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찾아오면 <1>

훈련장과 경기장에서 두산 베어스의 2군 선수들을 만났다. 기회와 위기 사이에서, 내일은 내일의 야구가 열린다.

DAY 1

9월 5일, 한양대학교 야구장
앳된 얼굴들이 먼저 몸을 풀고 있었다. 등번호를 보고 선수의 이름을 확인했다. 절반쯤은 생소한 선수들. 8시 50분. 훈련 시작 시간은 10분이 남았지만, 벌써부터 코치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베테랑 선수들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김동주, 이혜천 같은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두산 베어스의 2군, 즉 퓨처스 리그 선수들은 오늘 경기가 없다. 월요일만 쉬고 매일 경기를 치르는 1군과는 달리, 퓨쳐스 리그는 경기 일정 사이사이에 훈련이 잡혀 있다. 오늘은 9월 15일에 열리는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치르는 마지막 훈련일이다. 퓨처스 리그엔 아홉 개 프로구단의 2군 선수단과 상무, 경찰청까지 총 열한 개 팀이 있다. 북부리그 다섯 팀, 남부리그 여섯 팀으로 나눠 시즌을 치른다. 두산 베어스는 현재 북부리그 4위다. 썩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2군에는 또 다른 목표가 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선수 육성이 우선이에요. 1군 백업 선수들의 관리도 중요하고요. 차별은 안 되지만 구별하는 건 중요해요. 시즌 초에 선수를 A, B, C 등급으로 나눠요. A는 키워야 하는 선수, B는 가능성 있는 선수, C는 좀 어려운 선수. 물론 A, B, C 상관없이 2군에선 기본이 제일 중요해요.” 올해 두산 베어스에 부임한 송일수 2군 감독이 말했다. 화수분 야구. 대형 FA 영입 없이도 2군에서 꾸준히 좋은 선수를 배출해내고 있는 두산 베어스의 별명이다. 여기서 눈도장을 찍은 선수에겐 확실히 기회가 주어진다.

지난 9월 1일은 일 년에 딱 한 번, 1군 엔트리가 스물여섯 명에서 서른한 명으로 확대되는 날이었다. 2군 선수단 중 네 명의 선수가 1군으로 올라갔다. 남아 있는 선수들의 맘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잔디가 깔린 보조운동장에서 서서히 본격적인 스트레칭 훈련이 시작되었다. 강흠덕 트레이닝 코치가 중앙에 섰다. “사실 포수 박세혁 선수가 1군에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최종적으로 1군에 다른 포지션이 필요해서 계획이 변경되었죠. 맘을 추스릴 시간이 좀 필요할 거예요. 지금 저쪽 야구장에서 따로 훈련하고 있어요.” 엄경훈 매니저는 두 운동장을 분주히 오가며 선수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두산의 주전 포수는 양의지다. 젊은 붙박이 포수가 있는 팀인 만큼, 1군 진입이 쉽지 않다. 선수 입장에선 일 년 중 가장 큰 기회를 놓쳤으니 아쉬울 만하다. 언제 다시 기회가 돌아올지 알 수 없다. 박세혁과 몇몇 부상자를 제외한 선수들은 코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몸을 풀었다. 야구는 근육질도 좋지만, 몸이 부드러운 선수들이 큰 위력을 발휘하는 종목이다. 투수는 순간적으로 140~150킬로미에터 육박하는 공을 던지고, 타자는 그 공을 받아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완시켰던 근육을 순식간에 바짝 긴장시켜야 한다. 몸 어느 한 곳이라도 성치 않으면 힘을 쓰다 문제가 생기기 마련. 선수들은 몸에 존재하는 모든 근육을 구석구석 자극시키려는 것처럼 몸을 비틀고 뛰었다. 지난해 두산의 선발투수로 활약한 이용찬도 그 안에 있었다. 지난 2월 팔꿈치 수술을 마치고 꾸준히 재활 중이다. 두산은 올해 선발투수들의 줄부상으로 꽤 고생을 했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지난해 10승을 거둔 이용찬의 복귀를 절실하게 기다린다. 마무리투수로 뛰며 신인왕을 받은 경험도 있어, 보직에도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일단 오늘 던져보고, 일요일에 라이브 피칭하는 걸 봐서 결정하자.” 재활 코치 문동환은 투수 출신이다. 은퇴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이용찬은 오늘 훈련 막바지에 두 번째 라이브 피칭을 할 예정이다. 상태가 좋으면 곧 2군 경기에 등판한 뒤, 1군 진입을 노린다. 워밍업이 끝나자 선수들이 일사분란하게 반대편 야구장으로 이동했다. 따로 훈련 중이던 박세혁은 이미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실망한 기색보단 씩씩한 기운으로 선수들을 맞았다. 훈련이 끝날 때까지, 박세혁은 주장처럼 소리치며 선수들을 격려하고 이끌었다. 수비진을 진두지휘하는 리더십은 좋은 포수의 필수적인 자질이다.

