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션의 모자들

오늘부터 모자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어.




Michael Bastian


패션의 최신 경향을 요즘처럼 쉽게 알 수 있는 때는 또 없었다. ‘T.P.O’ 니 유행 품목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들리니, 온 국민이 스타일리스트가 될 판국이다. 하지만 아는 게 독이 되어, 다들 엇비슷해지는 게 문제다. 도시의 풍경은 건축물이나 조경이 아닌, 사람들이 만든다. 그래서 우선, 올여름 유행 전망과는 별 상관없는 룩을 골랐다. 형광색, 스포티즘, 샌들은 다음 기회에. 이제는 고전 복식으로 분류되는 헨리넥 티셔츠와 프린트 쇼츠를 입고, 신발은 뚱딴지 같은 태슬 슬립온으로. 다만 모자는 최신 유행에 맞췄다. 남녀노소 누구나 쓸수 있는 범국민적 벙거지 ‘버킷 햇’. 흔하디흔한 유행도 이처럼, 개인적이고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다. 강지영




Kris Van Assche


챙이 빳빳한 뉴에라가 창궐한지 무려 10년이 넘었다. 어떤 권세도 10년을 넘지 못한다는 말도 이 모자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꼬질꼬질해도 빨지 않고, 안쪽의 스티커도 떼면 안 된다는 법칙까지 소중히 지켜내며 뉴에라로 10년을 보냈다. 결국 모자에선 샴푸 냄새를 단번에 죽이는 압축된 머리 냄새가 났다. 그만하면 이제 새로운 맛을 볼 때도 됐다. 하지만 막상 바꿔 쓰려니, 대부분의 모자가 엉거주춤하게 머리에 놓이는 형국이라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그래서 베이스볼 캡을 골라봤다. 사진 속 모자는 전통적인 디자인에 살짝 높이만 올렸다. 조선시대 관모를 쓰는 것도 같아서 어깨가 괜히 으쓱해진다. 오충환




Richard James


런웨이에 등장한 수많은 모자 중 단연 눈에 띈 건 리처드 제임스의 사파리 모자다. 새빌로의 남자들도 놀 땐 이런 모자를 쓰는가 싶어 흥미로운데다 색깔까지 선명한 다홍색이다. 착착 두세 번 접으면 다이아몬드 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갈 모양이라 더 맘에 든다. 그러나 아무리 멋있어도 이 모자를 도시에서 쓰는 건 좀 부끄럽다. 페도라, 파나마, 뉴스보이 캡 등 도시에서 쓸 만한 모자는 이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 이 모자는 조금이라도 물이나 풀이 있는 곳에서라면 맞춘듯 어울린다. 리처드 제임스도 그럴 때의 풍류를 위해 이 모자를 만들었다. 서핑 쇼츠 한 벌 달랑 입고 맨발로 나선 모델만 봐도 알 수 있다. 노는 기분이 제대로다. 김경민




N. Hoolywood


스냅 백. 뉴에라, 플란넬 볼 캡 다음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모자다. 말 그대로 뒤에 달린 고리를 딸깍 끼우는 걸로 너비를 고정하는 모자인데, 뒷면이 밋밋한 뉴에라나 플란넬 볼 캡보다 더 경쾌하고 반항적인 인상을 준다. 다들 이런 모자는 슬쩍 돌려 써야 제맛이라고 한다. 45도는 소심하고 90도는 너무 의도적으로 보인다. 가장 좋은 건 170도에서 190도 사이쯤인데, 반원 모양의 구멍 사이로 쓸려 넘어간 머리와 이마가 살짝 보여야 한다. 사실 가장 멋진 순간은, 똑바로 쓴 모자의 챙이 살짝 말려 올라갔을 때다. 다이스케 오바나는 그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챙의 위보다 아래쪽이 더 중요한 그 순간을 위해, 챙 아래에 하고픈 몇 마디 말도 써 두었다. 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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