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절의 10가지 단서

새 계절을 영원히 간직할 가장 아름다운 힌트 10.

HERMES ANKLE BOOTS 송아지가죽에 수작업 날염 처리를 해서 깊고 부드러운 광택과 나긋한 촉감을 만든 에르메스의 부츠. 꽉 끼거나 조이진 않지만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벨트 장식, 팔라듐 도금 처리를 한 뒷굽의 금속 장식 덕분에 이걸 신는 순간 갑자기 건장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크고 단단한 구두가 선물하는 겨울을 위한 마법. 게다가 이 부츠의 이름은 힘이다. 힘이라고 읽고 HIM으로 쓰면 된다.
LOUIS VUITTON TAURILLON 루이 비통의 슈퍼스타 키폴 45 반둘리에의 새로운 버전. 토뤼옹은 수송아지가죽 특유의 탄력과 부드러움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가운데부터 천천히 염색하고 보호 필름으로 색깔을 굳게 고정시킨다. 풍부하고 그윽한 톤을 덧입힌 토뤼옹 가죽은 오직 루이 비통을 위해서만 쓰인다. 포도주색, 파란색, 노란색, 오렌지색이 있지만 그 모든 색깔을 합한 것보다 오롯한 검정이 훨씬 아름답다.
VEUVE CLICQUOT LA GRANDE DAME 위대한 여인이란 뜻의 이름 라 그랑 담에서 유추할 수 있듯, 뵈브 클리코 라 그랑 담은 전형적인 여성 취향의 샴페인이다. 피노누아와 샤도네이가 섞였으니 얼마나 연약하고 섬세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첫 잔부터 마지막 잔까지 줄곧 고요하고 우아한 이 샴페인은 연애가 그리운 계절, 여자와의 저녁 테이블에서 남자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현대적이고 인상적인 매너다.
DOLCE&GABBANA BLACK COAT 어떤 코트를 고르는가 하는 문제는 옷에 대한 철학적 심상과 계절을 보내는 비법에 관한 것이다. 섬유유연제를 들이부은 듯 얄팍하고 매끈한 코트는 카펫 위를 걸을 때야 낭만적일지 몰라도 어딜 나설 생각은 꿈에도 못하게 만든다. 돌체&가바나의 무겁고 투박한 코트는 옛날식으로 호화롭다. 높은 어깨와 엄숙하게 펄럭이는 옷깃, 실크로 덧씬 둥글로 납작한 단추. 이런 코트라면 밖에 빙하가 쌓여 있대도 문을 열 용기가 당장 생긴다.
RAY BAN CLUB MASTER FOLDING 혼란과 무질서가 난립하는 패션 월드에서도 레이밴의 아성은 청청하다. 레이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만 옳다고 믿는다. 덕분에 과도한 디자인이나 기괴한 장식 없이 어제처럼 오늘도 팔린다. 그중에서도 클럽마스터를 향한 어떤 사람들의 애정은 폐쇄적일 정도로 고집스럽다. 로커빌리 풍의 눈썹 모양 디자인과 조금 작은 듯한 렌즈가 주는 엇박자의 오묘한 매력. 가을부터는 선글라스를 쓸 일이 부쩍 준다. 그땐 새로 나온 폴딩형 클럽마스터의 다리를 착착 접어서 조그맣게 만들면 된다. 어디든 가뿐하게 잘도 들어간다.
TOM FORD NOIR 톰 포드 누아 향수는 블랙 페퍼, 오포포낙스, 앰버, 패출리 등 향수계의 어둠의 자식들만 모아서 검고 진하고 농밀하게 만들었다. 어둡고 검은 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누아의 향은 다른 말로 설명이 안 된다. 오리엔탈, 우디, 스파이시, 어떤 단어로도 불완전하다. 작년에 나왔지만 밤이 길어지는 계절이면 신제품 향수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난다. 잊히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다.
TAMBOUR IN BLACK CHRONOGRAPH 옛날 자동차 계기판에서 힌트를 얻은 단정하고 남성적인 모양의 다이얼은 땅부르 인 블랙의 상징이다. 블랙 래커로 칠한 반짝이는 다이얼에 플랜지와 인덱스도 블랙과 그레이로 만들어 침착하고 세련돼 보인다. 새로 나온 크로노그래프는 이 유명한 다이얼에 크로노그래프 창을 더했다. 아름다움에 기술과 과학을 보태면 딱 이런 시계가 나온다.
SAINT LAURENT PARIS LEATHER PANTS 생 로랑 파리 데뷔 컬렉션 이후 에디 슬리먼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의견 중에는 냉소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흐름과 유행과 평가를 초월한 시그너처 스타일을 밀고 나갔고, 이 부분에서 그만 맹렬한 적의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어쨌든 그는 한 시대의 표상임에는 분명하니까. 보기만 해도 종아리가 저려오는 이 가죽 팬츠는 에디 슬리먼만 할 수 있는‘ 스트리트 테일러링’의 일부이자 모든 것이다.
WOOYOUNGMI CROCODILE GLOVE 손등은 악어가죽으로 손바닥 부분은 펠트로 만든 우영미의 장갑은 우선, 슬그머니 웃음이 나게 한다. 따뜻하면서도 호화롭기로는 밍크 코트만 한 게 없지만 그건 너무 비싸다. 그럴 때 장갑은 뜻밖의 대안이 된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독수리와 토끼, 그게 뭐든 자꾸 만들어보는 재미는 또 어떻고.
PRADA SHETLAND KNIT 퓨어 셰틀랜드 울로 만든 프라다의 블랙 니트는 화려한 겉옷에 밀려 옷장에서조차 벽 뒤로 밀려난 니트의 존재감을 부활시킨다. 따뜻하게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내추럴 섬유 셰틀랜드 울은 첫눈엔 평범해 보이지만 입을수록‘ 내추럴’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성글지도 촘촘하지도 않은 특유의 직조를 유지하려면 차가운 물에 손 세탁해야 한다. 하지만 한겨울 냉수에 손을 담글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