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하는 인간

소프라노 임선혜, 발레리나 김주원,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함께 놀았다. 노는 데 필요한 준비물은 음악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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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심이 앉아 있는 피아노 의자는 그네 같고, 합주하지 않을 때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웃음 같았다. 기쁨은 축배가 아니라 흙을 잔뜩 담은 소꿉장난감 그릇인 듯했다. 소꿉장난은 부득이하게도 친구가 필요하다. 피아노 앞의 노영심에게 발레리나 김주원과 소프라노 임선혜가 차례대로 오면 출입구의 벨처럼 피아노 연주가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다. 관객들에게 선보일 성대한 인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 박용만 회장과 함께하는 여름 콘서트 > 리허설 현장이었다. 노영심이 음악 감독을 맡았다. “성악과 발레를 위한 앙상블을 피아노로 그리는 색다른 시도죠.” 김주원의 발레와 임선혜의 오페라를 위한 편곡과 연주가 다 그녀에게서 나왔다. 전제덕, 손성제, 정재일 같은 유능한 연주자들의 참여 역시 그녀의 공이었다. 노영심은 이 음악회에 ‘녹턴’이란 이름을 붙였다.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꿈’이란 해석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했다. 꿈은 늘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남다른 명성을 쌓은 세 사람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는, 6월 20일의 두산 웨이 홀이었다.

“저는 두 사람이 한껏 돋보이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봐요. 어떤 장점이 있는데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거라면 제가 끌어내는 거죠. 안 해본 걸 해보도록 하는 것. 이 음악회의 가장 중요한 동기예요. 일종의 실험이요.” 노영심이 말했다. 확인되지도 장담할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지금 너머를 향하는 시도가 실험일 것이다. 실험을 통해서만이 현실과 꿈의 간극은 좁혀진다. 그러므로 두산 그룹 임직원이라는, 훈련되지 않은 관객을 위해 친숙하고 가벼운 곡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다. 다시 노영심이 말했다. “박용만 회장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전적으로 저희가 하는 내용을 지지하죠. 기업 행사가 아니라 우리의 실험 공연에, 선택된 관객이 온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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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진행을 맡은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과 더불어 가졌던 짤막한 대화의 시간. ③④ 리허설 중의 임선혜와 김주원.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은 노영심의 오랜 친구다. 노영심에게서 임선혜를 소개받기도 했다. 부산 보육원 봉사 활동 과정에서 만난 김주원은 박용만 회장이 두 사람과 연결시킨 경우다. 세 사람의 중심에 박용만 회장이 있었다. 지난 1월, 박용만 회장은 두산 웨이 홀에서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음악회를 처음 열었다. 그때 앞으로 분기마다 음악회를 열 예정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뜻밖의 두 번째 ‘판’이었다. 함께할 수 있는 실험 공연을 막연히 생각하던 그들에겐 좋은 계기였다. 누구보다 꾸준히 무대를 이어가는 세 사람이기에 만만한 일정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임선혜의 경우, 단 하루만 빼낼 수 있는 촘촘한 일정 가운데 참여했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세 사람과 박용만 회장 사이에는 매니지먼트보다 우위의 ‘카톡’이 있었다. 카톡으로 소통하면서 바쁜 와중에도 긴밀하게 음악회를 준비했다. 각각의 공중도덕이 투철한 시민 사회에서 제도는 무용할 것이다. 네 사람의 우정은, 홍보, 마케팅, 기획, 경영에 걸쳐 있는 현대 음악의 산업적인 요소를 무위로 만들었다. 노영심이 설명했다. “저는 즉흥 무용하는 친구들과 작업해봐서 알아요. 저희끼리는 ‘긱’이라고 하거든요. ‘모여서 한판 놀자’요. 근데 선혜와 주원이는 악보를 바탕으로 잘 짜인 작업을 주로 해왔어요. 여기가, 각자의 방식을 엿보면서 실험해볼 수 있는 하나의 판이라고 생각해요.” 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름의 정서를 듬뿍 담은 공연이었다. 유럽 바로크 음악계 최고의 프리마돈나로 추앙받는 임선혜의 선곡부터 드러났다. 조지 거쉬인의 ‘The Man I Love’와 ‘Summertime’이었다. 본래 오페라 아리아이지만 재즈 고전으로 더 익숙한 ‘Summertime’을, 임선혜는 특유의 맑고 견고한 음으로 소화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완전히 제압될 때 느끼는 역설적인 안락함이 숫자처럼 명쾌하게 전달됐다. 제목에 봄을 담고 있지만, 피아졸라가 그리는 녹록지 않은 격정 덕분에 금세 여름으로 도약하는 ‘Primavera Portena’도 주목할 만했다. 김주원과 국립발레단의 주역 무용수 이영철이 함께했다. 발레가 도달 가능한 영역을 넓혀가는 김주원의 야심과 그에 걸맞은 표현력이 잘 드러났다. 이런 게 봄이라면, 여름은 필요 없을 듯했다.

