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연기 잘 보고 있습니다.

2013.03.28GQ

일주일 동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몇 편일까? 또한 몇 명의 배우가 몇 개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을까? 누구보다 드라마를 눈여겨본 8인이 가장 눈에 띄는 배우의 연기를 뽑았다.

유동근, 천호진 공자는 쉰이면 지천명이라 했건만, 50대 배우는 귀하다. 설 자리가 별로 없다. 종편에서 불가능이라던 ‘10퍼센트’를 돌파한 <무자식 상팔자>와 47.6퍼센트의 시청률로 종방한 드라마 <내 딸 서영이>, 두 편 모두 아버지 역의 50대 배우가 있다. 유동근과 천호진이다. 25년 전 영화 <지금은 양지>를 함께 했던 둘의 아버지 연기는 특별하다. <용의 눈물>의 태종, <파천무>의 세조를 분한 서릿발 같던 유동근은 이제 <무자식 상팔자>의 부드럽고 유약한 아버지다. 독재자 아버지, 완벽주의자 아내, 미혼모 장녀 사이에서 그는 늘 눈물짓고 가슴을 부여잡는다. 고혈압과 당뇨에 주눅 든 남자지만 인격자의 면모를 은은하게 쉼 없이 드러낸다. 유동근의 특기였던 결기어린 눈빛과 추상 같은 고함 대신, 미간을 모으며 가만가만 가족을 설득하는 그에게서 전혀 다른 연기의 농도와 완급조절을 발견한다. <비열한 거리>의 황 회장, <부당거래>의 장 국장으로 충무로 느와르의 오랜 버팀목이었던 천호진은 <내 딸 서영이>의 죄 많은 아버지로 귀환했다. 도박과 빚더미로 자식을 지옥에 몰아넣은 아버지에게 국민 절반이 열광한 이유는 소현경 작가의 탁월한 캐릭터 구축과, 천호진의 건조함과 애잔함을 오가는 정교한 연기가 만난 덕택이다. 40회, 포장마차 장면에서 자기멸시와 슬픔을 오가는 천호진의 고백과 표정 연기는 막장드라마에 근접했던 설정을 속 깊은 가족사로 녹여냈다. 모두가 연기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연기는 비범해야 한다. 그들의 연기는 그래서 뜻깊다. – 김수경(시나리오 작가)

박원숙 그녀는 <별은 내 가슴에>에서 최진실이 연기한 여주인공 연이를 괴롭히는 악녀 송 여사 역을 맡아 당시 많은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아니, 악역인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기를 얻는다고? 그게 바로 <별은 내 가슴에서>에서 천박한 디자이너였던 송 여사의 캐릭터를 재창조해낸 박원숙의 힘이었다. 박원숙은 시청자들이 미워할 수 없는 악녀를 만드는 능력이 있다. 박원숙이 만들어낸 해학 넘치는 악녀들은 꼭 <심청전>의 뺑덕 어멈 같고, <흥부전>의 놀부 마누라 같다. 현재 박원숙이 연기하는 <백년의 유산>의 악독한 시어머니이자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속물인 방 회장 역시 그러하다. 박원숙은 무시무시한 시어머니로 분해 시청자들의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들다가 순식간에 슬랩스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처럼 돌변해 시청자들의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는다. 상황이 이러하니 박원숙의 ‘원숙미’ 넘치는 뛰어난 악녀 연기력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 박진규(소설가)

유준상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방귀남은 여자들의 판타지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늘 방귀남이란 캐릭터의 환상성 대신 유준상이란 배우의 항상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전자는 후자의 반사체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영입된 남녀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은 사랑(혹은 연애)의 영속성을 포기해야만 생활의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유준상의 연기는 그 둘이 어떤 균형을 이루며 공존,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일깨운다. 무섭고 불편한 제3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지켜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 일말의 믿음이 (특히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보호받고 있다는 기분을 안겨줬던 게 아닌가 싶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이 실제로 그러한지도 논외다. 다만 그의 연기가 그의 성정을 투명하게 비춰낸 느낌은 들었다. 그는 드라마의 영역에서 드물게 캐릭터 뒤에 있는 배우의 개성을 의식케 하는 배우다. 드라마가 방송되던 시기에 개봉했던 <다른나라에서>의 구조대원처럼 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유준상. “아 윌 프로텍트 유”를 외치는 유준상. 그런 유준상이 방귀남 속에 있었던 것 같다. – 이후경(<씨네21>기자)

박신혜 드라마는 딴 짓을 하면서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우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또한 목소리 안에 캐릭터를 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연기는 순식간의 ‘오버’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내면연기 운운하며 목소리에서 캐릭터를 지우기는 어렵다. 박신혜의 목소리는 그런 중심이 잡혀 있다. 목소리의 톤 자체가 높지 않고, 그보다 목소리의 결이 어떻게 흔들려야 하는지, 때론 어떻게 단단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건 연기에 ‘몰입’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호흡과 발성, 발음이 모두 안정적이어야 한다. <이웃집 꽃미남> 최종회, 고독미(박신혜)가 깨금이(윤시후)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매끄럽다. 딱 한 대사, “사랑해요”에서만 오돌토돌하게 거친데, 그 결이 참 예쁘다. 덕분에 청춘 드라마가 목표하는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킨다. 시청자가 남녀 캐릭터의 사랑을 믿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상대방이 자신이었으면 하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 그래서 <7번방의 비밀>에서“정의의 이름으로 아빠를 용서합니다”라는 박신혜의 대사는 유난히 빛났다. 여배우가 기근이라지만, 박신혜는 촉촉하다. – 에디터/ 양승철

