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그녀에게

2013.10.02오충환

열여섯에서 서른 사이, 세련되게 마른 몸을 가진 여자 여섯.

코트, 드레스 LOUIS VUITTON.

SO YOUNG KANG
텅 빈 스튜디오에 홀로 서자 그녀의 일상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9월은 늘 외롭다고 했다. 그녀는 패션쇼 때문에 종종 뉴욕에서 9월을 보냈다. 그래서 생일은 가을처럼 지나갔다. 촬영이 시작되자 진지한 모드로 바뀐 그녀는 포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떠나고 싶을 때 함께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지만, 정작 작년 크리스마스이브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거울을 통해 말을 걸었다. 그리고 뭘 원하든 그건 중요치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파리가 서울의 반만큼도 위험하지 않다고 말했다. 밤에 혼자 센 강에 갔을 때, 다리 아래서 당당하게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 술 취한 사람들을 잔뜩 보기 전까지는. 요즘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걸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가끔 해가 질 때까지 잠을 잔다.

드레스 GUCCI.

STEPHANIE LEE
스테파니는 보스턴 근처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바다가 아주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모델이 되기로 결심하곤 뉴욕의 한 에이전시를 찾아갔다. 그렇게 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청결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칼은 이과수 폭포보다 광폭했다. 짙은 화장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마다하진 않았다. 9월은 특별하다고 했다. 삶을 시작한 달이라서 행복하다고. 최근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는 꿈꿔왔던 이상형과 똑 닮은 사람이에요. 오히려 더 대단하죠”라고 수줍게 고백했다. 그녀는 그 남자를 보자마자 반했다. 촬영이 끝나면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래서 화장을 느리고 꼼꼼하게 지웠다. 에스프레소를 저은 찻숟가락을 컵에 땅땅 때리는 섬세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 나무 >를 좋아하는 이유는 놀라운 상상력과 엉뚱함 때문이라고 했다.

수트 KOSOYOUNG.

SE RA PARK
박세라는 촬영이 끝나자 전쟁에 승리하고 박수갈채를 기다리듯 모두를 향해 시선을 고루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침착했지만 평범하진 않았다. “29년의 희로애락이 묻어나서 그럴걸요. 말하고 싶지 않지만, 어차피 설명할 수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스무 살에 집을 떠나 서울에 왔다. 오빠가 일하는 일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좁은 다락방을 얻었다. 그리고 벽 한쪽엔 케이트 모스의 사진을 걸어두었다.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넣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갈 때도 자신의 사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옷을 고를 때도 그랬다. 원하는 대로, 당신이 원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만들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화장을 지우고 슬쩍 옆에 앉더니 한동안 대화를 나눈 사람처럼 조금 나른하게 말을 걸었다“. 그 사람 멋있죠. 아, 그녀도 참 멋있었는데.” 그러곤 대화 깊숙이 들어왔다가, 단숨에 일어서서 작별을 고했다.

케이프, 뷔스티에, 스커트 CHRISTIAN DIOR.

JIN KYUNG KIM
김진경은 기묘한 방법으로 빠르게 커버린 신비로운 아이 같았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 도전슈퍼모델코리아3 >를 통해 유명해졌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익숙한 듯 보였지만 가끔 손끝이 떨린다고 했다. 촬영이 시작되자 단단한 벽에 이마를 기대듯 허공에 서 있는 듯했다가 어느새 팔꿈치를 어깨보다 높이 들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굉장히 민감하게 카메라의 셔터 스피드를 감지했다. 사진가가 탐색하듯 카메라를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그게 뭐였든 두 사람이 주고받은 건 날카로웠다. 좋아하는 문장이 있느냐는 질문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고 다소 의외의 대답을 했다. 이런저런 질문은 그녀에겐 죄다 태평양을 떠도는 구름 같았다. 이게 다 뭔가 싶었다. 그제야 그녀가 고등학생이란 걸 깨달았다. 최근에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가 봤다는 액션 영화가 15세 이상 관람가였는지, 청소년 관람불가였는지 도통 헷갈렸다.

 

재킷, 톱, 팬츠 HERMES 브레이슬릿 BOTTEGA VENETA.

 

HO JUNG LEE
한 시간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한 그녀는 삼십 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곤 결연한 걸음으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촬영이 시작되고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까맣게 잊었다. 어린 소녀의 눈빛은 거칠지만 위엄이 있었다. 이호정은 열다섯 살 때 모델이 되기로 작정했고 열여섯, 그러니까 작년에 정식 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어떤 질문이든 꾸밈없이 대답했다. 패션이 주는 환상이 진절머리가 날 때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항상”이라고 짧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첫 화보 촬영 때문에 얼마나 셀 는지 선명하게 기억해내고 신나서 말하는 걸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뉴욕에 가고 싶다고 했다. 큰 컬렉션에 서고 싶다는 이유에서. 영화< 트와일라잇 >의 로버트 패틴슨을 좋아해서 책까지 읽었고, 좋아하는 문장은“ 할 수 있다”라고 대답하는 여자. 아직 어른의 이편으로 넘어온 것 같진 않았다.

코트, 스커트, 벨트 MIU MIU.

A RA CHOI
촬영 전 여러 장의 사진을 봤는데 도무지 그녀를 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모조리 다른 여자 같았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얼굴을 기억하려 했다. 결국 기억에 남은 건 매력적으로 살짝 벌어진 앞니 정도였다. 조용히 스튜디오로 들어선 그녀를 두고 분명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벌어진 앞니를 못 본데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뻐서. 지금까지 모델 일을 하고 있는 건 운이 좋아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녀야말로 더없이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미세하게 움직여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어느 도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일랜드에 가고 싶어요. 어두운 날씨와 고요한 분위기가 좋아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화도 못 내고 소리도 좀처럼 지르지 못하는 성격이라 했다.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1천 년간 여행을 하는 소설 < 파피용 >을 좋아하며,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나무’, 좋아하는 배우는 이완 맥그리거와 히스 레저라고 말하면서

    에디터
    오충환
    포토그래퍼
    안하진
    스탭
    이지현
    메이크업
    박재민
    어시스턴트
    김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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