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나쁜 버릇

2012.12.12GQ

배우가 연기할 때 보이는 습관은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나쁜 것일까?

버릇이란 한 사람을 드러내는 중요한 그 무엇이다. <번지 점프를 하다>의 인우(이병헌)는 세월이 흘러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리고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17년 전 자신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던 태희(이은주)를 잊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태희처럼 새끼손가락을 펼치는 버릇을 지닌 또 다른 사람을 만나 다시 가슴이 설렌다. 그처럼 어떤 버릇은 그 사람의 엉덩이에 난 점, 배에 난 수술 자국처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시각적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배우로 치자면 그런 버릇은 그 배우의 개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그를 통해 캐릭터를 보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배우들의 숫자만큼 서로 다른 버릇들이 있다.

결정적 순간에 호흡을 느슨하게 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일부러 상대의 대사를 엇박자로 받아쳐 웃음을 끌어내는 배우도 있고, 어떤 상황에 처하건 잠시도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배우도 있다. 더 나아가 원빈의 경직된 입 모양이나 송새벽의 느슨한 말투, 그리고 차인표의 분노 3종 세트는 실제로도 그럴 것이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게 그 배우의 실제 습관인지 혹은 ‘쿠세’(나쁜 버릇)인지, 아니면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한 설정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는 없다. 아니, 그걸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버릇이 영화의 정서와 흐름에 어떤 기능을 했는지, 그 효과나 결과가 중요하다. 나쁜 버릇이 좋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어쨌건 배우란 그 효과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배우의 버릇은 배우의 ‘본성’과 ‘설정’으로 나눌 수 있다. 언제나 다혈질일뿐더러 시력이 나빠서 늘 인상을 찡그리고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생겼다는 최민식 미간의 깊은 세로 주름이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면, 매 작품마다 새로운 버릇을 만들어내는 김명민의 철저한 준비성은 인위적인 설정일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파이란>의 ‘강재’ 최민식을 <올드보이>의 ‘대수’로 변화시키면서 제일 먼저 그 다혈질적인 습관과 싸웠다. 최민식은 넘치는 에너지 때문인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배우다. 그가 정의하는 배우란 언제나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다. 김수로나 황정민 같은 배우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시나리오의 “저 멀리 하늘을 쳐다본다”는 지문에도 그들은 늘 콧물을 훔치거나 침을 뱉고 삐딱한 자세로 건들거린다. 하지만 <올드보이>에서 감금방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최민식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말하자면 <올드보이>는 배우의 버릇을 즐거이 활용하면서 그 절제의 쾌감까지 만끽한 영화다.

‘연기의 정석’이라 불리는 김명민은 그런 버릇이 전혀 없는 배우로 유명하다.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그 어떤 영화에서도 일단 ‘인간 최민식’으로 보인다면, 김명민은 정말 하나같이 다 다르다. 지난 1년간 출연한 <페이스 메이커>의 퇴물 마라토너, <연가시>의 고달픈 가장, <간첩>의 남파 22년 차 간첩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으면 내가 연기해야 할 사람의 형체가 그려지고 두 번, 세 번 읽어나가다 보면 말투나 버릇이 생각난다”며, 배우란 버릇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버릇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캐릭터를 위해 없던 쿠세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배우로서 가장 신기하고 재미난 작업이란 얘기다. 유지태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대사를 반복해서 읽다 보면 그 캐릭터만의 특정한 버릇 같은 게 ‘감’으로 온다”고. 그 역시 별다른 버릇이 없는 배우지만 자기만의 버릇을 만들었을 때 비로소 연기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거다.

배우에게 버릇이 문제가 되는 건, 그것이 말 그대로 ‘쿠세’일 때다. 빨리 찍기로 유명한 김기덕 감독은 어지간해서는 같은 장면을 굳이 여러 번 찍지 않는 사람이다. 경제적 요구도 있겠지만 배우의 버릇과 싸우는 그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첫 번째 테이크에서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말은 “두 번, 세 번 더 찍을수록 배우의 숨겨진 버릇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배우의 버릇은 대사로 하는 애드리브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애드리브다. 그런 애드리브를 자신의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어쨌건 애드리브 자체가 영화라는 공동 작업에서의 일탈이자 불확실성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애드리브 자체가 버릇인 배우도 있다. 대표적인 배우가 바로 박철민이다. 표정, 대사, 제스처가 합쳐져 언제나 그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끝내도 될 것을 두세 마디로 이어가며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것. 오랜 사회자 경험과 소극장 연극 무대에서부터 갈고 닦은 실력으로 검증된 버릇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좋은 버릇이건 나쁜 버릇이건 관객의 미감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 버릇이 “저거 봐, 또 저 버릇 나오네”라며 스크린과 관객 사이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지만, 관객들을 향한 애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반대로 원빈 같은 경우 그 딱딱한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입놀림은 누가 봐도 쿠세지만 그 ‘경계’와 ‘애교’라는 구분법 자체를 초월한다. <아저씨>의 원빈이라면 그 쿠세마저 사랑할 수 있다. 우월한 유전자는 버릇마저 우월하다.