“펑고 합시다!” 선수들 중 한 명이 외치자, 곧 야수들이 제각각의 수비 위치에 섰다. 전형도 작전 및 수비 코치가 타석에 서서 펑고 배트를 들고 공을 외야로 날렸다. 빠른 땅볼, 플라이, 안타성 타구가 골고루 외야로 향했다. 외야수는 공을 받아 내야로 중계하고, 내야수는 다시 포수에게 던졌다. 포수는 그 공을 다시 2루로 뿌렸다. 실제 경기와 똑같은 상황의 시뮬레이션이다. 안타성 타구에 홈으로 뛰는 주자를 잡기 위해 외야에서 홈으로 공을 던지면, 타자는 그 찰나를 노려 2루까지 뛴다. 수비수들은 홈으로 뛰는 주자만 신경 쓰다 타자의 진루를 놓치기 쉽다.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똑같은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타자주자까지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2군 훈련은 거의 다 기본기 훈련이에요. 2군 선수들은 아무래도 1군 선수들보다 실수가 많다 보니, 훈련하다 위축되지 말라고 장난을 많이 쳐요. 어린 선수를 가르치는 노하우라면 노하우죠.” 전형도 코치의 훈련엔 리듬이 있었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주다가도 간혹 불호령을 내리며 선수들을 다잡았다. “투수 올라와! 긴장해라.” 투수들의 번트 수비 훈련이 곧바로 이어졌다. 야구에 절대로 실수해서 안 되는 몇 가지 일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번트 수비다. 원아웃 2루와 무사 1, 2루는 천지 차이다. 상대방이 아웃카운트 하나를 헌납하며 주자 진루를 택한 만큼,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훈련은 무리해서 2루로 향하는 주자를 잡기보다 번트를 댄 타자를 안전하게 아웃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김동주는 타격 훈련을 기다리며 덕아웃에서 배트를 돌리고 있었다. 국가대표 4번 타자, 두산의 ‘두목곰’으로 불리던 김동주에게 퓨처스 리그 훈련장은 어울리지 않는 곳인지도 모른다. “2군에 있었던 적이 거의 없어요. 선수들 보고 있으면 좀 ‘짠’하죠. 사실 여기서 끝나는 선수가 많아요. 선배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는 배트를 돌리는 틈틈이 후배들의 훈련 모습을 눈여겨 지켜봤다. 가장 가까이서 정확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선배, 또는 누군가의 롤 모델. 이만한 존재감의 선수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 어린 선수들에겐 큰 자극이 될 수 있다. 프로야구 규약에 따르면 한 구단은 1, 2군을 모두 합해 63명의 선수만 KBO에 정식 등록할 수 있다. 신고 선수, 옛날 말로는 연습생 제도를 통해 선수단 숫자를 좀 더 늘릴 수 있지만, 역시나 한계가 있다. 한 해에 10명 남짓한 선수가 신인으로 들어온다. 고졸 신인 선수가 선수 생활이 가능한 시기를 약 15년이라고 보면, 63명이란 숫자는 꽤 가혹하다. 매서운 가을볕이 사방에서 들이치는 오전의 훈련장. 훈련 중인 선수들의 얼굴은 이미 선크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희는 야수진이 너무 탄탄해서… 아직은 기대 안 해요. 타격 코치님이 손목 쓰는 걸 잡아주신 뒤로 (퓨쳐스 리그) 성적이 좀 올랐어요. 요즘엔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해요.” 김인태는 올해 두산이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한 신인 외야수다. 시즌 초엔 기대만큼의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후반기부터 성적을 가파르게 끌어올려 현재는 2할 8푼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제아무리 고등학교에서 날고 기던 선수라도 프로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80~90년대처럼 신인 선수가 곧바로 1군 경기에 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군에서 충분히 담금질을 거쳐야한다. 어떤 구단으로 가냐, 어떤 코치를 만나느냐가 선수의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전반기와 후반기 성적이 완전히 다른 김인태는 긍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김인태는 급히 마운드로 향했다. 본격적인 타격 훈련을 위한 배팅볼을 던져주기 위해서다. 타격망에 베테랑 김동주와 최주환이 들어섰다. 최주환은 올해 1군에서도 38경기에 나섰다. 김동주와 최주환의 타구는 치는 족족 쭉쭉 뻗어나갔다. 비거리의 놀라움보다 타구의 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빠르고 간결했다. 이런 속도와 강도라면 어느 코스라도 수비수 정면만 아니면 안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타격망 뒤에선 티배팅이 한창이었다. 코치와 감독이 타자 옆에서 공을 짧게 토스해주면 타자들은 일정한 스윙으로 공을 쳤다. 티배팅은 일반적인 타격 훈련에 비해 자세와 타이밍을 맞추는 데 더 중점을 둔다. “타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스윙을 해야 한다”는 지론에 대한 대답과 같은 훈련이다. 타자들은 스윙이 끝난 뒤 바로 배트를 곧추세우는 대신 잠시 그 자세를 유지했다. 흔히 ‘팔로스로’라고 말하는 동작이다. 치자마자 냅다 배트를 집어던지고 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몸의 힘을 온전히 공에 전달하기 위함이다. 외야부터 홈까지 공을 중계하던 수비 훈련과 마찬가지로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실제 경기에선 까먹기 쉬운 부분일 터다. 치고 나면 일단 신이 나서 달리고 싶을 테니까. 경기장 중심에서 타격 훈련이 벌어지는 것과 별개로, 경기장 구석구석에선 또 다른 종류의 훈련이 펼쳐지고 있었다. 투수들은 외야 파울라인 근처에서 투구 연습을 했고, 내야수들은 덕아웃 근처에서 코치가 쳐주는 땅볼을 받아 다시 코치에게 힘껏 송구했다. “재용아, 기껏 달려와서 던지면 뭐 하냐. 송구하는 포인트를 일정하게 만들어야지. 매번 다른 폼으로 공을 던지니까, 힘을 자신 있게 못 쓰는 거야.” 전형도 코치는 신고 선수 홍재용과 함께 있었다. 전형도 코치가 오늘 수비 훈련부터 쳐낸 공이 족히 수천 개는 될 듯했다. 탁구의 커트처럼 깎아 치는 공, 드라이브처럼 땅에 바운드된 후로 속도가 붙어 날아가는 공, 땅볼일지 낮은 코스의 직선타가 될지 판단이 쉽지 않은 공…. “개수는 네가 직접 정해. 눈치 보지 말고 할 만큼 해.”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맞고 싶은 대수를 정하라는 말만큼 무시무시한 선언.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 듯, 홍재용은 코치의 땅볼을 받고 또 받았다.

