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안개 속의 두 얼굴

2013.07.29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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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두 얼굴
오래전, 괌에서 햇빛 화상을 입었다. 비치타올을 얼굴에 덮고 누웠다가 가리지 못한 나머지 면이 그은 듯 그을렸다. 코티지 치즈 색 얼굴이 곧 짬뽕 국물보다 벌개지고, 이어 유릿 가루로 문지르는 통증이…. 그날 이후 햇빛 알레르기는 평생의 지병이 되었다. 선블록이 나의 애첩이 된 지금, 바르는 법은 여전히 서툴다. 눈에 들어가 종일 토끼 눈인 데다 백탁 때문에 가부키가 된 나를 보고 누가 물었다. “화장했어?” 억울해. 내가, 잔혹하게 싸우고 난 뒤의 서커스 너구리 같은 메이크업을 안 지운 채 술자리에 온 배우라도 되나? 그래도 얼굴이 케밥처럼 죽은 회색빛이란 말보단 나은 거야?

몇 년 전, 방송국 분장실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분이 첩을 꺼내선 범죄자들이 차를 도색하듯 내 얼굴을 두드렸다. 이러다 눈꺼풀에도 뭐 바르는 거 아냐? 불안한 그때 콧등에도 뭔가 스쳤다! 머리 만지는 시간은 더 걸렸다. 결론은, 남자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TV의 생각은 있는 그대로와 멀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강판에 갈아버린 것 같은 얼굴보다 귀가 더 문제였는데. 통통한 거미 다리로 채운, 덜 구운 베이컨 조각 같던 그 귀가.

여자들은 훨씬 오래 걸린다. 신만이 도대체 거울 앞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것이다. 그런데 요샌 종일 뿌연 얼굴로도 씩씩한 자식들이 참 많다. 결점을 가리려다 자충수를 뒀지 싶지만, 뭐, 이탈리아 남자들도 더 남자답자고 메이크업을 하진 않으니까. 그러고 보니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남성용 색조 화장품 붐이 일 듯 말 듯 그러다가 쑥 들어가곤 했다.

아무래도 ‘색조’는 온전한 남자의 것이 아니다. 부드럽게 호를 그리는 눈썹, 마이구미처럼 말랑말랑한 피부, 회초리처럼 찰랑 찰랑한 머릿결은 나, 당신, 할아버지, 선배, 삼촌, 우리 모두의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남자는 대신 핏기 없는 전체주의적 회색 세계에 머무는 조지 오웰의 윈스턴 스미스처럼 창백하고 응어리진 삶을 사니까…라고 말하진 않겠으나…. 그러나 요즘 어떤 알 수 없는 조짐은, 남자들이 지금 뭔가 얼굴에 손을 대야 할 시점이고, 또 각자 그것에 관해 어떤 책무를 맡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항의 여행
히드로 공항 도착 사인이 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켰다. 다른 나라의 환경에 즉각적으로 집중하는 대신, 비행기 안에 있는 동안 쌓인 문자를 체크하느라 골몰해봤자 몇 개의 안부, 몇 개의 초대, 몇 개의 종용, 몇 개의 대리 운전 문자뿐. 미디어는 개명한 시대를 찬송하지만, 우리 스스로 지구에 지옥을 만든 게 틀림없다.

어딜 가나 악몽의 스마트폰 죄수가 된다. 북극권에 가도 전자 장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베네주엘라에선 휴대전화를 쓸 수 없었다. 모바일 존 자체가 없었다. 서울의 후진 뉴스 따윈 볼 수도 없었다. 명상 같은 평화 안에서 매일 밤 와인을 마셨다. 기대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이.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읽을 땐 오직 19세기의 러시아와 20세기 후반의 루마니아만이 존재했다. 아무도 연락할 수 없는 장소에서 인생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좁혀진 그때만큼은 존재하는 순간이 성스러웠다.

존재를 요구하는 심각한 책처럼, 여행은 전자 시대의 산만함에 저항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휴대전화는 치워야 한다. 여행은 직선이기 때문에. 그건 단 하나의 장소이자 개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닭싸움
거리에서 싸우는 자식들도 이 미친 세상에 한몫한다. 한번 쳐다봤다고 피로 숙청하고, 방향표시등 하나 삐끗했다고 차 트렁크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내니, 진짜 남자의 세계란 그런 것인가?

폭력성은 남자 마음의 최전선에 있다. 즉, 매일의 방어 메커니즘, 근성, 정력, 근육, 모두 경보 태세다. 물리적으로 손 좀 봐주려는 충동이 성격, 신념, 명예, 영역을 방어하는 남자의 방법인지, 보호해야 할 가족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생리학적 요소와 심리학적 결함의 결합이건 아니건, 모든 남자는 뭐든 입증하기 위해 주먹을 썼거나 쓸 것이다. 남자들은 싸운다. 도시나 골목, 술집이나 지하, 어디서나. 남자의 유전적 성향은 좋건 싫건 삶과 죽음이 자기 손에 놓여 있는지 매 순간 판단하고 결정한다. 학습된 상상력이 남자됨의 권리를 준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을 주먹 하나로 사는 개복숭아 같은 남자라고 해도 지하철이나 주차장에서 기센 여자를 만나면 무력한 일곱 살 꼬마가 되고 말 것이다.

모든 남자는 영혼 속에서 울부짖는 원초적인 야수 근성을 풀어버리고 싶어 한다. 러브스토리라고들 하지만, 로미오는 줄리엣을 얻기 위해 두 명이나 죽였다. 그냥 꽝! 코가 깨지고, 목이 뽑힌다. 변명하거나 이유를 대는 대신 일단 저지르고 본다. 뭍에 올라오자마자 성질 급하게 죽어버리는 밴댕이처럼.

그런데 어떤 여자들에겐 싸우는 남자가 매력적으로 비치는 경향이 있다. 때로 (잘) 때리는 남자가 좋은 아빠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싸움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누굴 때릴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완전 못생긴 그녀가 지켜보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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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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