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사랑을 얻고 나는 쓰네

2013.10.18이충걸

이제 손글씨는 달팽이 혹은 나무늘보의 왕국에 위탁 되었다. 타인에게 사랑을 증명하거나 관심을 표하기 위해 종이에 뭔가 적는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졌다. 문자는 향내 나는 편지지보다 더 강한 퍼포먼스의 냄새를 풍긴다.

사랑을 얻고 나는 쓰네
어렸을 때 쓰던 공책은 네모난 빈칸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동그란 손의 면적에 비해 조금 긴 연필을 꼭 쥐곤 손과 손목, 팔과 어깨, 때론 몸 전체로 글씨를 썼다. 허리를 굽히고 작은 혀를 빼문 채. 손목 터널 증후군을 앓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린 손목을 이따금 펄럭 이며 선생님이 칠판에 적은 글씨를 따라 써봐도 매번 빨래집게처럼 뾰족하게 칸을 벗어났다. ㄱ은 쓰기 쉬웠지만 ㅎ은 어려웠다. ㅂ의 양쪽 뿔은 빈 공간으로 내려가는 동안 자꾸 더듬거렸다. 사선을 긋는 것도 애매했지만 직선은 더 구불구불 웃겨졌다. 하지만 다 쓰고 나면 종이 위의 외다리 거미 같던 글씨는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글씨는 신비로운 리듬을 따라 성간을 이동했다.
나는 곧 ㅎ의 작은 점이 검은 깨가 아닌 다이아몬드처럼 보이게 쓸 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처음 공책에 쓰던 글씨는 삐뚤빼뚤 다들 비슷했지만 얼마 뒤 누구의 글씨도 서로 닮지 않았다.
지금 노트를 펼치면 새벽 3시에 편지를 쓰던 소년기처럼 괜히 막막해진다. 백색 종이의 무한한 진공. 텅 빈 공간을 채우기 전 의 어떤 배회 상태…. 코르크 마개로 된 잉크병을 열고 끝이 갈라진 펜촉에 잉크를 묻힌다. 두껍거나, 가장자리가 헤졌거나, 작은 섬유조직이거나, 가죽 테두리를 두른 압지거나, 형광빛 A4지거나, 벼룩 시장에서 산 우브 페이퍼거나, 부드러운 모조 양피지거나, 구겨진 모조지거나, 표면은 조용해도 종이는 언제나 감응한다.
그리고, 오래돼 클립이 흔들리는 만년필이 손 안에 아늑하게 자리 잡는 경계, 볼펜 꼭지를 누를 때 전해지는 작은 스프링의 긴장, 심이 닳아 뭉툭해진 연필 끝의 이상한 친밀함…. 종이는 주의 깊게 깔아놓은 카펫처럼 오직 잉크만을 흡수한다. 글씨는 종이를 감동시키며 전 존재를 다해 그 안으로 스며든다. 수메르인들이 젖은 진흙판에 그들의 설형문자를 남기듯이, 로마 벽돌공들이 권위 있는 알파벳 대문자를 다듬듯이, 고려 사람들이 세월보다 단단한 목판에 팔만대장경을 새기듯이.
하지만 이제 손글씨는 달팽이 혹은 나무늘보의 왕국에 위탁 되었다. 타인에게 사랑을 증명하거나 관심을 표하기 위해 종이에 뭔가 적는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졌다. 문자는 향내 나는 편지지보다 더 강한 퍼포먼스의 냄새를 풍긴다. 갈망하는 상대에게 받은 이메일 주소는 손수건보다 심장을 뛰게 만든다. 타이핑을 하고 복사, 자르기, 붙여넣기의 신통한 기술로 불붙은 마음을 전하는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손글씨가 이별을 고할 때 가장 비극적이란 걸 진작에 알아버렸기 때문이지….
손글씨는 어린 정조의 편지처럼 그야말로 레어 아이템이 될 것이다. 구텐베르크도 틀림없이 활자 자체보다 부드럽게 기름칠 된 인쇄기를 더 자랑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신용카드에 사인 하거나 입국서류에 몇 줄 채우는 정도? 그런데 나선형 암호인지 하트 심벌인지, 기상천외한 사인을 볼 때마다 주변에 웬 놈의 기호학자가 이렇게 많아졌나 싶은 건, 인쇄된 인사말에 사인만 딸랑 갈긴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으면 그마저도 보내지 않는 주제에 눈썹부터 싸늘해진 건 무슨 심사인가. 근데 손글씨가 그렇게도 더디고 지루한가? 글쎄,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5천 배 더 지루하더만!
어떤 때, 아파트 수위 아저씨가 붙여놓은 “엘리베이터에선 조용히”라는 글씨, “교회 다녀 올게”라고 적힌 채 식탁에 놓인 엄마의 메모, “삼촌, 그때 설날 때 왜 나 돈 안 줬어? 백원이라도 주지” 하는 여덟 살 조카애의 입 나온 편지, 이빨 나간 식칼처럼 어슷어슷 함부로 쓴 시골 식당 간판은 인쇄된 어떤 활자보다 예쁘다. 글씨는 분명히 균형과 관심, 개인성과 미감을 말해주는 패션의 범주에 속 하므로. 어쩌면 그런 방심한 글씨들의 ‘모던함’이 활자체의 원천이 된 건 아닐까.
누구는 글씨와 창의력은 연관돼 있다고 믿는다. 필적학은 글씨가 성격을 보여준다고 우긴다. 글자의 삐침 하나가 탐욕과 과도 한 상상력을 뜻한다고. 앞으로 경사진 글씨는 야망을, 뒤로 기운 글씨는 부끄러움을 나타낸다고. 헤밍웨이의 필체는 폭포처럼 장엄 했으나 유머가 적은 성격을 동시에 말해주었다지.(친필 원고의 가치는 삭제와 교정에 있는 게 아니라, 필시 그의 성격과 그 작품이 쓰여지던 날들의 분위기를 전하는 단서에 있을 것이다.)
사실 손글씨의 진짜 매력은 당혹스럽게 만드는 능력, 범위가 넓은 모호함에 있다. 나에게 또렷한 글자도 다른 사람 눈에는 로제타석처럼 신비로워 보인다. 그때, 아버지의 코트 안주머니에서 까만 낙서가 빽빽한 포켓용 수첩을 발견했을 때, 램프를 문질러 그 사람을 바로 눈앞으로 불러내는 손글씨의 마법을 느꼈다. 밀봉한 채 잊었다가 한참 지나 발견한 편지처럼. 눈 가까이 가져와도 뜻 모를 패턴 같던 아버지의 어떤 글씨는 망막 위에 어른거리다가 곧 강물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고개 숙여 글씨를 쓰던 아버지의 유약한 등과 옹이진 오른손 중지 첫 마디를 떠올릴 수 있었다. 글씨는 그가 하듯이 숨을 쉬기 때문에. 글씨는 영혼을 종이로 옮겨주기 때문에. 글씨는 빈칸에 그 몸을 담기 때문에.

    에디터
    글 / 이충걸(GQ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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