햇볕이 점점 머리 꼭대기로 올라설 무렵, 김인태를 비롯한 막내급 선수들이 넉가래를 들고 내야의 흙을 다졌다. 스파이크 자국이 선명하던 모래가 곧 평평해졌다. “볼 모으자!” 전형도 코치가 쳐낸 숫자만큼이나 곳곳에 흩어져 있을 공이 착착 바구니에 담겨 운동장 중앙으로 모였다. 이용찬의 라이브 피칭이 곧 시작될 모양이었다. 중앙에 모인 선수들에게 코치들이 내일 경기에 나설 멤버들을 발표했다. 2군 선수단이 원정경기를 떠날 땐 경기조와 잔류조를 나눈다. 시즌 막바지이고 1군 엔트리가 늘어난 상황인 만큼, 한 경기라도 더 출전하는 것이 선수들에겐 중요하다. 내일은 한화 2군과의 원정경기가 있다. 곧 경기용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용찬이 마운드에 섰다. 공은 박세혁이 받았다. 실제 마운드에서와 똑같이 이용찬이 포수의 사인을 받은 뒤 공을 뿌렸다. 변화구. “동환아, 안 떨어지는데.” 전상열 타격 코치가 문동환 코치에게 조용히 말했다. 타자의 입장과 투수의 입장에서 보는 투구는 좀 다를 것이고, 코치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한다. 라이브 피칭은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상황을 가정하고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다. 제한된 투구수 내에서 여러 타자를 상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했던 훈련 때와는 완전히 다른 공기가 흘렀다. 이용찬의 직구가 포수의 미트에 퍽퍽 꽂히는 소리까지 명확하게 들렸다. 오늘 이용찬은 마흔 개의 공을 던지기로 했다. 실제 경기라면 약 2이닝쯤 될 것이다. 공이 다소 높게 제구되는 것을 제외하면, 이용찬에겐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재활 코치 문동환은 유독 투구를 주의 깊게 살폈다. “지금 마흔 개야. 한 타자 더 할래” 이용찬이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평범한 땅볼. 이용찬의 라이브 피칭은 꽤 성공적이었다. 안타성 타구가 하나 나온 것을 제외하고, 다섯 타자를 범타 처리했다. “괜찮았던 것 같아요. 일단 팔꿈치 통증이 거의 없었어요.” 만족스러운 표정의 이용찬이 물을 바짝 뺀 얇은 얼음주머니를 팔에 둘둘 감았다. “체중 이동이 좀 아쉬웠지만, 하체에 힘만 실리면 곧 네가 생각하고 있는 공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다 이사오 투수 코치가 통역을 통해 이용찬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두산 베어스의 김진욱 감독에겐 이만한 희소식이 따로 없을 것이다.