이날 김주원은 또 한 번의 듀오 무대를 펼쳤다. 지난 2007년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의 협업으로 화제를 모았던 한국적 창작 발레 < The One >이었다. 국립무용단 수석 무용수이자 이 작품의 안무가인 이정윤이 등장해 그녀와 호흡을 맞췄다. 서로에게 닿지 않는 남녀가 상대방을 향해 헤엄쳐가듯이 팔을 휘저으면서 공연은 시작된다. 어깨춤이라는 한국적인 발상을 엿볼 수 있고, 마침내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통해 주제 의식도 드러낸다. 배경 음악의 서늘한 아쟁 소리가 썩 잘 어울렸다. “여름 하면 떠올리는 음악 페스티벌 말고요. 조금은 차분한 여름. 내재된 에너지가 있는 여름이요.” 노영심의 말이 생각났다. 진행을 맡았던 박용만 회장은 노영심을 일컬어 “여백이 많은 사람,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써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노영심의 여백에 사뭇 새로운 여름이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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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⑤ 리허설 중의 김주원과 노영심. ⑥ 포페아의 아리아 공연 중의 임선혜와 이정윤. ⑦ 음악회 진행 중의 박용만 회장.

< The One >을 시작으로 ‘한국적인 것’을 의식했음이 분명한 선곡이 이어졌다. 임선혜는 안정준의 가곡 ‘아리아리랑’을 불렀고, 김주원은 ‘드뷔시를 주제로 한 아리랑’에 맞춰 발레를 선보였다. 모두 노영심의 편곡이었다. 각각의 아리랑은 놀랄 만한 동시대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리허설에서 김주원이 정확히 표현한 바와 같았다. “해외 공연에서 소개할 수 있는 뛰어난 한국 작품이 드물어요. 아주 짧은 한국적인 피스를 보여줬다가 외국 사람들이 우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누구보다 아름다운 곡을 만드는 작곡가이자 편곡가이자 선생님을 만났으니까 이때다, 했죠. 아리랑 고개 넘어가는 것 말고, 좀 더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세계적인 추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리랑을 소화해보고 싶었어요.”

김주원에게 여름은 꽤나 각별하다. “러시아에서 공부하면서 영하 40도의 겨울을 보냈던 아픈 기억 때문에 저는 여름이 훨씬 좋아요. 여름이 움직이기도 좋고 그래서 활동적이고요. 계절에 영향을 많이 받는 직업이다 보니 겨울이 정말 싫어요. 여름이 참 좋죠.” 말하자면 그건 여름이 놀기 좋다는 뜻일까? ‘울게 하소서’와 ‘편지’ 등을 연주한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은 “놀 듯이 할 생각으로 왔다”고 고백했는데, 끝내 “아름다운 밤이네요”라는 소감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날은 전제덕의 생일이기도 했다. ‘Happy Birthday to You’를 연주하는 순서도 있었다. 전제덕은 생일에 드는, 그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날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을까? 음악회에서 노영심은 다시 한 번 “이것은 실험이자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래, 꿈을 꾸기 위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