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대사다

드라마의 밀도는 대사를 통해 견고해진다. 지금 한국 드라마를 대표하는 네 명의 작가는 어떻게 대사를 채웠을까? 시인,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소설가가 본 그들의 대사들.

김수현
김수현은 한국 드라마의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그는 드라마를 빚는 명인이요, 거장이다. <사랑과 진실> <청춘의 덫>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내 남자의 여자> <부모님 전상서>…. 이런 목록들을 뺀다면 한국 드라마 역사는 빈곤할 것이다. 한때 김수현 드라마가 나올 때 서울시의 수도 사용량이 격감한다고 했다. 다들 일손을 놓고 드라마를 보기 때문이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진부한 일상에 대한 찬란한 모반이요, 덧없는 시간에 대한 승리다. 대중은 왜 김수현표 드라마에 열광하나?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 재미는 대사에서 나온다. 드라마에서 서사가 식물의 줄기라면 대사는 꽃이다.

좋은 작가는 좋은 대사를 쓰고, 나쁜 작가는 나쁜 대사를 쓴다. 김수현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희곡작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대사를 쓴다. 그는 대사를 만드는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났다. 특히 그가 쓰는 대사는 굉장한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누군가는 김수현의 대사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말을 그대로 옮기는 건 오히려 ‘리얼리티’가 죽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잊고 있거나 놓칠 수 있는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 작가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현실성이다. 그래서 김수현의 대사는 입말의 절정이다. 함축적인 시의 언어처럼 은유와 직유를 오가며 본질을 꿰뚫는다.

다른 작가들은 대사를 작중인물의 감정과 그가 처한 여러 정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지만 김수현에게 대본은 천재 작곡가의 악보다. 그는 대사를 통해 드라마라는 교향곡을 완성한다. 배우는 그 악보에 따라 감정과 서사를 연주하는 연주자다. 마치 그는 대사에 음악의 삼대 요소인 리듬, 멜로디, 화성을 다 쓰는 것 같다. 어느 드라마였던가. 남녀가 대사를 치는데, 대사가 의도적으로 바뀌어 나왔다. 남자가 여자의 속마음을 말하고, 여자는 남자의 속마음을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속마음을 제 혀로 발음하며 제 속을 드러내고, 여자는 남자의 속마음을 제 혀로 발음하며 제 속을 드러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교묘한 방식으로 두 인물의 혀에 올린 상대의 마음이 리듬과 화성을 타며 완벽한 앙상블을 만들며 춤을 추었다. 말과 감정은 차츰 고조되고 절정을 향해 솟구쳤다. 그 말의 절정과 드라마의 절정이 정확하게 하나를 이루었을 때 완벽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김수현은 말이 빚는 황홀경을 느끼게 하는 언어의 마술사다.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노희경
1.8퍼센트의 <빠담빠담>, 6.1퍼센트의 <그들이 사는 세상>. 저조한 시청률은 흥미롭지만 놀랍진 않다. 개인적인 최고작 <바보같은 사랑>의 1회도 1.9퍼센트 였으니까. 현실은 주변이다. 주류는 늘 소수니까. 노희경 드라마에선 그 주변이 중심이 된다. 당연히 중심은 주변으로 희석된다.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 오히려 인사이더 역할을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인물들은 밑바닥을 살아가며 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살아남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친다. 따라서 그들의 목소리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언어는 부박한 삶을 향해 곧게 날아가는 돌직구다. 노희경의 세상에서 괴로움과 고통은 사랑과 삼위일체를 이룬다. 주인공들이 온몸을 내던지고 죽음에 이르도록 세상과 싸워도 사랑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절멸의 순간, 인물들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그래도 사랑은 다시 오는 거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눈물을 펑펑 쏟을 이별에도 노희경의 주인공들은 오열하지 않는다. 대신 삶에 관한 느리고 담담한 관조의 읊조림을 더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연인을 두고 다음 생의 그의 안녕과 희망을 바라는 서간체에 가까운 독백을 쓰는 드라마 작가는 흔치 않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 재호를 보내는 신형의 대사는 이렇다. “아침 10시가 넘었다. 재호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재호를 깨우지 않겠다. 다시 그가 눈뜨는 세상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희경 작가는 “사랑의 시점은 현재인데 드라마에서만 왜 사랑이 영원하다고 우기는가”라고 말했다. 자신을 지나쳐 수많은 세상의 고통을 겪은 후 상처투성이로 돌아오는 연인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보듬어줄 때, 오늘의 사랑은 다시 점화된다고 그는 역설한다.