1 강흠덕 코치의 지도에 따라 몸을 푸는 선수들. 2 덕아웃에서 수비 훈련을 지켜보는 김동주. 3 라이브 피칭을 앞두고 문동환 코치(좌)와 의견을 주고받는 이용찬(우). 4 포수 김응민(좌)에게 장난을 거는 박세혁(우) 5 타석으로 배팅볼을 던지는 김인태.
1 강흠덕 코치의 지도에 따라 몸을 푸는 선수들.
2 덕아웃에서 수비 훈련을 지켜보는 김동주.
3 라이브 피칭을 앞두고 문동환 코치(좌)와 의견을 주고받는 이용찬(우).
4 포수 김응민(좌)에게 장난을 거는 박세혁(우)
5 타석으로 배팅볼을 던지는 김인태.

 

1 강도 높은 수비 훈련을 마친 최주환(좌)과 홍재용(우). 2 잠시 덕아웃에서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 3 보조 훈련장에서 열린 투수조의 캐치볼 훈련.4 투수들의 번트 수비 훈련. 5 송일수 감독이 직접 올려주는 공을 치는 국해성. 6 공을 줍는 어린 선수들.
1 강도 높은 수비 훈련을 마친 최주환(좌)과 홍재용(우).
2 잠시 덕아웃에서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
3 보조 훈련장에서 열린 투수조의 캐치볼 훈련.
4 투수들의 번트 수비 훈련.
5 송일수 감독이 직접 올려주는 공을 치는 국해성.
6 공을 줍는 어린 선수들.

 

