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세이브 포수의 탄생

2013.08.27GQ

포수진 운영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전성기 때 박경완처럼 확실한 주전을 수비력 좋은 백업 포수가 보완하는 구도다.

Sports판형

역대 한국 시리즈 우승팀을 보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뛰어난 포수들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삼성의 진갑용, 현대와 SK 왕조의 박경완, 1994년 LG와 2000년대 현대를 우승으로 이끈 김동수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탁월한 게임 리딩과 수비력을 갖춘 것은 물론 타석에서도 중심 타선 못지않은 파괴력을 발휘했다. 반면 전력이 아무리 탄탄한 팀도 포수가 흔들리면 우승에 실패했다. 1993년 신인이던 이종범에게 무더기 도루를 내주며 무너진 삼성, 2009년 박경완의 공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SK가 좋은 예다. 2010년 SK가 우승을 확정짓던 순간, 김광현은 기쁨을 표현하기에 앞서 박경완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삼성이 2연패를 달성하던 날, 오승환은 좀처럼 보기 힘든 함박웃음을 지으며 풀쩍 뛰어 진갑용의 품에 안겼다. 최정상급 투수의 신뢰를 얻는 포수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박경완이나 진갑용 같은 포수가 자주 등장하는 건 아니다. 그만한 재능을 갖춘 포수가 드문데다, 신인 포수가 박경완처럼 데뷔하자마자 꾸준히 1군 출전 기회를 얻고 경험을 쌓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공수 균형이 잘 맞는 포수도 보기 드물다. 현재 9개 구단 중 절반 이상이 확실한 주전 포수 없이 시즌을 치르고 있다. 그나마 강민호가 건재한 롯데와 양의지가 버티는 두산, 김태군이 선전하는 NC 정도가 포수 걱정이 덜한 편이다. 포수진 운영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전성기 때 박경완처럼 확실한 주전을 수비력 좋은 백업 포수가 보완하는 구도다. 이 경우 감독은 주전 포수를 계속 내보내다 체력 안배가 필요할 때 백업에게 마스크를 씌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조합은 어지간해선 탄생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포수진을 구축하지 못한 팀들은 약점 보완을 위해 다양한 포수 운용법을 고안했다. 대표적인 형태는 전담 포수제. 당일 선발투수와 호흡이 맞는 포수를 주전으로 내는 방식이다. 일부 팀은 외국인 투수 전담 포수를 따로 두기도 한다.

신인 포수를 키우려는 팀들은 젊은 포수를 먼저 기용한 뒤, 경기 후반 베테랑 포수를 출전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육성한다. LG는 지난해 윤요섭과 조윤준을 자주 선발로 내보냈고, 올해 삼성 역시 진갑용의 뒤를 이을 이지영을 중용하고 있다. 메이저리그의 탬파베이 같은 팀은 ‘미트질’이 뛰어난 포수들만 영입하는 전략을 쓴다. 실제로 볼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키는 포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해 투수진 성적 향상에 효과를 보고 있다. 취약한 포수력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고육지책이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에 ‘세이브 포수’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세이브는 잘 알려져 있듯 이기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하는 투수에게 주어지는 기록이다. 세이브 포수도 마찬가지다. 팀이 앞선 경기 후반, 승리를 지키기 위해 투입하는 포수를 가리킨다. 처음 세이브 포수라는 개념을 직접 거론한 사람은 김시진 감독이다. 김 감독은 2009년 넥센 감독 시절 공격형 강귀태를 선발로 내고 블로킹이 좋은 허준을 경기 후반에 내는 방식을 시도했다. 지난해에도 최경철을 먼저 쓰고 허도환을 뒤에 쓰는 식으로 포수 분업을 이어갔다. 두산 역시 마무리 투수 프록터가 등판하면 전담 포수로 최재훈을 앉혔다. 당시 김진욱 감독은 세이브 포수를 쓰는 이유를 “후반에는 상대의 도루 저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올 시즌에도 넥센 염경엽 감독이 허도환을 주전으로, 경기 후반에는 송구가 좋은 박동원을 교체 투입하는 식으로 포수진을 이끌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경기 후반에 수비 강화를 위해 투입되는 포수는 있었다. MBC 차동렬, LG 김동수의 뒤를 이어 등장한 故심재원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초중반 삼성에선 박선일이 중요한 순간에 이만수와 김성현에 이어 자주 등장했다. 이들은 대개 백업 포수 혹은 수비형 포수로 불렸다. 세이브 포수란 그럴듯한 호칭은 최근 쓰였다. ‘패전 처리’라고 불명예스럽게 불리던 구원투수들이 ‘추격조’라는 멋진 이름을 갖게 되고, 강명구-유재신 등이 ‘대주자 스페셜리스트’로 분류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

한 야구인은 세이브 포수라는 새로운 보직을 두고 “포수력이 약한 팀에서 포수진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의미는 있다”고 했다. “분명한 목표와 역할이 주어지면 선수는 그에 맞는 준비와 훈련을 할 수 있다. 경기 후반 수비 강화로 역할 제한된 포수라면 선발보다 불펜 투수들을 파악하고, 타격보다 블로킹과 2루 송구 훈련에 집중하는 식으로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확실한 주전 포수가 있다면 굳이 세이브 포수가 필요할지 의문”이라며, “한국 야구의 포수 자원이 그만큼 취약한 게 아닐까”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최근엔 한 시즌, 한 경기를 홀로 책임질 만한 포수가 드물다. 박경완과 진갑용은 은퇴를 앞두고 있고, 강민호와 양의지가 있긴 하지만 아직 팀을 우승시키는 정도의 절대적인 특별함은 보여주지 못했다. 지도자들은 퓨처스리그와 아마추어 야구단에 제대로 된 포숫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을 쉰다. 세이브 포수라는 신조어에는 포수 자원이 고갈된 한국 야구의 씁쓸한 현실이 담겨 있다.

    에디터
    글 / 배지헌(야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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