유곽에서도 공단에서도 방송국에서도 담벼락에 피는 들꽃처럼 사랑은 솟아난다. 마지막에 그들의 운명이 슬프리라는 건 시청자도 주인공들도 알고 있지만, 그 어려운 고백마저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을 알기에 주인공은 작은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뗀다.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을 견뎌내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일상의 무게를 넘어서야 겨우 사랑은 전해진다고 고스란하게 이야기하는 노희경이 써낼 신작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김수경(시나리오 작가)

김은숙
<제비 몰러 나간다>는 김은숙 작가가 데뷔 전에 쓴 시나리오다. 2000년 벽두에 우연히 받은 이 시나리오는 그야말로, 물건이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데뷔작인 <태양의 남쪽>이 2003년 방영이었으니, 열혈 신인의 성김과 얽음이 한창 거칠 무렵이었지만 그녀의 시나리오는 재미있었다. 이유는 대사 때문이다. 단문 형식인데, 요소요소가 감각적이었다. 그런 감각적인 대사를 관통하는 한 가지는 어떤 것일까? <파리의 연인>에서 “우리 애기 놀랜 거 안 보여요? 애기야 가자!”라든지, <시크릿 가든>에서 “길라임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작년부터?”는 어떤가? 작년 <신사의 품격>에서 “내 생각에 넌 누군가의 끝나지 않은 첫사랑인 것 같아서”는…. 오글거리는가?

김은숙 작가는 <온 에어>에서 서영은을 통해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오승아 씨는 내 드라마에서 그것밖에 안 보였나 봐요?” 그녀의 대사는 리듬과 호흡이 핵이다. 그 박자가 흥겹다. 게다가 소통을 위한 용기를 더해 정확히 표현할 줄 아는 것, 그것이 그녀의 재능이다. 그녀의 대사는 시청자들의 귀에 착착 감기는 아밀라아제다. 누군들 달콤한 애무를 마다하겠는가? 그때의 낯간지러움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도 노력하며 살기도 한다. 그도 분명 이런 대사가 어떤 대중에겐 불편할 정도로 낯뜨겁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한데, 배우가 매력적으로 표현할 것이라 믿고, 연출자의 능력을 신뢰하며 과감하게 표현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대단한 용기다. 기본적으로 배우의 연기를 알고, 연출자의 호흡을 연구한 것 같다. 더불어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중성적이면서도 솔직한 여자 주인공의 대사는 작가 본인이나 동경하는 캐릭터가 투영되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자연스러운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김수현 작가의 리듬이 만연체로서, 설명이 많고 단어 하나하나의 은유가 많아 문학적이라면, 김은숙 작가의 대사는 영상으로 재현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미학이 있다. 그래서 좀 오글거린다 해도, 그런 달달한 걸 한 방 제대로 칠 줄 아는 그의 대사가 좋다. 누군가의 안에서 살기도 하고, 작년부터는 확실히 예뻤고, 한 남자의 애기가 되고 싶은 것. 이것을 마다할 여자 있을까? 그래도 버틴다면 이 대사를 들려주고 싶다. “너 바보야? 왜 말을 못해? 저 작가가 내 작가다!! 저 대사가 내 대사다, 왜 말을 못하냐고!!” 한지승(영화감독)

박경수
그동안 우리가 흔히 보아온 드라마의 대사들은 <파리의 연인>처럼 달달하거나, <내 남자의 여자>처럼 맵거나, <거짓말>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절절하거나, 아니면 <보석비빔밥>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황당함을 보여주거나, <아내의 유혹>처럼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점 하나 찍는 의미밖에 없었다.

그러다 2012년에 우리는 남자 작가 박경수의 드라마 <추적자>를 만난다. 여기서 굳이 남자를 붙이는 까닭은 그의 대사들에서 배어나오는 강한 남성성 때문이다. 그의 대사는 할 말만 전달하고 입을 다무는 무거운 남성세계의 언어들이다. 대사의 길이에 상관없이 딱 정해진 만큼, 딱 보여줄 만큼, 시청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만 보여주는 것이 박경수의 방식이다.

그렇다고 대사들이 심심하거나 고리타분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건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추적자>의 대사들은 한 방의 펀치처럼 종종 우리를 후려갈긴다. “(강동윤의 대사) 사람이 그렇죠. 모두들 그럴듯하게 말합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하다. 법과 정의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되어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30억이면 친구의 딸을 죽이고 총리 자리를 준다면 평생을 지켜온 신념도 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들 말을 합니다. 난 어쩔 수 없었다고….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많은 것이 쉬워지지요.”

드라마 <추적자>는 사실 링 위의 빅매치와 비슷하다. 입술이 터지고 눈가에 피가 흐르지만 권투는 무조건 치고 받는 싸움이 아니다. 권투는 남자의 싸움을 기본으로 사각의 링 안에서 펼치는 한 편의 역동적인 승부다. 드라마 <추적자> 역시 대통령에 오르려는 야망에 찬 차가운 남자와 억울하게 죽은 딸을 위해 복수하려는 따뜻한 남자가 벌이는 한 편의 권투 경기다. 그리고 작가 박경수는 그 승부사들에게 강력한 펀치를 날릴 수 있는 대사들을 실어주었다. 그게 역동적인 16라운드 빅매치 드라마를 보여주었던 작가 박경수의 힘이다. “(백홍석의 대사)

내 옆에는 사람들이 있어. 물론 네 옆에도 사람들이 있겠지. 총리 자리면 신념도 버리는 대법관도 있고, 돈이면 뭐든지 하는 사람들…. 있겠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 법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검사,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형부와 맞서는 기자, 사고를 당하고 자기 목숨이 위험한데도 나를 걱정해주는 형사. 강동윤, 이게 사람이다. 이게… 내가 아는 사람이다.” 박진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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