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와 오키나와

지붕이 열리는 벤틀리 컨티넨탈을 타고 남국의 바닷길을 유유자적하는 이런 기분.



오키나와 국제공항 활주로가 가까워질 때, 비행기가 휘청휘청했다. 내려다보이는 활주로 주변이 다 바다였다. 활주로 바깥에 방파제처럼 두른 둑이 있었는데, 파도가 자꾸만 그걸 때리고 흩어졌다. 작은 공항, 간소한 절차, 습관보다 정중한 일본인의 태도, 느닷없는 야자수…. 여기는 오키나와.

벤틀리는 어디서 어떤 식으로 타느냐가 문제되는 차가 아니다. 벤틀리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모든 일정이 생각보다 훨씬 단순해진다. ‘벤틀리를 탄다’ 혹은 ‘벤틀리를 타고 어디에 간다’는 사실만이 중요해서. 이 문장에는 많은 것이 감춰져 있고, 축약돼 있고, 해석의 여지 또한 열려 있다. 벤틀리 운전석에서는 새삼스럽게 시간과 여유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니까. 차 안에 있는 시간, 이동하는 시간, 누구와 같이 있는 시간. 그리고 한 대의 벤틀리가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데 걸리는 수개월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에서 시승한 벤틀리 컨티넨탈 GTC V8의 보닛 안에는 벤틀리가 새로 만든 4.0리터 8기통 가솔린 엔진이 들어 있다. 이전까지는 6.0리터 W12기통 엔진이었다. 그렇다고 벤틀리가 뭔가 포기했을 거라는 의심은 시작부터 없었다. 그들의 철학은 “We Start Where Others Stop(우리는 다른 이가 멈춘 그곳에서부터 시작한다)”이다. 또한 “No Compromises(절대 타협하지 않는다)”이기도 하다. 8기통 엔진을 시도했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4,000cc 엔진을 선택했다면, 벤틀리라는 이름에 으레 기대하는 수준을 상회하는 결과치를 확보했을 것이 분명하다. 일본 벤틀리 모터스 본사 마케팅 매니저 츠카사 요코쿠라는 이렇게 말했다. “벤틀리는 말하자면 ‘최후의 차’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단 갖고 나면 ‘이 다음은 뭘 사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벤틀리는 그런 차예요.” 벤틀리 컨티넨탈을 갖고 있는 사람이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를 사는 건 말이 된다. 용도와 상황에 따라 지붕이 열리는 벤틀리 컨티넨탈 GTC를 사거나 문이 네 개 있는 플라잉 스퍼를 사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롤스로이스를 산다? 그 선택에는 특별하고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4,000cc 8기통 엔진을 쓰는 벤틀리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벤틀리의 출사표다. W12 기통, 5,998cc 가솔린 엔진을 쓰는 컨티넨탈 GT의 가격은 2억 8천6백만원이다. V8 엔진이 들어 있는 컨티넨탈 GT V8은 2억 3천9백만원이다. 약 4천7백만원 싸다. 요코쿠라가 말을 이었다. “벤틀리가 정의하는 세계적인 럭셔리 자동차 시장의 기준은 2억원 이상입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이고, 아주 작은 시장이기도 하죠. 2011년 기준으로 벤틀리는 3만 9천 대 팔렸습니다. 전체의 약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죠.” 지금까지 팔린 벤틀리 중 65퍼센트는 소위 ‘사장님 차’였다. 직접 운전하기 위해 산 차가 아니라, 기사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기 위한 차라는 뜻이다. 일본, 유럽의 추세와는 좀 다르다. 세계적인 추세와도 궤를 달리하는 시장이 한국이다. 요코쿠라의 말이다. “문이 두 개 있는 쿠페나 컨버터블 시장은 33퍼센트 성장했지만 문이 네 개 있는 세단 시장은 33퍼센트 하락했습니다. 이게 세계적인 추세고, 앞으로 역전될 것 같진 않아요.”

벤틀리의 실내는 정확한 좌우 대칭이다. 심지어 나무에 새겨져 있는 결까지. 8기통 벤틀리에 붙어있는 벤틀리 로고는 빨간색이다. 보닛에도, 휠에도 이 로고가 붙어있다. 배기관도 숫자 8을 연상케 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기존의 12기통 벤틀리보다 여러모로 젊고, 활기차면서 여전히 탁월하게 고급스럽다.

2억원이 넘는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늘었다. 그중 30퍼센트가 벤틀리다. 직접 운전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지붕을 열고 달리기 위해, 온전히 멋을 위해 벤틀리를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시장에 출시된 8기통 벤틀리는 그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시승은 오키나와의 짧은 고속도로, 해안도로와 일반 도로를 경유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코스로서.

벤틀리 GT V8과 GTC V8의 제원은 대동소이하다. 지붕이 열리는 GTC 쪽의 최고속도가 시속 2킬로미터 느리고,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가속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단 0.2초 느리다. 지붕이 접혀 들어가는 구조 때문에 중량이 200킬로그램 정도 더 무거워서 생기는 차이다. GT V8의 최고속도는 시속 303킬로미터,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은 4.8초다. GTC V8의 최고속도는 시속 301킬로미터,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은 5초다. 둘 다, 온몸의 근육이 다 경직되도록 달릴 수 있다는 데는 차이가 없다. 벤틀리 컨티넨탈 GT와 GTC V8의 최고출력은 507마력, 최대토크는 67.3kg.m이다. 이 최대토크가 엔진 회전수 1,700rpm에서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과장을 좀 보태면, ‘좀 밟아볼까?’ 하고 오른발에 힘을 주는 순간 목이 젖혀진다는 뜻이다. 이 토크가 5,000rpm까지 유지된다. ‘폭포수처럼 쏟아진다’는 흔한 말이 오로지 벤틀리만을 위한 관용구였던 것처럼.

오키나와의 고속도로에선 시속 170킬로미터 정도까지 달려볼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서는 시속 60~80킬로미터를 유지했다. 구간에 따라 달리기보다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기도 했다. 휴양시설이 즐비한 남국의 섬에서, 서두를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럴 땐 지붕을 열거나 닫거나, 가속페달을 엔진 회전수 1,500~2,000rpm 사이에서 살짝살짝 놀리면서 ‘그르르르’ 위협하는 고양이과 맹수 같은 소리를 들었다. 별 생각 없이 오디오 시스템과 아이폰을 연결했다가, 바이올린 현이 긴장한 정도까지 짐작하게 만드는 스피커에 놀라기도 하면서.

8기통과 12기통의 차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우열의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명백해졌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린다면, 그 대상은 시간 아닐까? 벤틀리는 비로소 시간을 쟁취한 사람을 위한 차다. 혹은 시간을 선물하는 차이기도 하다. 지구가 몇 개의 판으로 갈라지기 전에 벤틀리가 있었다면, 우리는 이 차를 타고 어디까지 갔을까? 오키나와 해변을 달렸던 것처럼 유유자적. 그러다 돌아오긴 할까? 동승했던 두 명이 모두 잠든 오후 세 시, 벤틀리 GTC V8 운전석에 앉아서 지붕을 열고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본 라디오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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