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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다이닝 식탁에 펼쳐진 갖가지 고난들

2013.03.08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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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파인 다이닝은 정말 안 되나? 그렇다. ‘파인 다이닝=서양요리’라고 울타리를 좁히고 되묻자. 한국에서 파인 다이닝은 ‘어떻게’ 안되나? 음식은 좋은데 팔리지 않는가, 아니면 음식이 안 좋은데 팔리지도 않는가? 두 상황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전자에는 희망이 있지만 후자에는 없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은 후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양식 파인 다이닝은 우리의 문화가 아니다. 따라서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둔감하고 태만하다. 먹는 쪽 만드는 쪽 구분도 없다. 둔감과 태만이 무지를 낳고, 일부러 알려 들지도 않는다.

그 차이라는 게 엄청나게 대단하지도 않다. 비단 미슐랭 레스토랑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닌, 서양 음식 자체의 특성이다. 일단 쫄깃함과 담백함의 자리가 없다. 우리가 쳐주는 ‘씹는 맛’은 서양 음식에서 악재다. 모든 건 버터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담백함? 우리는 북엇국부터 단팥빵, 심지어는 햄에마저 담백함을 붙여대니 실체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만일 그게 ‘짜지 않음’을 묘사한다면 서양 음식에선 기대하면 안 된다. 지방으로 깐 멍석 위에 올린 단백질의 짠맛과 탄수화물의 단맛이 서양 음식 맛의 기본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마미(감칠맛)’ 덕분에 간장의 입지가 넓어지기는 해도 서양 음식의 간은 여전히 소금 위주다. 간을 약하게 하면 단백질의 맛이 살아나지 않으므로 짠맛이 적당히 두드러져야 한다. 또한 우리 음식의 간을 책임지는 장류는 발효에서 얻는 특수한 맛 때문에 느끼는 것보다 염도가 높을 수 있으니 짠맛의 단순 비교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쓰레기 종량제 봉투 비유 사건’이 발생한다. 자칭 저염식 애호가인 한 블로거의 사연이다. 프렌치를 프렌치답게 내는 레스토랑에서 소금간 안 한 스테이크를 요구했는데,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아 ‘내 입이 쓰레기 종량제 봉투거니’ 생각하고 넣었다는 것이다. 프렌치를 포함한 양식이 점점 가벼워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파인 다이닝의 핵심은 행복 또는 쾌락이다. 매일 먹을리 없으니 허리띠며 혈압 걱정 없이 즐기기 위한 자리다. 요리의 본질이 이뤄줄 수 없는 요구를 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파인 다이닝이 안 되는 데는 손님의 책임이 더 무겁다고 생각한다. 둔감하고 태만하고 무지하니 결국 배타적이다. 피자나 파스타 등에는 고민 없이 지갑을 열지만 전채와 주요리, 디저트로 격식을 차리는 코스 형식의 파인 다이닝에는 인색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재료에 극단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우리의 외식 문화다. 파인 다이닝의 경쟁 상대는 어지러운 마블링의 한우 꽃등심이나, 수족관에서 접시로 순간 이동하는 활어회다. 한정된 예산을 재료에 몰아주니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의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질보다 양’을 향한 집착이다. 토마스 켈러가 ‘수확 체감의 법칙’을 언급하듯, ‘테이스팅 코스’는 그야말로 다양한 음식을 맛보기 위한 코스다. 배가 지나치게 부르지 않아야 맞는 건데 그게 불만이다. ‘양이 적어 실망이었다’는 평가가 진짜로 블로그에 올라온다.