많은 배우 현빈은 그간의 히트작도 많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연기 방식이 있다. 이른바 힘 빼고 하는 연기. 해병대 갔다 와서 시청자들에게 더욱 올곧은 배우 이미지가 있어, 드라마를 다시 시작한다면 오래오래 사랑받을 것 같다. 원빈은 희소가치가 있는 배우다. 다작을 안 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고, 가끔 출연하는 <아저씨> 같은 영화가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도 쌓고 있다. 이민호는 중화권과 일본에서 두루두루 인기 있는 가장 젊은 한류 남자 배우다. 이병헌은 이제 세계적인 배우다. 덕분에 국내 드라마에선 보기 힘들어졌지만, 작품이 좋고, 출연료가 맞으면 할 것도 같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이 해보고 싶은 배우다. 연기력이야 말해 뭐 하랴,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배우이기도 하다. 수지는 여배우 기근에 단비 같다. 여러모로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참 예쁜 배우다. 게다가 체구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대형 멜로에도 도전할 수 있는 재목이다. 송혜교는 나이를 먹지 않는 배우다. 10년 전 <올인> 때의 매력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고, 성실함을 바탕으로 월드스타로 발돋움하고 있다. 문채원은 한마디로 뜨는 별이다. 작품 운도 있고, 앞으로도 크게 실수하지 않는 이상 제 몫을 충분히 해나가면서 성장할 것 같다. 문근영은 연기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진짜 배우다. 마음씨와 생각도 참 착하다. 그 태도만큼 좋은 작품을 만나길 바란다. 수애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연기로 처음부터 멜로의 헤로인이 되었다. 요즘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 장태유(SBS 드라마 PD)

조인성과 김태우 이름 석 자에 한 장면이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 조인성이 그렇다. 스스로 <발리에서 생긴 일>을 뛰어넘으려면 주먹 넣고 우는 대신 발이라도 넣어야 하나, 고민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 조인성은 <그 겨울 바람이 분다>로 한 장면이 아니라 스펙트럼이 보이는 배우가 되었다. 그것도 클로즈업의 지옥이라는 이 드라마에서 보여주고 있다. 눈코입뿐만 아니라 상하악 교합강도의 강약까지 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이 아니라 온몸이 그렇다. 무철(김태우)에게 농구장에서 맞고 뒹굴다 애원하는 장면은 시청자의 턱과 갈비뼈가 욱신거리게 만드는 정도였고, 입 안에서 쇠비린내 같은 피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김태우는 한 장면이 떠오르는 배우는 아니다. 우유부단하거나 바보처럼 착하거나 욕정에 넘치거나 비정하거나,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오영(송혜교)과 오수(조인성)보다 무철을 볼 때 가슴이 더 뛴다. 악역이 공감을 얻어 시청자의 감정이입이 시작되면 드라마는 농밀해진다. 역할은 카리스마를 얻고 배우는 날개를 단다. 그렇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악역은 드물다. 작가가 작정하고 만들었다 해도 악역 연기의 ‘쿠세’가 있는 배우는 연기를 하기도 전에 전형적인 인물이 되고 만다. 김태우는 반대다. 그래서 더 무섭다. – 조경아(칼럼니스트)

임예진과 민지영 임예진이 저런 배우였나? <무자식상팔자>가 방송될 때마다 그 질문을 반복했다. 새침한 깍쟁이에 어쩐지 나이 든 아역 같았던 (계속 그럴 것 같던) 이미지를 통째로 들어낸 임예진은 까칠하고, 매마르고, 구두쇠에다, 욕심은 욕심대로 많고, 얼굴에 항상 얇은 짜증을 품고 있는 중년 여자를 거의 완벽하게 연기했다. 완벽이라는 말은 그저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중년 여자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동서지간, 형님인 이지애(김해숙)와 식탁에서 대화하면서, 따뜻한 눈으로 “형님 많이 힘드셨겠네요” 하고 난 뒤 곧장 생각났다는 듯 데데한 소리로 “저희 된장 떨어졌어요 형님” 하는 임예진은 생전 처음 보는 임예진이다. 가히 중견 배우의 혁신이다. 한편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 2>의 민지영은 어느새 잊힌 말 ‘컬트’를 다시 불러내서라도 그 기이한 존재감을 추켜세우고 싶다. ‘불륜’이라는 이미지를 독창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까지 어쩌면 민지영은 더욱 밀어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자식 상팔자>에 카메오로 출연한 것 같은 가벼운 유머도 섞어가면서. – 에디터/ 장우철

박용우 <나비부인>에서 박용우를 보면 새삼 새롭게 등장한 배우 같다. 그가 나오는 브라운관이 제법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건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영화만 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와 영화 <파파>를 같이 했던 입장에서 보면 비로소 대중에게 박용우의 진면목이 제대로 보여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영화에서 연기를 할 때도 항상 리듬이 좋았다. 상대 배우와의 호흡, 앙상블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고아라의 연기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스크린이 비어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항상 그가 있으면 앵글은 꽉 차 보였다. 그건 박용우란 배우의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박용우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게와 진중함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건 뉘앙스가 종합적으로 모여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박용우는 진중한 분위기의 총합을 지니고 있다. 그가 나이가 들면서 생긴 가장 큰 특징이다. 이제 대중은 박용우의 그 무게를 신뢰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얼굴도 중요한 요소인데, 사실 그는 잘생긴 편이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지만 분명 그렇다. 그 얼굴이 빛을 발휘할 수 있는 배역을 <나비부인>에서 맡았다. 얼굴에 맡는 배역을 맡는 것, 그것도 실력이다. – 한지승(영화감독)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Lee Jae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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