DAY 2

9월 7일, 고양 원더스 홈구장
“또 오셨네” 덕아웃에 앉아 있던 전형도 코치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경기는 오후 1시에 열리지만, 경기장엔 오전 10시부터 모든 선수와 코치들이 모여 있었다. 고양 원더스와의 원정경기. 독립야구단인 고양 원더스는 정식 퓨처스 리그 소속 구단이 아니라, 교류전이란 이름으로 경기를 치른다. 결과는 퓨처스 리그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다. 독립구단이라고 결코 호락호락한 팀은 아니다. 고양은 9월 6일까지 퓨처스 리그 팀들과 총 37경기를 치렀고, 21승 4무 12패를 기록했다. 승률로 따지면 북부리그 1위보다 더 좋은 성적이다. 오늘의 경기조로 뽑힌 스물다섯 명의 선수가 덕아웃 앞에 둥글게 모였다. 고양 원더스와의 경기에선 평소 기회를 자주 얻지 못했던 선수들이 주로 뛴다. 오늘 경기 전까지의 상대전적은 3승 2패. 이기면 3승 3패, 동률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다. “고양은 우리랑 하면 특히 필사적으로 하니까, 지지 말자.” 엄경훈 매니저가 선발 라인업을 발표했다. 어쩌면 출전하는 선수들에겐 자존심이 걸린 경기다. 고양 원더스 소속 선수들의 목표는 프로 구단에 입단하는 것이다. 두산의 2군 선수단은 이미 그 목표를 달성한 선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틀 전 훈련에서 열심히 땅볼 타구를 받은 홍재용은 선발 유격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지난해 9월까지 고양 원더스 선수였다. 고양이 배출한 다섯 번째 프로 선수. “원정 때마다 동료들이 놀려요. 너 원더스 다시 가야겠다, 그러면서. 요즘 초심을 잃었다는 얘길 많이 듣는데, 여기 오면 예전에 힘들게 운동했던 생각이 나서 정신이 번쩍 들죠.” 고양 원더스 홈페이지의 ‘명예의 전당’이란 코너엔 “KBO 소속 프로야구팀에 진출한 자랑스러운 원더스 출신 선수들입니다”란 설명과 함께 홍재용의 이름이 쓰여 있다. 김성근 감독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며 성장한 선수들임에 분명하다. “선수 입장에선 어려운 감독님이죠. 마지막에 팀 옮길 때 웃으시는 거 처음 봤어요. 감독님이 딱 그러셨어요. ‘다시 오지 마라’.” 홍재용은 아직 신고 선수지만, 두산 2군의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최근 꾸준히 경기에 출장하고 있다. 3루수가 주 포지션이지만 유격수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6년 차 투수 박민석은 오늘 경기가 올 시즌 첫 선발 등판이다. 이제까지는 주로 계투요원으로 경기에 나섰다. “코치님한테 직접 선발로 나가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음… 평소 하던 대로 던져야죠.” 2군에서도 이미 보직은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와 있다. 선발투수는 선발투수로, 마무리투수는 마무리투수로 키운다. 경기 중의 투수 운용도 마찬가지다. 선발투수만 정해져 있을 뿐, 상황에 따라 투수를 투입하는 1군 경기와 달리, 2군에선 경기 전 대략적인 등판 순서를 미리 정해놓는 경우가 많다. 물론 2군 경기도 승부가 걸린 경기인 만큼, 꼭 정해진 대로 되는 건 아니다. “1군에서 선수들의 육성에 대한 오더가 와요. 선발 요원으로 분류된 유창준은 완봉을 한 적도 있어요. 중요한 기록이 남는 거니까, 그럴 땐 2군에서도 선발이 쭉 던지기도 하죠.” 엄경훈 매니저의 설명이다. 유창준은 퓨처스 리그에서 등판한 17경기에서 6승 3패 평균자책점 2.71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둔 뒤, 현재는 1군에 올라가 있다. 경기 전 훈련은 시간이 짧은 만큼 훈련장에서보다 빡빡하게 진행됐다. 선수들은 모두 양말을 종아리까지 바짝 올려 신었다. ‘농군 패션’이라 불리며, 삭발처럼 야구선수들이 각오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다. 스트레칭이 끝나고 실제 그라운드에서 수비 훈련이 시작됐다. 유격수와 3루수가 번갈아가며 땅볼을 받았다. 1루에는 1루수 대신 동그란 과녁이 세로로 서 있었다. 사람의 팔이라면 조금은 빗나간 송구도 잡아줄 수 있을 테지만, 과녁은 그렇지 않다. 실제 경기보다 더욱 집중해서 공을 던져야 한다. 원래 포지션이 1루수인 김재환은 오늘 3루수로 출전한다. “돌파구를 찾는 거예요. 포지션이 1루수로만 한정돼서는 좋을 게 없잖아요. 제 3루 글러브가 너무 새 거라서 오늘은 좀 길이 잘 든 투수 글러브를 구해왔어요.” 두산 1군 내야수 중엔 유독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가 많다. 그것도 아주 잘. 1루수를 볼 수 있는 내야수로는 오재원, 최준석, 오재일이 있다. 도무지 틈이 안 보인다. 타격 재능이야 예전부터 인정받은 김재환이지만, 그의 말처럼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재환이는 포구 동작이 괜찮아요. 가능성이 있어요.” 전형도 수비 코치의 평가다.

