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비평이 아니다

<설국열차>는 걸작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논쟁이 시작되었다.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빠르게 손가락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논쟁은 140자에 불과했다.

Film판형

<설국열차>를 뒤늦게 보았다. 나는 구태여 뒤늦게 보았다, 라고 썼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나는 시사를 놓쳤고 게다가 개봉 첫날은 매진 행렬이 이어졌다. 할 수 있는 한 꽉 찬 극장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영화를 본 동료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 당신께서는 먼저 이 글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설국열차>가 아니라 <설국열차>에 관한 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모두 이 영화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봉준호는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예술가다. 이때 이 창조라는 말은 좀 특이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는 매번 멀리 점핑했고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한국영화는 <플란다스의 개>와 함께 21세기를 시작했다. 물론 그 앞에 많은 이름이 있다. 나는 너무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생각이다. 말하자면 김기영, 이만희, 그리고 임권택. 하지만 우리 세기로 들어설 때 누구보다 먼저 홍상수, 그리고 김기덕, 그 다음으로 박찬욱. 또는 이창동. 그런 다음 기타 등등. 나는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를 세계 영화의 시간 안으로 데려다 놓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봉준호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그는 한국영화를 할리우드 영화의 시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본격적인 세계 시장 안에서의 전투. 결국은 모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구로사와 아카라는 20세기 폭스사로부터 <도라, 도라, 도라>의 감독 제의를 거절당하자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장 뤽 고다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찍고 싶어 했다. 그리고 코폴라가 그를 초대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그 기획은 잘되지 않았다. 프랑소와 트뤼포는 오로지 할리우드 영화 현장이 보고 싶어서 스필버그가 <크로스 엔카운터>에 출연을 제안하자 받아들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례. 봉준호는 스필버그, 존 카펜터, 브라이언 드 팔머의 1970년대 영화가 자신의 정신적 목표라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질문에 수줍게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에서 <괴물>을 떠올렸다. 봉준호는 이제까지 한국영화에 존재한 적이 없는 장르를 끌어들인 다음 그 안에서 자신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완전히 새로운 규칙. 종종 익살맞고 때로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리듬.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더>를 경유한 다음 <설국열차>를 만들었다.

<설국열차>는 걸작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논쟁이 시작되었다.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빠르게 손가락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논쟁은 140자에 불과했다. 속도의 경쟁. 나는 SNS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무언가를 평가하는 데 앞장서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의 이름을 건 140자. 누군가는 그런 다음 몇 개씩 이어달리기를 했다. 그러면서 스포일러를 조심해야만 한다. 재빠른 공명현상. 그러자 발 빠른 트위터리언들이 140자를 RT하기 시작했다. 좀 신중한 이들은 거기에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그건 장님 코끼리 만지기였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한쪽은 그 영화를 보았고 다른 한쪽은 문장의 행간을 읽는 중이다. 온 사방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한다. 종종 140자에 대한 평가에 대한 평가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그저 무성한 소문들. 그러나 사실상 이건 잡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비평적 공명도 없다. 단지 재빠른 정보와 막연한 추측, 차라리 소설 쓰기라고 해야 할 주석들이 열매처럼 매달렸을 뿐이다. 자, 여기까지는 좋다. 나는 우리 시대 정보 사이의 속도를 존중한다.

이때 영화 비평은 언제 시작되는가.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비평의 시간은 언제인가. 영화에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 하나는 영화를 만드는 시간이다. 그건 창작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다. 말 그대로 공유의 시간. 누군가는 이것을 현장으로부터 영화를 뺏어오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세 번째는 영화가 끝난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이제야 비로소 영화를 비평하는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와 내가 갖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우리를 홀리는 이미지들.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편집과 음향 효과들. 가까스로 거기서 깨어나는 시간. 영화를 보는 내내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감각만으로 시청각 기호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때 뇌는 무엇을 하는가. 말하자면 뇌라는 스크린. 그때 지성은 종종 마비될 것이다. 그러나 판단이 잠들면 우리들의 능력에서 개념과 이념은 활동을 멈추고 오로지 직관만으로 버텨야 한다.

