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이름으로

소설은 내내 상처와 희생의 자리가 왜 아버지들에게는 가면 안 되느냐고 소리 높인다. 모욕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모두가 ‘피해자 되기’에 열심인 상황이, 드디어 베이비부머 세대인 아버지들의 ‘피해자 되기’로 완성되는 걸까.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은 박범신은 40번째 장편 소설 <소금>을 통해 “이 땅의 아버지들을 대변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 흔히 ‘꼰대’라고 불리는 현실을 떠올리면, <소금>은 꼰대의 자리로 밀려난 아버지들을 아버지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그 뜻과 의도에 맞겠다. 그런데 소설보다 더 화제가 된 이 구절을 보면 조짐이 그리 좋지 못하다.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 게 우리네 풍경이었다.” 가상의 세대 전쟁이든 변형된 된장녀 소란이든, 근거 없는 적의의 상징물이 된 커피에 대한 해명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설을 문제 삼아 소설 밖 작가를 소환하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경계해야 할 태도다. 이 구절은 소설 화자인 서른 아홉 살의 시인이자 이혼남 ‘나’가 드러내는 생각이다. 그런데 소설 밖에서 작가가 소설 속의 입장과 결부되는 발언을 반복한다면, 그건 작가의 의도가 곧 소설의 의도라고 오해하게끔, 독자들에게 빌미를 던지는 행동이다. 소설은 사라지고 작가만이 ‘스캔들’로 부각되기 쉽다.

소설 <소금>은 “이 땅의 아버지”를 호출한다. 이를 둘러싼 설정이 노골적이고 빤하지만, 어쨌든 소설은 내내 상처와 희생의 자리가 왜 아버지들에게는 가면 안 되느냐고 소리 높인다. 모욕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모두가 ‘피해자 되기’에 열심인 상황이, 드디어 베이비부머 세대인 아버지들의 ‘피해자 되기’로 완성되는 걸까.

아버지는 가출한다. 자본주의의 폭력적 구조의 희생자인 아버지, 장년의 남자. 그 맞은편엔 아버지를 착취하는 가족이 있다. 장년의 여자와 ‘요즘 젊은 것들’인 여자 셋. 그들의 얘기가 사십 줄에 들어선 이혼남이자 중년의 남자인 ‘나’를 통해 전달된다. 이때 장년의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에서 임의 탈퇴한다. 하지만 아버지 자체를 그만둔 것은 아니라서 ‘다른’ 아버지의 삶으로 옮겨간다. ‘어떤’ 아버지가 되려다 실패한 중년 남자인 ‘나’는 어쩌면 자신을 ‘다른’ 아버지로 만들어줄 ‘요즘 젊은 것들’인 여자에게 희생자이자 피해자인 아버지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이 얘기 속에서, 어떤 남자도 아버지로 만들 수는 없는 장년의 여자는 당연하게도 죽는다. 그 다음은 ‘요즘 젊은 것들’이었던 여자의 변화 혹은 진화다. 깨달음과 반성과 눈물과 감동이 예약되어 있는 과정. 이쯤 되면 아버지를 그만두고 싶다는 작가의 말과는 달리 ‘이런’ 아버지는 싫지만 ‘저런’ 아버지는 하고 싶은데, 차마 그 말을 직접 못하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

실상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의 다른 이름은 ‘꼰대화’다. 어쩌면 근대화 이후의 꼰대화라고 부르는 게 더 맞겠다. 뱃속에 있던 쌍둥이 중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현상인 배니싱 트윈처럼, 근대화 과정이 무르익으면 근대성에 붙어 있던 꼰대성도 그렇게 되길 희망했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꼰대성은 도처에 뿌리내리고 언제든 어디서든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이곳은 일반화된 꼰대 사회라는 걸 우선 인정해야 한다. 짜증, 비난, 비웃음, 경멸의 맥락을 깔끔하게 떼어내진 못하겠지만, 아직 구제불능으로 오염되지는 않은 꼰대라는 말을 그나마 구해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마초에게 ‘순정 마초’의 길도 있는 것처럼, 꼰대에게도 성마른 대접을 넘는 존중의 길이 있다. 능력 있고 열려 있지만 꼰대질을 아끼지 않는 꼰대이거나, 답답하고 막혀 있지만 꼰대질은 삼가는 꼰대라면, 비꼰대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문제는 꼰대로서의 ‘자존감’이 별로 없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부심’을 자존감의 근거로 믿는 경우다. 꼰대가 자신이 꼰대라는 것을 앞장서서 부정하고, 그런 자기 부정에서 비롯된 자기모순을 거창한 뭘로 합리화하는 데서, 꼰대와 비꼰대의 만남은 이지러진다. 근대화 과정을 거친 아버지들이 자신들을 “소리 내 울지 않는” 애잔함과 쓸쓸함을 지닌 애비哀悲 세대라고 여기는 것도, 끝없이 아버지를 착취한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이 스스로 먹고사는 자식自食 세대가 되길 바라는 것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굴욕을 견디며 사는 일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라던 아버지가 자식을 “사치해, 사치해, 사치해”라고 바라보는 것은 너무 꼰대 같다.

꼰대는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단순하지만, 스스로는 올곧다고 믿는 위험한 판단을 하면서 뒤집어진 거울상의 세계에 스스로 갇혀 간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열심히 사는(누가 그걸 부정하겠는가, 누가 그걸 폄하하겠는가) 아버지들이 ‘우리의 서러움과 쓸쓸함을 좀 알아 줄 수는 없겠니’라는 얘기를 소박하게 한다면,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버지는 꼰대라는 별명 대신 아버지라는 본명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꼰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꼰대는 사적으로 풀어야 할 서운함과 섭섭함, 쓸쓸함에도 자본주의의 폭력적 구조를 가져오고, 그것을 몰라주는 누군가에게 지적질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폭력적 구조가 보편적으로 해소된다고 해도 너와 나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진 않는다. 너와 나의 구체적인 관계에서는 전언의 무게보다 태도의 섬세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니 태도야말로 메시지라는 것을 꼰대들은 항상 우습게 여긴다. 그래서 대접과 접대를 혼동하고, 존중과 존경을 헛갈리고, 무심을 무시로 오해하면서, 습관적 불만 상태에 젖어든다. 꼰대들은 자신이 꼰대라는 것도, 자신이 실은 삐쳤다는 것도, 그럴듯한 커다랗고 무겁고 답답한 말들의 가면 뒤로 감춘 채, 세상의 중심에서 불만을 외친다. 징징대는 마초, 토라진 꼰대처럼 꼴불견도 없는데.

박범신은 <소금>의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거대한 소비 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온 ‘아버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 번이라도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이 말이 세상의 구조를 향한다면, 가슴을 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관계의 속살을 향한다면, 관계맺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가 닿기 힘들다. 이렇게는, 너무 ‘짜서’ 삼키기 힘들다. 죄책감에 기초하는 관계는 비대칭적인 힘의 위계를 은폐하기에, 결코 건강하지 않다.

꼰대라는 것을 인정하되 시민적 예의를 갖추거나, 꼰대 아닌 사람과 어울리고 싶으면 제발 소박하게 다가가야 한다. 원하지도 않은 거창한 담소에 누가 기꺼이 질식되고 싶을까.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인정받고 싶다면 상대방 속에서 자신을 잃어야 한다.” 늙더라도 ‘뒷방 늙은이’는 되지 말고, “바운스, 바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