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포화시대

2000년대 후반부터 아이돌 팬덤의 양상은 사뭇 다르게 흐른다.



2000년대 후반부터 아이돌 팬덤의 양상은 사뭇 다르게 흐른다. 가장 큰 변화는 20, 30대 팬의 대거 유입이다. 아이돌은 유사 연애 산업이다. 연습생을 캐릭터별로 짜는 방법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설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돌 팬 대부분이 10대인 것 역시 직접 연애의 통로가 상당 부분 막혀 있는 데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20, 30대 팬은? 마침 한국에서 초식남, 건어물녀가 이슈로 떠오른 때다. 예능 프로그램도 아이돌을 보다 캐주얼하게 소비시키는 데 한몫했다.

최근 아이돌 팬덤의 양상은 또 다르다. 아이돌이 너무 많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이돌은 확실한 ‘파이’를 찾는 데 몰두한다. 일정 파이를 차지하면 그 후론 유지및 확장할 수 있다. 요즘 들어 부쩍 생소한 노래가 음원차트 1위에 올라 있다. 같은 복장을 하고 군무를 추는 남성 아이돌 그룹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성 아이돌 그룹은 포화 상태고, 여성 팬은 남성 팬보다 충성도가 높다. 아이돌 뒤에 ‘덕질’이라는 표현도 자주 붙는다. DSLR의 대중화와 고화질 동영상 서비스 덕분에, 아무리 유명하지 않은 아이돌이라도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갖고 있다. 아이돌 춘추전국시대, 이제 아이돌은 우상이라기보다 음반을 사재기하고 SNS에서 콘텐츠를 공유하며 ‘레벨업’ 시키는, MMORPG 게임 캐릭터다.

한국보다 먼저 아이돌 시스템을 구축한 일본은 90년대 초반 아이돌 빙하기를 맞았다. 퍼퓸의 매니저는“AV의 범람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여성의 성욕이 긍정되고 여성 아이돌의 잇따른 스캔들이 터지면서, 아이돌은 유사 연애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이후 일본 아이돌은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오디션에서 탈락한 멤버를 모아 만든 모닝구 무스메가 원형을 제공했다면, 총선거에서 직접 팬 투표로 정식 멤버를 뽑는 AKB48은 좀 더 본격적으로 구현된 경우다.

한국의 아이돌은 긴 연습을 통해 노래와 춤을 완성한다. 그들은 일본에서 아이돌이 아닌 ‘아티스트’다. 일본의 아이돌은 미성숙한 존재다. 성장 스토리를 팔아야 하니까. AKB48은 아키하바라의 전용 극장에 선다. 팬은 그들의 성장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마음에 드는 멤버를 정식으로 올리기 위해 수십 장의 시디를 산다. 일본에서는 라이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이돌을 지하 아이돌이라 부른다. 퍼퓸은 지금의 성공 이전에, 7년이나 라이브 하우스를 돌고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뿌렸다.

홍백가합전에 출연한 모모이로 클로버Z(이하 모모크로Z)는 가장 최근에 성공한 지하 아이돌이다. ‘특수 촬영물’에 등장하는 옷을 입고 서툴게 노래를 부르면서 애니메이션 마니아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올해 4월 발표한 싱글 ‘Neo Stargate’에서 모모크로Z는 징 박힌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 기괴한 복장은 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논란에 신경 쓰기엔 앨범 판매량이 너무 많았다.

AKB48은 나고야, 오사카 등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그룹을 따로 만들어 팬과 만나는 접점을 늘리고 있다. 모모크로Z는 아이돌에 관심 없는 층을 공략하기 위해 오늘도 옷을 갈아입는다. 한국의 아이돌은 오디션-연습생-그룹 결성이라는 과정을 거쳐 한류스타가 되는 게 최종 목표다. 일본의 아이돌은 더 가까운 존재가 되려고 한다. 한국의 아이돌은 더 높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