타격 훈련을 마치고 덕아웃에서 옷을 갈아입던 최주환은 원래 오늘 경기에 나설 계획이 없었다. 출장이 예정된 선수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출전하게 됐다. “2군 경기는… 집중해도 뭔가 빈 느낌? 1군 타석에 서면요, 아드레날린이 막 솟아요. 야간경기 할 땐 투수 공이 터널에서 날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그게 진짜 좋아요.” 2군에서도 예의 악바리 같은 얼굴은 여전했다. 최주환의 1군 타율은 3할 2푼 1리. 다른 팀이라면 중심타자로도 손색이 없는 성적이다. 3할을 치고도 2군행을 통보받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제가 얼마 전에 궁금해서 KBO에 자료를 요청했어요. 보니까 2군에서 2천2백 타석 들어갔더라고요. 통산타율은 3할 3푼.” 1군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출전하는 선수들이 대략 일 년에 들어서는 타수가 400타수가량이다. 퓨처스 리그는 1군에 비해 경기 수가 적고 선수는 더 많아, 골고루 돌아가며 경기에 출전한다. 최주환은 8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타석에 들어섰다. 2군 생활이 지겹고 게으르다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 육성이 승부보다 중요한 게임에서, 굳이 승리를 위해 의욕이 떨어지는 선수를 출전시킬 감독은 드물다. 정오가 지나자 고양 선수들이 경기장 모래에 물을 뿌리고 선을 그렸다. 두산 선수들도 식사를 마치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경기장엔 원정팀을 위한 라커룸이 따로 없어, 덕아웃 옆의 비좁은 공간에 짐을 풀고 경기에 출전하기 위한 장비를 꺼냈다. 장내 아나운서가 경기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시작했다. 퓨처스 리그 경기, 게다가 교류전임에도 불구하고 관중이 꽤 많았다. 어림잡아 150명은 돼 보였다. 마실 나오듯 편한 복장으로 경기장을 찾은 일산 주민들, 고양의 열성 팬, 두산의 원정 팬들이 섞여 있었다. 고양 선수들이 1회 초 수비를 위해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다. 설렁설렁 걷는 선수는 없었다. 현 고양의 투수 코치 이상훈은 LG 시절 등판 지시를 받으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마운드로 뛰어 올라갔다. LG 팬들은 그런 이상훈의 모습을 유독 좋아했다. 고양 선수들의 모습이 꼭 그때의 이상훈 같았다.

고양의 선발투수는 외국인 투수 소리아노였다. 고양 원더스는 독립 야구단이지만, 무려 네 명의 외국인 선수가 있다. 전부 투수. 경기 수가 많지 않으니, 대부분의 퓨처스 리그 교류전에 외국인 선수가 선발 등판한다. 타자 입장에선 좀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2군에서 외국인 선수를 상대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2회까지는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했다. 3루 측 원정 덕아웃에서 외치는 소리가 본부석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응원단장을 필두로 격한 응원이 펼쳐지는 1군 경기장에선 할 수 없는 경험. 그라운드의 선수들에겐 더 잘 들릴 것이다. “투 쓰리! 민석아, 왔어 왔어!” “재환이형 오케이!” 선수들은 적극적으로 팀 동료들을 응원했다. 상대편에서 작전을 걸어 주자가 뛰면 “악!” 하고 소리를 질러 상황을 슬며시 알리기도 했다. 1군 경기엔 볼보이와 배트걸이 따로 있다. 그들은 파울타구와 타격 후 던져놓은 배트를 잽싸게 뛰어나와 정리한다. 고양과의 경기에선 김인태가 볼보이와 배트보이 노릇을 했다.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 막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김인태는 공을 잡으면 홈 팀인 고양 덕아웃 쪽으로 꼬박꼬박 전달했다.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닐 터, 양 팀 선수들은 공 하나도 신경 써서 간수하는 모습이었다. 3회부터 선발 박민석이 흔들렸다. 결국 3회 4점을 준 뒤 강판 당했다. 고양은 5회에도 3점을 더 냈다. 큰 덩치에서 나오는 박민석의 직구엔 분명히 힘이 있었다. 제구가 흔들려 안타보다 볼넷이 많은 게 문제였다. 잠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박민석은 5회 종료 후 포수 장승현을 찾아 투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자청해서 오른 첫 선발 마운드였다. “고양 타자들이 운이 좀 좋았던 것 같아요. 방망이 끝에 맞고, 비껴 맞고…. 민석이 형 공은 좋았어요.” 어렵게 말을 꺼내는 장승현의 아쉬운 표정도 투수 못지않았다.

