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분자

비둘기와 목탄 말고도, 회색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Wooyoungmi


우영미가 만드는 추운 날씨의 옷들을 좋아한다. 회색 플란넬 재킷을 입을 생각에 마음이 급한 가을부터, 무작정 헤링본 코트 먼저 꺼내놓고 싶은 겨울까지. 우영미의 옷은 두툼한 대신 가뿐하지만 충분히 따뜻하고, 엄격한 대신 상냥하지만 뚜렷한 기품이 있다. 낭만적이되 질척거리지는 않으니, 날씨로 치면 비 안 오는 흐린 날 같다. 올해는 회색 옷을 잔뜩 입고 싶은 욕심이 가득한 가운데, 어깨가 둥근 헤링본 코트와 캐시미어 터틀넥을 보니 종일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여름만 영원하길 한결같이 늘 원한다. 하지만 이런 옷을 보면 기분이 바뀐다. 마침 검정색 첼시 부츠도 슬슬 장만하라고 권하고 싶은 참이었는데, 이럴 땐 뭐라고 하면 맞을까. 느낌 아니까?




Dries Van Noten


생경함이 주는 충격은 횡격막을 울린다. 그 새로운 경험이 익숙한 옷의 조합에서 만들어지면 감동은 세 배. 대체 어떤 경험을 하면 이토록 자유롭게 입을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이런 조합은 모두 잿빛 스웨터 덕이다. 회색은 색깔을 넘어 스타일까지 아우른다. 마치 도시를 떠도는 먼지처럼 어디든 내려앉는다. 떠도는 유랑민이나 비둘기가 재를 뒤집어쓴 옷이나 깃털로 자유를 얻는 것처럼. 풀어헤친 긴 줄무늬 셔츠와 이국적인 문양을 넣은 바지, 헝클어진 머리와 선글라스까지, 깊게 파인 회색 스웨터로 기묘하게 설득력을 얻는다. 정교하게 다듬은 멋은 아니지만 매뉴얼대로 조합한 옷에선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유랄까.




Hardy Amies


하디 에이미의 쇼는 손을 뻗으면 모델에게 닿을 듯 작고 아담한 새빌로 매장 2층에서 열렸다. 하디 에이미는 요즘 클레어 말콤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으면서 새빌로의 젊은 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가장 눈에 띈 건, 단순화시킨 타탄 체크 수트 시리즈. 그중에서도 두껍고 빳빳한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세상엔 1백 가지가 넘는 회색이 있다지만, 다섯 가지 회색만 섞고도 이렇듯 차분하고 고상하면서 다채롭다. 각진 어깨, 스리피스 수트, 레지멘탈 넥타이, 포마드인지 젤인지, 암튼 뭔가를 잔뜩 발라 올린 머리, 눈썹 밑으로 내려오는 선글라스, 손에 든 가죽 장갑, 야무지게 묶어 신은 송치 부츠까지, 회색을 태어나 처음 본 것처럼 마냥 새롭다.




Dolce & Gabbana


두 종류의 옷차림을 주로 본다. 몸에서 ‘촉’이나 ‘착’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딱 떨어지는 옷차림. 통 넓은 퍼티그 팬츠를 돌돌 말아 입고 하와이안 셔츠나 풀오버 셔츠를 바지 위로 내놓은 옷차림. 단정한 쪽은 답답해서 지겹고, 넉넉한 쪽도 결국 공식을 따르는 무리처럼 보여 지루하다. 단정하고도 넉넉한 게 요즘 딱 원하는 옷차림이다. 그러니까 맨해튼 블리커 스트리트 더블 알엘 테일러 숍에서, 2013년에 맞춘 1963년식 수트 같은 것. 돌체 & 가바나의 스리피스 수트라면 분위기는 달라도 맥락은 비슷하다. 단단한 재킷 아래로 여유 있게 주름을 잡은 울 팬츠, 발등에 툭 떨어지는 밑단. 와인을 물컵에 따라 마시듯, 라펠 폭과 상관없는 타이를 고른다면 더 좋겠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