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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의 일기

2012.11.26유지성

남자는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는 여자가 좋았다.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는 동안에만.

남자는 매일 여자를 만났다. 매일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인사는 눈으로만 했다. 회사 건물의 회전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내 데스크였다. 여자는 아침마다 거기에 있었다. 멋진 넥타이를 맨 날은 데스크 가까이로 걸었고, 헐레벌떡 나온 날은 멀리 돌아서 갔다. 지각하는 날은 여자가 없었다. 교대 근무를 한다고 했다. 여자가 안내 데스크에서 일을 시작한 뒤, 남자는 지각을 잊었다.

여자는 유니폼이 싫었다. 제아무리 유니폼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곡선을 살려준다 해도, 목 끝까지 채운 셔츠, 틀어 올린 머리는 영 어색했다.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부끄러웠다. 사복만 입었다 하면 더 끝내주는데. 빌딩에 입주해 있는 회사엔 남자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쁜 옷을 입지 않아도 추근대는 남자들은 어딜 가도 존재했다. 임원, 과장, 방문객, 카페 아르바이트생…. 다른 빌딩에서 일할 땐 짧게 연애를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헤어지고 나면 차라리 일을 그만두는 편이 나았다. 남자뿐만 아니라 그 남자의 부서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아는 것 같았다. 자기의 섹스 습관까지도. 이번 건물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 계약은 일주일만 남아있었다.

남자는 학창 시절 백화점 가는 게 좋았다. 옷을 좋아해선 아니었다. 가선 에스컬레이터 말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는 어깨너비의 모자를 쓴 안내원이 있었다. 흰 장갑을 끼고, 90도로 배꼽인사를 했다. 상의엔 깃털도 두 개쯤 달려 있었다. 직접적으로 야한 구석이라곤 없었지만, 남자는 백화점 안내원과의 섹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선 발기를 해도 아무도 몰랐다.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서 있으니까. 그러다 문이 열리면 재빨리 뛰쳐나갔다. 친구처럼 스튜어디스나 과외 선생님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남자의 환상은 그와는 좀 다른 곳에 있었다. 친구들은 남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옷이 야해? 답답해 보이기만 하던데.”

취직 후, 남자는 회사 안내 데스크에 관심이 생겼다. 요즘은 백화점에 가도 엘리베이터를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다. 안내 데스크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을 때,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한편 남자는 헷갈렸다. 그 유니폼이 야한 건지, 단정한 유니폼을 벗기고 싶은 건지. 엘리베이터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에 둘만 탄다는 스릴이 좋은 건지, 이 여자가 좋은 건지 고민스러웠다. 사관생도라면 키가 자기보다 작아도 괜찮다던 여자친구가 생각났다. 사관생도가 좋아 방학 때면 근처 여대 도서관 학생증을 빌려 여대생 행세를 했다. 그녀는 결국 결혼까지 성공했다. 남편 제복의 다리미줄이 남자의 팔뚝 힘줄 같다고 했다. 옷을 입은 채 지퍼만 내리고 섹스를 한 적도 있다. 제복만 보면 떨린다고 했다. 벗으면 판타지는 깨졌다. 물론 남편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스튜어디스의 옷이 좋은 순간은, 상의가 짧아 허리가 보일 때가 아니라, 도무지 벗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야. 그게 섹시해.”

스튜어디스를 보러 인천공항까지 거침없이 차를 모는 친구의 지론은 사관생도를 남편으로 둔 친구와 비슷한 지점에 있었다.

“왜 남자들이 피부가 하얀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아? 하얀 피부가 청순해서가 아냐. 정복욕인 거지. 그래서 난 사계절 태닝해. 그냥 솔직하게 섹시한 게 좋다는 애들이 나아.”

여름만 되면 바다로, 야외 수영장으로 떠나는 친구의 논리는 다른 친구들과 정반대였다. 친구는 청순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응큼해 보인다고 말했다. 어차피 벗기고 싶을 거면서. 어쨌든 남자는 안내 데스크의 여자가 좋았다. 그 옷을 입은 채로 섹스하고 싶은 건지, 그 옷을 곱게 싸인 선물포장을 박박 뜯듯 벗기고 싶은 건지는, 침대에서 생각해봐도 늦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침마다 종종 거짓말을 했다.

“직원인데, 출입증을 안 가져와서요.”

“몇 층에 근무하시죠?”

여자는 남자를 알았다. 출입증을 자주 잃어버려 이미 안내 데스크에 신분증이 두 개쯤 보관되어 있었다. 이름, 사는 동네까지도 잘 알았다. 일부러 그러나? 굳이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매번 이름과 층을 새로 물었다. 매뉴얼대로 일해야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남자들이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침마다 마주치는 남자는 꽤 근사해 보였다. 서너 마디쯤 하는 게 전부였지만, 목소리도 좋았다.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뒀다.