“고양이 우리랑 하면 특히 필사적으로 한다”는 매니저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고양은 이날 여섯 점을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도 세 명의 외국인 투수를 더 투입했다. 마토스, 곤잘레스, 고바야시. 두산 타자들은 더 이상 점수를 내지 못했다.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고교 시절 김성근 감독이 “과감한 스윙이 좋다”고 이례적으로 평했던 스위치 타자 국해성이 2안타를 치고, 오랜만에 기회를 얻은 신고 선수 정수환이 타점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더 이상 쫓아가지 못했다. 7대1의 패배. 경기 전처럼 다시 선수들이 둥글게 모였다. “게임에 오랜만에 나오는 선수들은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돼. 오늘 상대 투수들의 공이 낮게 제구되는 바람에 타자들이 애를 먹은 것 같은데, 낮은 공이나 떨어지는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좀 더 높게 보고 치면 도움이 된다는 거 잊지 말고.” 송일수 감독은 오늘 경기가 승패와 관계없이 썩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선수들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 전형도 코치는 야수들을 다시 불러 세웠다. “자기한테 공이 안 갔다고 할 일이 없는 게 아냐. 타구가 날아가면 자기가 뭘 해야 될지를 찾아. 1군에서 그런 플레이 한 번 하면 2군이야. 심각하게 받아들어야 돼.” 실점상황의 내, 외야 중계 장면에 대한 얘기였다. “좌중간 타구가 나오면 우익수가 재빨리 2루로 커버를 가야 돼요. 안 그러면 2루로 뛰는 타자주자를 막기가 어려워요. 약속한 플레이가 잘 안 됐죠.” 지난 훈련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연습한 부분이었지만, 역시나 실제 경기에선 적용이 쉽지 않을 것이다. “다 맘에 안 들어요. 다. 큰 실수도 두 번 있었고요.” 최주환 역시 같은 실수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경기 후, 고양 원더스 감독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김성근 감독을 기다리는 고양 팬들이었다. 승장 김성근 감독은 일일이 나와 팬들과 사진을 찍고, 공에 사인을 해줬다. “음… 져서 아쉬웠지만, 재미있었어요. 친정 팀이기도 하고요.” 두 번의 다이빙 캐치로 추가실점을 막아낸 홍재용은 덕아웃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내년까지 고양과 두산의 경기는 볼 수 없다. 복수전을 할 때쯤, 홍재용은 1군에 갈 수 있을까? 색색의 형광 조끼를 입은, 고양 원더스 입단 테스트를 받기 위해 이곳을 찾은 선수들이 마지막으로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1 경기를 앞두고 다 함께 진행하는 강도 높은 스트레칭 훈련. 2 경기 전 선발 출장을 통보받은 유격수 홍재용(좌)과 1루수 국해성(우). 3 고양 원더스 출신으로 두산 베어스 2군에서 활약하고 있는 홍재용의 수비 훈련 모습. 4 3루수로 출장하며 새로운 포지션에 도전하는 김재환. 5 경기장에 라커룸이 따로 없어 덕아웃 옆에 세워놓은 선수들의 물품. 6 위아래로 매우 가깝게 붙어 있는 고양 원더스 홈구장의 원정 덕아웃과 관중석.
1 경기를 앞두고 다 함께 진행하는 강도 높은 스트레칭 훈련. 2 경기 전 선발 출장을 통보받은 유격수 홍재용(좌)과 1루수 국해성(우). 3 고양 원더스 출신으로 두산 베어스 2군에서 활약하고 있는 홍재용의 수비 훈련 모습. 4 3루수로 출장하며 새로운 포지션에 도전하는 김재환. 5 경기장에 라커룸이 따로 없어 덕아웃 옆에 세워놓은 선수들의 물품. 6 위아래로 매우 가깝게 붙어 있는 고양 원더스 홈구장의 원정 덕아웃과 관중석.

 

1 경기 전 훈련에서 날아오는 공을 맞은 투수 김강률. 2 타석에 들어선 신인 외야수 이우성.3 선발투수 박민석이 흔들리자 마운드로 올라선 고다 투수 코치.4 포수 장승현(좌)과 투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박민석(우).5 경기 후 수비 실수에 대해 질책하는 전형도 코치.
1 경기 전 훈련에서 날아오는 공을 맞은 투수 김강률.
2 타석에 들어선 신인 외야수 이우성.
3 선발투수 박민석이 흔들리자 마운드로 올라선 고다 투수 코치.
4 포수 장승현(좌)과 투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박민석(우).
5 경기 후 수비 실수에 대해 질책하는 전형도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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