이다. 주변 사람들을 깔볼 수 없다면 지위를 갖는 게 무슨 소용인가? 지위는 현대 삶의 구석으로, 후미진 곳으로 퍼진다. 구석이 더 커질수록, 후미진 곳이 더 웅대해질수록 ‘일반인’들로부터 맹렬히 무장해야 한다. 그러나 욕망과 행동 사이의 투명성은 속물의 특권. 개인이 인종이나 성별로서가 아닌 취향으로 자기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분류법 아닌가.

까다로움은 도회적인 속물들의 기준이다. 까다로움이란 뭔가를 무지 좋아하는 바람에 자주 화가 나는 것. 순진하게도 이류, 키치하거나 흔한 것, 평범하거나 따분한 것에 반발하지만, 제대로 된 커피만 있으면 온누리에 사랑만 가득한 것. 편견은 무관심과 무지, 인종에 대한 기준과 치우친 신념이 주는 데 반해, 까다로움은 경험으로부터 직접 획득된다. 그러나 경험은 지식이 되고 지식은 고통스러우니, 경험치가 쌓일수록 아름다운 해변을 망가진 환경의 측면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경험은 속물들이 받는 저주. 눈을 뜬 이상 그 눈을 닫을 수 없다.

이 논의의 마지막 질문은, 터너 상을 탄 그림보다 화투장을 더 좋아하는 사람을 비웃을 수 있냐는 것이다. 즉, 무심하고 둔감한 사람을 너그럽게 봐줄 수 있을까? 답은 진작에 나와 있다. 속물들이 그들의 후천적 천성으로서 뭔가를 멸시하기도 전에, 어떤 것들은 이미 그 자체로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궁극의 거짓말

전에는, 세상이 애들 과자를 나누어주듯 공정하며, 모두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세뇌 받았다.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속출한다. 신은 가난한 아이에게서 사탕을 빼앗아 럭셔리 교복을 입은 아이에게 주었기 때문에. 정말 화나는 건, 머리 좋고 잘생긴 친구. 얼굴 되는 사람은 구구단도 몰랐음 좋겠는데, 잔인한 진실은, 그는 심지어 프랙털 도형까지 우습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더 기분 나쁜 건, 그렇게 다 가진 사람이 유머까지 장착했을 때. 거기다 제 얼굴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못생긴 사람 전용인 자기 비하류의 위트까지 구사하면 얘기는 끝. 결정적으로 짜증나는 건,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애써도 그가 가진 특성 하나 닮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으로 접은 듯한 그 대칭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것조차 도저히 좋아할 수 없다. 누군가의 아름다움은 옆 사람에겐 개인적인 모욕이니까. 그럼. 세상엔 관심이란 자원이 한정돼 있고 그놈 때문에 그 관심을 못 받는다면, 내 얼굴이 군만두라도 화나는 게 당연하지.

육체적 우월함은 단지 좋은 자질 중 하나가 아니다. 필요한 것 자체이자, 다른 전부를 비웃는 조건이다. 사회는 잘생긴 사람들에게 그렇게 통찰력 있고, 똑똑하고, 위트 있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얼굴이 되는데 그들이 왜 굳이 그런 것까지 가져야 하나? 사형장에서 암 치료법을 가진 의사와 미녀, 둘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면 의사는 3초 안에 초벌구이가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아름다운 사람들은 언제나 용서된다. 물론, 일반적으론 다들 비교우위를 느끼는 편이다. 적어도 저 사람보단 내가 낫지. 그렇다 해도 스스로 먹이사슬의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맘 푹 놓고 태연히 살 순 없을 것이다.

아, 농담. 그걸 다 갖춘 사람은 없다. 혹시 궁극의 사기로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시기하지 않는다. 그들도 노화를 막을 순 없을 테니까. 그들은, 젊어서 예쁘지 않으니 나이 먹는 게 안타까울 것도 없는 우리보단, 타격이 5만 배 더 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못생긴 사람들이 잘생긴 사람들에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돌려주는 마지막 복수다.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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