“김 대리가 연예인이랑 술 마셨대.”

“이 과장님 여자친구가 레이싱걸이라던대?”

유명인과의 섹스는 어디서든 화제가 된다. ‘유명인’이란 팻말 빼곤 모든 가치가 무의미해지는 순간. 적어도 이 건물에서 여자는 연예인이었다. “저 여잔 내 스타일이 아니야” 같은 말은 통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에베레스트의 아름다움을 모르면서, 일단 에베레스트에 첫 번째로 오르려는 등반가처럼 행동했다.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문서 수발실에서 마주쳤다, 옷 갈아입고 나가는 걸 봤다…. 여자의 일거수 일투족과 가까워지는 일은 자랑거리였다. 왜, 학창 시절 수학여행에서 선생님들이 노래를 하면, 주말 가요프로그램에서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올 때보다 더 재미있지 않나. 아는 사람만 아는 재미. 남자에겐 경쟁자가 많았다.

돌아오는 금요일은 할로윈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누가 더 기발하게 입느냐가 아닌, 누가 더 기발하게 벗느냐를 겨루는 날. 경쟁도 경쟁이지만, 남자는 일단 주말이 더 급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로윈인데, 어디 안 갈래?”

“재미없어, 그런 데.”

“여경, 간호사, 마녀가 재미없다고?”

“진짜 여경, 진짜 간호사, 진짜 마녀가 아니잖아.”

병원에서 간호사가 주사를 놓아주면 발기한다는 친구였다. 그런데 간호사가 싫다고? 여자친구가 생겼나? 어쨌든 주말. 남자는 금요일이면 멋을 부렸다. 포켓스퀘어를 꽂고, 갈색 구두를 신었다. 보수적인 회사였지만, 금요일엔 괜찮았다. 이런 날은 유독 출입증이 없다는 거짓말을 자주 했다. 아침에 본 여자는 오늘도 예뻤다. 여자는 오늘 밤에 무슨 옷을 입을까?

“저 출입증….”

“저 오늘까지 일해요.”

여자의 사적인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알고 있던 목소리와 좀 달랐다. 처음 듣는 문장과 단어였다. 다른 사람 같았다. 남자는 멈칫했다. 어쩐지 균열이 생기는 듯했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남자에게 오늘은 마지막 기회였다. 남자는 퇴근 후 여자를 기다렸다. 휴게실이 어딘진 몰라도, 퇴근시간 정돈 알고 있었다.

“제 이름도 모르잖아요. 전 그쪽 집 주소까지 다 아는데.”

“건물 내에서 통하는 별명은 있어요. 알아요?”

대머리 수학 선생님은 모차르트, 학생주임은 피바다, 바바리코트를 즐겨 입던 도덕 선생님은 가제트…. 무엇보다 여자 교생 선생님은 별명이 세 개쯤 됐다. 그런 맥락에서, 여자는 건물 내에서 별명으로 불렸다. 별명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던 여자는 이제 별명이 없어질 테고, 그 별명을 사랑하던 수많은 남자 중 한 명을 건물 밖에서 만나고 있다. 여자는 다시 이 건물에 올 일이 없었다. 즉, 조심할 이유도, 자신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할로윈인데 어디 안 가요? 전 경찰 옷 사놨는데. 오늘 아니면 언제 이런 옷 입어 봐요?”

남자는 처음으로 오후 6시 이후의 여자의 생활에 대해 들었다. 흥미로울 줄 알았는데…. 그동안엔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 같은 말만 들어도 좋았는데. 안내 데스크에서 여자의 손은 언제나 배꼽 아래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웃는 얼굴로 하나를 물으면 둘을 대답했다. 지금 여자는 다리를 꼬고 있다. 손은 술잔에, 표정은 다양했다. ‘솔’ 정도로 대답하던 목소리는, 조율이 덜 된 피아노처럼 ‘미플랫’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균열은 확신으로 다가왔다. 옷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옷이 섹시한 건지, 그 옷이 벗기고 싶은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가 안내 데스크에 서 있을 때만, 여자는 환상으로서 존재했다.

할로윈에 온갖 리비도가 도시를 잠식해도, 친구에겐 그저 우스꽝스러운 행사일 뿐이란 걸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주사를 놓을 줄 모르는 간호사, 수학을 못하는 수학 과외 선생님은 아무런 성적 매력이 없었다. 이 여자를 다시 만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안내 데스크 여자의 가방엔 아직 옷이 들어 있었다. 제대하는 날, 제대 후 자정까진 군인 신분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여자의, 안내 데스크 요원으로서의 마지막 밤. 여자 얼굴보다 가방에 자꾸 눈길이 갔다. 동시에, 남자는 돌아오는 월요일을 기다렸다. 안내 데스크엔 새로운 여자가 서 있을것이다. 가장 안내 요원 같은 모습으로, 가장 표준에 가까운 모습으로.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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