한편으로 배우의 버릇이란 결국 배우의 ‘해석’이란 말과 동일하다. 송강호나 김윤석 같은 배우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에게도 버릇이 있는 것 같은 착시효과를 주지만 딱히 뭐라고 집어내긴 힘들다. 워낙 변신의 귀재인데다 캐릭터의 조율이 능수능란한 배우들이라, 그들에게는 버릇이란 것도 결국 배우의 해석 안에 존재한다. 좋은 버릇이건 나쁜 버릇이건 그들에게 버릇이란 캐릭터에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덧칠을 해나가는 것이다. 캐릭터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버릇이 바로 쿠세다. 결국 그것은 예술이 지녀야 할 수많은 덕목 가운데 절제미와의 싸움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배우는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와 하선의 1인 2역을 한 이병헌을 빼면 그런 절제의 미덕을 잘 살려낸 영화다. 어쩌면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할 부분이 바로 거기다.

가령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조 내관을 연기한 장광에 대해 추창민 감독은 “연기에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버릇 같은 게 없어서 조 내관이라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장광은 “배우로서 왜 욕심이 없었겠나. 좀 더 표현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지만, 추창민 감독님이 나를 딱 절제시켰다. 그러지 않았다면 궁을 감싸고 있는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조 내관의 고목같이 묵직한 캐릭터가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이어 <26년>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연기하게 된 그는 새로운 버릇을 익히고 있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는 그 대통령에게는 ‘말하는 중간에 입술을 앙다물고, 말을 시작할 때 아랫니를 보여주는 버릇’이 있으니 그것을 체화시켰다. 또한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단 한순간도 동요하지 않는 남자 류승룡도 절제에 관해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배우다. “워낙 인상이 강해서 뭘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말이 정답이다. 인상파는 굳이 버릇으로 어필할 이유가 없다.

결국 영화에서 버릇이 문제되는 것은 바로 카메라가 자유자재로 구석구석 해부하듯 인물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가까워서 문제다. 원빈의 “웃기지 마”를 연극 무대에서 본다면, 아니 듣는다면 결코 그 정도의 수위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소한 표정과 제스처에 불과한 버릇들이 관객들이 롱쇼트로 바라보는 연극 무대에서 드러나는 일이 있을까. 연극에서는 다소 과장되고 어색하더라도 그게 먹힐 때가 있을지 몰라도, 그런 연극배우보다 영화배우가 자신의 버릇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바로 클로즈업 때문이다. 카메라는 배우의 눈빛, 살 떨림 등을 한순간에 포착한다. 미세한 버릇도 놓치고 가는 법이 없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 연기를 해도 관객들이 쉽사리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버릇들로 인해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 개인이 보이기 시작하면 감정이입의 강도가 센 만큼 이탈의 강도도 세다. <명배우의 연기수업>에서 마이클 케인은 이렇게 말한다. “한 인물이 되고자 한다면 무조건 훔치십시오. 말투나 제스처나 사소한 버릇 등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훔치세요. 다른 배우가 만들어놓은 인물 중에서라도 가능하다면 훔치세요. 단, 최고만 훔치셔야 합니다.” 결국 좋은 버릇과 나쁜 버릇의 차이는 이야기에 봉사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다. 버릇 그 자체로 나쁜 버릇은 없다. 게다가 최고의 버릇만 훔쳐 만들어도 나빠질 수 있는 게 영화다. 최고의 영화배우는 ‘사람이 아니무니다’라는 심정으로 관객들이 그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른손의 버릇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아트 디자이너
    ILLUSTRAION/ KIM SANG MIN
    기타
    글/ 주성철(<씨네21>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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