하지만 비평은 거기, 정확히 거기 그 문자, 140자에서 끝난다. 오늘날 마케팅 전문가들은 점점 교활해지고 있다. 그들은 비평이 시작되기 전에 재빨리 영화를 개봉한다. 모든 것은 견해의 자유로운 교환이라는 이름 아래 카오스로 빠져든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사 날자와 비평 날자 사이의 간격을 불합리할 정도로 좁혀놓는다. 첫날 영화관으로 달려간 열렬한 관객들은 맹렬하게 영화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그들의 글을 존중한다. 아니, 그들의 비평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랑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 당신처럼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글이 순식간에 무자비한 별점과 단순한 댓글로 인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간단하게 처리된다. 견해는 점점 더 단순하고 과격해지고 있다. 아니, 차라리 카피가 되어가고 있다. 이때 넘쳐나는 담론에 질린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내게 별점만으로 요약해달라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별점을 매기는 순간 비평은 멈춘다. 우리들은 비평이 창조적인 견해가 시작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별점은 매우 악랄한 행위다. 문학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회화도 잘 알고 있다. 아무도 소설을 읽고 별점을 매기지는 않는다. 오로지 영화와 음반을 향해서 그 짓을 한다. 이때 그 행위는 단지 더 빠르게 상품의 회전 속도를 올리기 위한 마케팅 전술에 불과한 앞잡이 노릇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몇몇 영화는 기꺼이 ‘알바’들을 동원한다. 네이버가 아무리 필터링을 해도 수법은 점점 더 전문적이 되어가고 있다. 10점 만점에 10점과 1점밖에 없는 평가를 합산한 다음 다시 엔분의 1로 나눈 것이 무슨 의미 있는 수치일까.

고다르는 오래전에 충고했다. “영화는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어요. 단 한 명, 관객과만 그러면 안 됩니다.” 대중들은 반격을 했다. “나는 내 돈 내고 본 영화에 대해서 할 말을 해야겠어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영화는 재미로 보는 것이니 무조건 재미있어야 해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의 재미와 당신의 재미를 동일시해서 말하면 안 된다. 이때의 주장에는 어딘가 모르게 파시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자,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당신이 <설국열차>를 보았는지 여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김기덕의 (영등위의 검열과 전쟁 중인) <뫼비우스>를 보았는지 여부도 궁금하지 않다. 핵심은 당신이 그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 무엇. 그때 그 질문은 영화를 보는 동안 당신의 뇌에서 상영된 영화는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눈이 아니라 뇌가 궁금한 것이다. 우리는 비평이 창작이라는 생명에 대해 묻는 자리이며, 그 물음은 우리들의 지성에 대한 실험이며, 그 실험은 우리들과 창작 사이에 놓인 우주의 질서에 대해 하나의 입장, 차라리 태도를 고백하는 경험의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진지하게 인용하고 싶다. 세계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대답. 세계란 항상 정신적인 것이다. 이때 세계의 암흑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신들의 도피, 대지의 파괴, 그리고 사람들의 대중화, 평균적인 것의 우위가 일어날 때 정신은 어두워질 것이다. 우리는 세계라는 정신의 빛이 반짝거리는 그중 하나다. 그 빛을 꺼뜨리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미지 앞에서, 영화 앞에서, 영화를 본 다음 그저 매긴 별점 앞에서, 그 별점 뒤에 숨은 노골적인 마케팅의 전술 앞에서, 수치가 되어버리고 평범하고 통속적인 의견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 당신은 다시 불빛을 밝혀야 한다. 영화가 세계의 일부를 잘라낸 다음 그것으로 만든 예술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생각을 해야 한다. 홍상수의 조언. (<극장전>의 마지막 대사) “인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것 같아. 끝까지 생각을 하면 뭐든 고칠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이 간절한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