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SF 철학관

2012.08.17GQ

SF 영화를 비판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철학이지만, 철학을 위해 SF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이미 봤던 거네.” <매트릭스>는 다른 가상현실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13층>, <다크 시티>, 최근 <소스코드>까지 가상현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단지 <매트릭스> 이후에 알려졌단 이유만으로 아류작 취급을 받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매트릭스>가 선보였던 사이버펑크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이 영화만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상상력이었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영화적 계보를 훑자면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를 필두로 한 무수한 사이버펑크 영화들이 있었고, 워쇼스키 남매가 <공각기동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준 수많은 SF 소설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매트릭스>가 하나의 분기점 내지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압도적인 비주얼에서 찾을 수 있다.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전혀 새로울 것 없지만 그것이 영상으로 구현되었을 때 드디어 ‘새로운 것’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매트릭스>의 이미지는 ‘최초’가 되었다.

재밌는 사실은 그 이후 사람들이 SF 영화에 대해 가지게 된 선입관이다. <매트릭스>를 경험한 관객들은 영화가 이토록 철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같은 책이 나왔겠는가. 영화에서 철학을 발견하고자 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SF 장르는 한동안 인간의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장으로 변모했고, 새로운 철학적 비전이나 세계관을 제시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물론 굳이 SF가 아니더라도 영화라면 응당 인간을 응시하는 깊이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까지 SF 영화에 들이대는 잣대를 보노라면 이른바 ‘철학’과 ‘비전’에 대한 거의 강박에 가까운 반응들이 엿보인다. 대표적으로 리들리 스콧의 최신작 <프로메테우스>를 둘러싼 찬반의 담론이 그러하다. <프로메테우스>가 걸작인지 졸작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폄하하는 근거의 중심에 빈곤한 철학적 성찰에 대한 실망감이 자리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반대로 이 영화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의 주장에는 공통적으로 스펙터클한 이미지에 대한 상찬이 들어 있다. 이것은 선후의 문제도, 우열의 문제도 아니다. 눈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이야기는 영화라 할 수 없고 이야기 없는 이미지도 공허하다. 문제는 어느 시점부터 SF 영화의 본질이 철학적 비전의 제시에 있다고 믿는 환상이 너무도 공고하다는 점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이후 30년을 열어갈 걸작이냐 묻는다면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응당 위대해야만 한다는 무게감에 짓눌린 이 영화를 위한 변명을 하나 하자면 초반 인류 탄생의 기원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제 몫을 충분히 해냈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과거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최근 <트리 오브 라이프> 역시 마찬가지다. 블록버스터로서의 비주얼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상상력을 어떻게 스크린 위에 옮기는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다.

이미지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매트릭스>가 ‘최초’로 군림할 수 있는 근거는 최초의 ‘말’이 아니라 최초의 ‘이미지’에 있다. “이미 아는 게” 아니라 “이미 봤던 거”란 점이 중요하다. 그건 마치 천지창조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천지창조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통해 이미 수차례 상상되었지만 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을 목격한다. ‘영화’라는 현실을 스크린 위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지닌 본질적인 힘이며 영화가 추구해야 할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빈곤한 영화”라는 혹평에 시달렸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SF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몇십 년 후의 미래를 ‘보여줬기’ 때문 아닌가.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궁극의 시청각적 경험, 그곳에 SF 영화의 진정성이 있다.

그런데 상상이 현실(화면)이 될 때 우리는 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실망한다. 무한히 펼쳐진 상상의 나래가 화면에 그려지는 순간 그 신비함도 함께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SF 영화를 본다는 건 상상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최근 SF 영화에 담긴 철학적 사유에 집착하는 건 그런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갈망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압도적인 영상을 통해 충분한 포만감을 느꼈다면 그 순간까지 굳이 이야기와 내용과 메시지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SF 영화에서만큼은 정교한 이야기 구조보단 우주적 스펙터클에 좀 더 집착함이 마땅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상상력들이 우리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 극장 안에서 생명을 얻고 있다. 당신은 가서 보고 압도당한 후에 순수하게 경탄하기만 하면 된다. 아주 쉬운 일이다.

    에디터
    글 / 송경원 (영화 평론가)
    기타
    일러스트레이션 /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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