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의 리얼리즘

김언의 시는 늘 정체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거나 손에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를 슬며시 빠져나가는 사물들의 그림자에 대해 말해왔다. ‘유령’은 등단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에 종종 등장하지만, 그의 시에 대한 선입견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큰 시어다. 그는 첫 시집부터 실체화할 수 없는 세계의 어떤 것에 대해 말해왔으나, 이 세계는 초자연적인 것도 초현실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시는 지나칠 정도로 개별적이며 집요하게 구체적인 세계의 기미에 집중한다. 중요한 지점은 이 대목이다. 흔히들 말하는 환상이란, 김언에게는 탈현실이 아니라 ‘리얼리티’다.

뒤집어 말해 세계의 ‘안전한’ 실체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확신이야말로 근거가 희박하다. 원인이 결과를 도출하고, 말과 사물이 서로를 비추며, 나와 타자가 소통하고, 궁극적으로는 선의지가 선한 세계를 낳는 유기적이고 조화로운 응답으로서의 세계는 가능한가. 그의 시가 분명히 거머쥘 수 없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뭔가에 대해 얘기해왔다면, 그리고 ‘유령’이나 ‘거품’ 같은 시어로 표현되었다면, 이 수상한 존재들의 내용은 사람들이 믿어왔던 세계의 실재성이 맥없이 무너지고 지워지는 경험과 관련될지도 모른다. 의심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관념이나 ‘사실들’의 세계가 ‘시뮬라크르’였으며, 가상적인 것이거나 우연적인 거라고 여겼던 게 오히려 리얼리티에 속한다는 기분 나쁜 확인 말이다. 우리의 기대를 좌절시키고 통념을 배반한다는 점에서,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를 수 있는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의 시는 가판대 위 ‘문화상품’들의 백가쟁명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김언은 그의 두 번째 시집 <소설을 쓰자>에서 ‘시에 대해 말하는 시’ ‘문학에 대한 문학론(소설론)’, 말하자면 전문용어로 ‘메타시’라는 야심찬 화법을 선보였다. 건조했지만, 성실하고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시 쓰기가 늘 “돋보기에 돋보기를 갖다 대면서 마침내 형체를 가진 정신(‘돋보기’)”을 보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움직인다>는 김언의 시적 궤적에 비춰 볼 때 자연스러우며 그가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집의 말미에 붙은 해설은 이 시집을 ‘사건의 해산과 무관(無關)의 시학’(이수명)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조금 달리 표현하면 존재의 ‘부조리’겠다. ‘환상적’ 화법과 ‘유령’이라는 이미지는 <소설을 쓰자>를 거치며, 언어에 대한 관심과 보다 논리적인 화법으로 이동했다. <모두가 움직인다> 에서는 두 세계에 대한 방법론적인 종합을 시도한다. 여전히 그는 세계에 대한 통념과 기대를 배반하는 “전혀 다른 새벽을 보여(‘유령 산책’)”주지만, 이 수상한 새벽의 배후에는 사태에 대한 시인의 정확한 직관과 지성적인 언어가 있다. 그의 시가 좀 더 생활로 침투함으로써 삶의 실감을 획득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이번 시집에서도 ‘소설론’과 비슷한 ‘미학’에 대해 강의하는 것으로 시적 언설을 시작한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중략)// 누군가를 방문하고 멱살을 잡는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풀지 않는다.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들고 있다.(‘미학’)” 이 시는 시인의 시론으로 읽어도 되고, 시적 화자(실은 우리 모두)의 일상의 양식으로도, 심지어는 연애담을 반영하는 시로 읽어도 무방하다. 시를 쓰는 일이든, 일상을 사는 일이든, 연애를 하든 그것은 “타인을 만들고” 그와 더불어 사는 일이다. 김언은 이 시집에서 타인의 존재 자체가 “적”이고 “위험”이라고 말한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놀” 수 없어 “어딘가에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적당한 간격”으로 인해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드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기억에는 한계가 있”으며, 사물들의 세계에는 “뒤엉킨 손과 팔다리”(‘정체성’)가 존재한다. “파란색과 파란색 사이에서” “아닌 곳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과/착각을 배신하며” “너는 배제 되고 있다.(‘청색은 내부를 향해 빛난다’)” “내가 아는 너와/ 네가 아는 나 사이에”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서로를 이해한다(‘혁명’)”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기하학적인 삶’)”

김언은 이 엇갈리고 지연되며 교착되는 오해의 국면들을 ‘미학’이라고도 말하고 ‘혁명’이라고도 말하며, 때론 ‘기하학적인 삶’이라고도 말한다. 어떻게 말하건 세계의 다양한 국면들에 역설과 부조리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가는 ‘기하학적 삶’을 염세주의적 시집이라고 볼 필요는 전혀 없다. 시집의 제목처럼 ‘모두가 움직인다’는 세계의 리얼리티에 속하는 일일 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상상이자 또 그대로의 사실이라면(‘반드시 시가 되어 있다’)” ‘모두가 정지해 있다’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말보다 ‘모두가 움직인다’는 말은 얼마나 생동하는 말인가. 시인에게 중요한 건 허망한 기대가 아니라 존재의 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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