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참을 수 없어

2013.03.28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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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어
매달 마감이 늦는다. 창간 이래 지금까지의 고질이다. 휴일이 많건 적건, 출장이 있건 없건 꼭 그만큼 마감이 늦는다. 그래서 늘 생각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어떤 습관은 천성과 같아서 누가 누구를 달라지게 할 순 없어. 어떤 개인적 성장, 사회적 단계라도 습관의 체계 안에선 꼼짝 못하는 거야…. 이건 21세기에 흡수될 만한 행동과학이라기보단 좀 남루한 고뇌이긴 하다.

그러나 나에겐 이 모든 것이 정신적인, 문화적인, 통속적인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하늘하늘한 옷에 대한 염증, 양반다리를 해야 하는 좌식 식당 알레르기, 큰 목소리에 대한 공포, 트위터에 올리는 140자 중 최소 한 번 말줄임표를 포함해야 하는 강박은 논외로 친다 해도…. 전에는 내가 화를 안 내는 게 인품이 훌륭해서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화내는 방법을 몰라서였다. 황금 온천수보다 화가 솟구치는 순간에도 화를 표현할 줄 몰라 오중추돌 사고를 냈다. 터틀넥 셔츠를 겹겹이 껴입은 채 만원버스에 탔는데 아스팔트를 다 둘러엎고 싶은 교통체증에 걸려도 그보단 덜 갑갑할 테다. 그냥 욕으로 범벅된 금치산 단어들로 부글부글 가글을 하다가, 황황스레 내 머릿속의 골방으로 들어가선 어수선한 머리로 1인칭 회고록을 쓰는 것이다.

… 행동은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야. 그런데 행동이 습관화되는 건 반복 때문이야. 반복을 통해 얻은 나쁜 습관을 못 고치는 건 마음이 그걸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야. 좋은 습관을 다시 갖추려면 역시 고통스러운 반복이 필요한데, 니코틴이나 알코올이나 마감 지연은 우주보다 힘이 세지. 어떤 행동 양식은 사회 규칙을 지킴으로써 생겨. 근데 인사를 할 때 손을 흔들거나, 같은 색 양말을 두 짝 신어야 한다는 건 유아 때 다 배웠잖아. 처음부터 갖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관습으로서. 안전벨트도 지금은 안 매는 사람이 드문 건, 악기를 배우는 데 몇 시간이나 투자하는 것과 똑같은 양상이야. 벨트 채우는 법쯤 누가 모른다고….

이쯤 모노드라마를 쓰다 보면 환멸을 못 이겨 폭식하거나 구토하고 말 것 같다. 두 가지 반응 다 구식인 건 이미 알지만서도. 동시에, 인간은 완전하지 않으며 에디터들 또한 나처럼 죄 많은 인간이라는 동정심이 몇십 갤런 살포된다. 용서만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는 힌두식 경구나, 최후까지 악인은 없다는 영화 대사나, 죽음으로 씻지 못할 죄는 없다는 성인의 말씀, 다 필요없다. 나는 딱 15분이면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용서도, 고기 좀 먹어본 놈 같아서 한 번 맛들이기가 잘못이었다. 감정을 관장하는 신경계가 마비됐거나, 또는 무식하거나, 아예 화가 나지 않거나, 혹시 부처가 된 게 분명해…. 별의별 풀 뜯는 생각이 서산에 아롱질 때, 그게 정당하게 분노할 줄 모르는 자의 비겁한 자책이며 어설픈 방어란 건 풍뎅이도 알 것이다.

그래서 이제 치사한 동정심은 버리기로 했다. 타이밍 놓친 분노의 시체를 붙잡고 울지 않도록. 신념 위에 한 달의 광대한 여정으로 나아가는 멋진 편집장들의 신전에 합류할 수 있도록.

 

머리카락은 말한다
언젠가 머리를 노랗게 탈색했다가 여럿 기절시키곤 하루 만에 까맣게 돌려놓은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선 어떤 질리는 냄새가 났다. 그 옛날 할머니의 파우더 냄새 혹은 외삼촌의 포마드 냄새를 닮은.

어수룩한 삼수생 같던 이십 대엔 <위대한 개츠비>, 로버트 레드포드의 금발이 멋진 줄 알았다. 금색. 부와 글래머로 통하는 가짜 꿀 색깔. 이젠 염색하게 된다면 (나이 든 남자 간부가 동시에 떠오르는) 회색이 좋다. 내 맘 어딘가엔 보이지 않는 칙칙한 희망이 자리 잡고 있어서. 상냥한 헤어 디자이너는 내가 지갑을 열건 말건, 어떨까 싶어 심박수가 1분마다 올라가건 말건 왜 하필 회색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때, 온통 갈치빛인 친구의 머리카락은 절간처럼 고요하고 모래처럼 반짝거리더란 말을 해줘야지. 염색 과정에 혹시 두피가 작살난다면, 음, 회색 가발도 나쁘지 않다. 어울리면 내 진짜 머리가 되는 거고, 아니라면 장기이식 거부반응처럼 면역력 엉망진창인 털을 머리에 얹는 거겠지.

머리카락은 자의식을 준다. 꾹 눌러 담고 있어도 매번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 염색한 머리는 말한다. 나이 드는 물리적 징조에 저항하는 거라고. 염색 안 한 머리도 말한다. 자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고. 놀랍게도 사람들은 다른 이의 나이를 멀리서도 구분한다. 정교한 염색도 수천 년 진화된 통찰을 피할 수 없다. 뇌가 주관하는 다윈의 법칙은 자세, 몸집, 머리 색깔 같은 요소를 빛의 속도로 판단해 친구가 될지 적대적일지 측정하니까. 뭐, 특정한 나이에 인위적으로 어둡게 만든 색이 오싹할 때는 있다. 어쩜 염색 과정은 젊음과 노화의 굴레 속에서 지구 온난화와 에어컨의 관계처럼 악순환될 뿐이다.

사람들은 보통 미덕과 수양으로 나이 듦의 증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어떤 평정심으로도 머리카락이 나게 할 순 없다. 회색 머리를 거부하는 건 노화의 급박함과 싸우는 것. 하지만 언젠가 그 둘 다와 화평해야 할 날이 오리라.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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