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 부츠로부터

지금 구두 하나를 산다면 그건 당연히 첼시 부츠여야 한다.

1 CASUAL
둥글고 투박하다. 모양만으로는 날카롭거나 예민해 보이는 구석이 없어 두루 흔하게 사랑받을 타입이다. 안쪽 사이드 고어와 밑창에 카무플라주 장식을 넣었지만 남성적이지도 강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귀엽다. 바닥에 등산화처럼 굴곡 심한 요철이 많아서 빗길, 눈길, 울면서 뛰어가는 길, 어디서도 넘어질 걱정은 없겠다. 아주 허름하게 입은 날, 뭐라도 하나 뽐내고 싶을 때 신으면 기분이 확 나아진다. 전체 높이 12 cm, 굽 높이 3.5cm. 이름은 트리통 첼시 부츠. 35만8천원, 더 클랙슨.

2 SHARP
이럴 줄 알았다. 멀리서도 생 로랑인 줄 알 수밖에 없게 생겼다. 남자 물건을 이렇게 칼로 잘라낸 듯 인정머리 없게 만드는 건 에디 슬리먼뿐이니까. 하지만 너무 예쁘니 별 도리가 없다. 사는 수밖에. 곰 발바닥 같은 발이면 꿈도 못 꿀 잔인하도록 뾰족한 형태, 잡색이라고는 없는 검정, 심지어 바닥도 매끈하다. 기름 바른 바닥을 한치를 신고 걷는 듯 위태로울 테지만 그걸 견딜 수 없다면 생 로랑은 포기해야 한다. 전체 높이 15 cm, 굽 높이 2.5cm. 1백20만원, 생 로랑 파리.

3 STANDARD 평범하고 수수하다. 그래서 마음이 가고 믿음도 생긴다. 남자 첼시 부츠의 정답이라고 할 만한 모양인데다 요즘은 구하기 쉽지 않은 형태여서 더 반갑다. 뒤축에 금속 장식 말고는 소가죽을 대범하게 잘라 쓴 것과 단단하고 치밀해 보이는 옆면의 고무 고어로 끝. 밑창은 두툼하고 울퉁불퉁해서 신는 순간부터 마음이 놓인다. 무뚝뚝한 생김새에 비해 굽 높이가 좀 있는 것도 오묘한 매력. 전체 높이 14 cm, 굽 높이 4cm.
가격 미정, 루이 비통.

4 EASY
결이 고운 스웨이드와 발꿈치 부분의 페블 장식이 눈에 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토즈 제품이다. 토즈의 남자 구두는 대체로 범용성이 높고 오래 신을 수 있으며 고유한 색이 있는데, 특히 스웨이드 소재는 신을수록 깊고 풍부한 색깔이 나온다. 크고 넉넉한 형태에 편하고 실용적인 고무창. 따뜻한 갈색 코듀로이 팬츠나 회색 플란넬 팬츠에 신으면 끝내주겠다. 전체 높이 12 cm, 굽 높이 3cm. 89만원, 토즈.

5 UNIQUE
우영미답게 과감한 색깔 배색이 돋보인다. 갈색과 검정은 따로따로는 익숙하지만 함께는 잘 안 섞는 색이다. 난이도가 높고 명도, 채도 조금씩만 삐끗하면 맙소사, 소리가 절로 나오는 위험한 배합이라서. 그런데 이 부츠는 보다시피 멋지다. 적당히 둥근 앞 코와 캡토 형태, 날씬하지만 얌체 같아 보이진 않는 선, 좋은 건 많지만 그중 제일은 품위 있는 집안 안방의 가구 같은 갈색이다. 전체 높이 16 cm, 굽 높이 2cm. 55만원, 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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