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다.

고전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남성상을 회복하려는 작전은 실패했다.

요즘 남자다움이라는 개념이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 이제껏 남자다움이라는 개념은 단결, 치열함, 위엄 있는 존재처럼, 궁극적으로 강한 힘을 상징해왔다. 그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단호한 신념을 가졌거나 전통에 순응하는 남자들과 함께 경박함, 그리고 그런 ‘스타일’의 공격을 받아왔다. 성적 혁명과 함께 시작된 공격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속됐다. 그 모든 것의 구실은 성적 평등이었다. 그런 공격은, 한편으로는 좋은 영향으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1950년대에 남성용 화장품이라는 게 있었다면 분명 혐오 대상으로 남았을 테지만, 이미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1차원적 남성상의 파괴 과정이 낳은 긍정적인 효과, 특히 남자라면 응당 감춰야 했던 유쾌한 면을 수면 위로 꺼내고, 남자들이 다양한 패션 언어를 거리낌없이 구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막연하고 불안한, 예측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남자다움에 흠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든든한 패러다임은 균형을 잃었고, 변수가 팽배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요즘 남자는 예전 같지 않다”라며 불만스레 얘기한다.

남성상의 여성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확실히, 옛날 남자가 더 좋았어.” 해결책이 있을까? 사람들은 이런 답을 찾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 패션은 거품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깊숙이 스며들어 주변의 모든 일에 민첩하게 반응한다. 재빨리 수요를 차지하고 공급을 선점한다. 그런 속성 덕분에, 단단한 남자다움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남성 패션에서 철저한 고전주의는 꾸준히 도약했다. 고전주의는 안전과 안심을 의미한다. 마치 조심스럽게 뒷걸음질하는 듬직한 발걸음처럼. 고전주의의 광풍은, 그렇게 과거의 남성다움을 다시 부활시키는 듯 보였다.

이대로라면 중심을 잃은 남성상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강력한 남성적인 힘이 불확실성 앞에서 제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너무 쌓이면 변하기 마련이다. 고전주의가 우아한 향수로 보이던 시절이 지나자 그저 새로운 멋부림인 양 변질됐고, 낡은 회전목마처럼 시대착오적이고도 싱거운 패러디로 변해 버렸다. 매 계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리는 고전주의 남성 패션의 부흥회, 피티 워모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골수 고전주의자들이 집결한 열광적인 분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근엄하고 강력한 남성적 모습은 껍데기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스리피스 수트, 포켓 스퀘어, 스펙테이터 슈즈, 서스펜더, 보타이를 무기로 한 공작 싸움일 뿐이다.

패션계에서 가장 짓궂은 장난꾸러기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고전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항상 미와 표현의 개념을 우아하게 파괴하는 옷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풍자하는 그녀는, 프라다 2012 가을겨울 남성 컬렉션을 통해 풍자의 절정을 보여줬다. 마치 고전적 인물 묘사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이 컬렉션을 보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19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이 화가는 그림을 마치 복식판화처럼 아주 세밀하게 그렸다. 프라다는 엔리코 바이가 만든 인형만큼 인상이 험악하고,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남자들처럼 엉뚱한 캐릭터를 창조했다. 겹겹으로 옷을 입고, 목은 항상 가리는데다, 끈으로 허리를 묶고, 가슴에는 메달을 단 프라다의 강력한 고전주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나폴레옹과 러시안 주교를 합쳐놓은 모습이다. 전성기 시절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떠올리게 하는 적절한 풍자. 다다이즘 예술가들이 그랬듯, 프라다는 모든 것이 조상彫像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옷은 조상들의 연극 매체다. 그녀의 도발은 분명하다.

아무것도 믿지 말아라. 왜냐하면 어떤 것도 보이는 것과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골수 고전주의자는 분명 이 컬렉션을 보는 내내 흥미로운 세부를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재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들은 전체 컬렉션이 얼마나 돌발적인 행동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게 바로 프라다가 노리는 것이다.

프라다가 표현한 것처럼, 결국 과도한 고전주의는 기운 빠진 남성상에 전혀 힘을 불어넣지 못한다. 지나친 경박함만큼이나 당황스러울 뿐이다. 정점에 이르면 전혀 다른 뭔가를 찾는 인간적인 법칙에 의해, 오히려 극도로 단순한 것에 대한 욕망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낸다. 미술가 채드 와이즈는 현대적 균형을 찾기 위해서 자기가 그린 고전 방식의 초상화에서 얼굴과 다른 특징적 요소를 지워버렸다.

프라다는 패션계의 채드 와이즈인 셈이다. 그녀의 다음 컬렉션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난 6월 밀라노에서 열린 2013 봄여름 남성 컬렉션에서 무의식적 상태의 이미지를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 오토마티즘으로 전 컬렉션을 만든 듯한 지나치게 반복적인 옷들을 선보였다. 성별 구분을 없앤 1960년대 루디 건릭의 유니섹스 룩, 조지 루카스가 1977년에 만든 영화 <THX1138>를 떠올리게 만든다. 모든 옷에서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채 줄무늬의 대비, 다림질로 생긴 주름만 남겼다. 남자와 여자가 거의 같은 모습을 한 건, 과도한 클래식, 지나치게 꾸미기만 하는 요즘 패션 경향에 대한 혐오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클래식은 답이 아니었다. 남성다움이라는 것은 여전히 표류하고 있고, 어쩌면 영원히 부서진 채로 남을 것만 같다. 적어도 철저한 고전주의는 남성다움을 구할 수 없다. 우스운 광대극을 벌일 뿐, 오히려 남녀의 구분조차 성가신 일로 만들 것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성을 초월한 존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나? 아직이라면, 아마 곧 준비해야 할 것이다. 클래식이 최신 경향인 시대는 저물고 있다. 오히려, 경향이라는 건 미적 평등을 추구하는 쪽으로 이어질 것이다. 올바른 남성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천만에, 애초에 남성다움은 수트나 재킷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자다움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존재와 행동뿐. 고전주의가 충만한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 계절이 가기 전에, 후회 없이 클래식을 즐기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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