한편 여전히 ‘먹고 죽자’인 술문화도 한몫 거든다. 그게 재료 위주의 외식문화와 결합하니 참숯불에 한우 꽃등심을 구워도 술은 여전히 3천원짜리 희석식 소주다. 이렇게 술은 싸도 된다는 생각이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의 부재로 나타난다. 맛은 물론 식사의 속도를 비롯한 분위기 조정 역할까지, 와인은 파인 다이닝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다. 따라서 예산을 짤 때 감안해야 한다. 코스만 먹을 경우 맛은 완성되지 않는다. 와인의 부재는 가뭄에 콩 나듯 제대로 된 요리를 내는 레스토랑도 ‘안 되게’ 만든다. 요리만 팔아서는 재료비, 임대료, 인건비 등의 부대비용을 감안할 때 현상 유지가 어려운 수익구조이기 때문이다. 결국 와인으로 이득을 내야 꽃등심이나 활어회 등과의 경쟁에서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한 테이블당 한 손님만 받는, 즉 ‘1회전’만 하는 주말 저녁 4인용 식탁이 맹물에 파스타만 먹는 커플로 가득 차 있다면 생계형 레스토랑은 살아남을 수 없다. 홍대 앞 < 라꼼마 >의 운명이 그러했다.

물론 만드는 측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검증 안 된 ‘스타셰프’다. CIA(미국)니 ICIF(이탈리아), 르코르동 블루(프랑스) 등을 거친 ‘유학파’ 셰프들이 차리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덮어놓고 파인 다이닝을 구원할 십자군 취급할 수는 없다. 전쟁에 이기려면 일단 무장이 잘되었는지 검증해봐야 한다. 셰프에게 무장은 곧 경험이다. 불어로 ‘우두머리chief’인 셰프가 되려면 일정 기간 이상의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학교의 문을 나서야 시작된다. 조리학교가 집약적인 교육을 제공하지만 주방은 여전히 도제적이며 수직적이다. 양파를 까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불 앞에 설 수 있고, 한 접시에 자신의 철학을 담아야 주방을 지휘할 수 있다. 개인별, 능력별로 차이가 있지만 3, 4년 정도로 레스토랑을 차릴 만큼 실력을 쌓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 젊은 셰프가 있다. 30대 중반에 귀국해 자기 레스토랑을 열었다. 거쳐온 레스토랑 목록도 현수막으로 내걸었다. 역산을 해보자. 4년제 대학과 군복무를 마치고 바다를 건넜다면 20대 후반이다. 조리학교의 프로그램은 대략 2년 남짓이다. 진짜 경험을 쌓은 기간이 나온다. 흔히 ‘스타쥬stage’라고 말하는 실습은 짧게는 단 며칠도 가능하다. 목록에 넣은 레스토랑의 이름값만큼 경험을 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서른 이전에도 자기 주방을 꾸려나가는 셰프는 많다. 다만 일찍 시작해 경험의 깊이가 다르다. ‘알리니아’의 그랜트 아케츠 셰프는 부모의 식당에서 10대 시절부터 일했다. 그의 스승 토마스 켈러도 매니저였던 어머니 덕분에 접시닦이로 주방에 발을 들였다. 게다가 우리 음식이 아니라면 배움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 있다는 것 또한 감안해야 한다. 서양인이 한식을 동경한답시고 고작 3~4년 배워 한식당을 열었다면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믿음을 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평가의 문제다. 정보는 넘치지만 알고 내리는 평가가 너무 드물다. 설문조사에 기초한 < 자갓 >이나 < 블루리본 가이드 >의 평가 또한 권위를 주기 어렵다. 그 주체가 결국 앞에서 언급한 소비자층이기 때문이다. 매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고 권위 일간지의 담당 기자가 < 뉴욕타임스 >의 비평 문화를 선망하면서 하루에 파스타 예닐곱 그릇 먹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탈리아에 연수까지 갔다 온 전문 기자라면 맛집을 가리기 위해 초인처럼 파스타를 먹을 게 아니라, 그게 이탈리아 요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하루에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으면 절대 맛을 평가할 수 없다. 바로 그 < 뉴욕타임스 > 출신 음식 평론가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떡장수 둘이 장에서 만났다. 벌이가 시원치 않자 동전 한 닢으로 서로의 떡을 사먹었다. 둘 다 떡을 ‘완판’했지만 남은 건 바로 그 동전 한 닢뿐이었다. 한국 파인 다이닝의 현실이 그렇다. 똑같이 모르는 상태에서 만들고 먹고 평가하니 레스토랑도 늘고 호평도 많은데 내실은 없다. ‘질보다 양’에 가치를 둔다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안 된다’가 정답이다.

    에디터
    글/ 이용재(음식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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