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2013.10.25정우영

올해로 여든. 이판근은 재즈 교육자, 재즈 이론가, 재즈 작곡가, 재즈 편곡가로 살았다. 80년을 빼곡히 채운 단 하나의 단어가 있었다.

작곡은 어떤 악기로 하세요?
피아노 가지고 또동동 하죠. 근데 작곡은 무시로 해버려. 나중에 가서 이 부분이 악기로 어떻게 들리는지 쳐보고 넘어가는 거지, 처음부터 하는 게 아니라. 버스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만들어요.

기록은요?
메모를 하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멜로디를 잡아놓으면 그 다음에 생각나겠지 하지만 도망가버려요. 바로 메모해놔야 해요. 도미솔미솔라가 있으면 도 쓰고 한 박자, 레 해가지고 반 박자, 적어놓는다고 .

연주자가 일종의 작곡가인 재즈의 편곡은 어떤 식일지 궁금합니다.
편 곡이라는 것은 편곡법대로 하니까. 재즈 편곡이라든가, 클래식 편곡이라든가 공식대로 해요. 왜 공식이냐면, 선배들이 멋있게 한 걸 갖다가 이론으로 만든 거거든. 천재들은 그냥 떠올라서 만들었는데 나중에 정리를 하니까 공식이 되는 거지. 재즈가 좀 자유로워. 클래식이랑 달라가지고 자유롭게 편곡을 할 수 있으니까. 음도 많이 쓸 수 있고. 꼭 조용하고 예쁜 소리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 시끄러운 소리를 쓸수록 좋다, 이런 것도 있고 .

음을 많이 쓸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클래식에서 못 쓰는 반음. 4도에서 도, 파 이런건 너무 잘 어울려서 안 쓴다고. 근데 거기다가 반음을 딱 끼우면 재즈 소리가 나는 거야. 근데 그걸 너무 어렵게 배워. 간단한 원리인데. 그걸 모르면 천 개를 다 외워야 한다고.

편곡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뻐야 돼. 아름다워야 돼. 그럼 화음은 따라 나오는 거야. 편곡에서 대선율이 있잖아. 멜로디가 하나 있는데 다른 멜로디를 집어넣는다든가, 비어 있는 자리를 멜로디가 메운다든가. 이런 게 적절히 필요하거든. 멜로디가 비어 있으면 죽은 자리가 되는 거야. 데스, 데스. 멜로디가 긴 박자로 이어져도 적절하게 잡아줘야 하거든. 살아 있는 음을 집어내야 해. 그 이전에 클래식이고 팝이고 재즈고 예쁘게 해가지고 사람들을 뿅 가게 만들어야 해.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재즈에는 주제부, 발전부, 주제부의 헐거운 틀이 있습니다. 편곡 작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연주자에게 주문을 하나요?
주제부만 정리해서 주지. 악보에 내가 편곡을 집어넣으면 거기에 연주자가 채울 거는 비워놓고, 채워 넣어라 이 기호만 넣고. 나머지는 연주자가 애드리브로 하는 거야. 편곡 하는 사람이 애드리브까지 간섭하면 애드리브를 못해요. 야, 너 왜 이 곡이랑 저 곡이랑 애드리브가 똑같아, 이런 소리나 하는 거지.

연주를 아예 그만두고 작곡가이자 편곡가, 교육자로 돌아선 이유는 뭐였나요?
사실 작곡, 편곡도 아니고 가르치는 데 집중했어. 옛날에는 선생님이 나밖에 없었거든. 지금은 선생이 바글바글하지만, 90년대 전까지는 재즈를 건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재즈로 나오는 결과물도 없고, 무관심이랑 비슷했다고. 그래서 내 교훈은, 연주는 내 것만 해서는 하루 종일 해도 모자란다고, 근데 악기 다 갖다놓고 트럼본, 트럼펫, 기타, 노래까지 가르쳐야 하니까 내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잖아. 내가 할 일은 가르치는 거다, 한 거지.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한 덕목은 뭐였나요?
아이디어. 내가 가르쳐주는 그것만 따먹지 말고, 배우는 동안에 뭔가 떠오르면 그걸 살려내라 이거지. 그게 자기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벌써 생각한 걸 수도 있어. 예를 들어 어떤 코드에 애드리브를 한다고 봐. 내가3 1th에 싣고 딴 사람이 13th에 싣지 않았으면 내 아이디어가 되는 거고, 딴 사람들도 그러면 평범한 아이디어인 거야. 멋있게 들어가는 방법은 공부하면 이미 다 나와 있어. 그래서 자기만의 아이디어가 너무 힘들어. 하지만 일단은 남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좋으니깐 배운 걸로 그치지 말고 그걸 미끼로 탁 다른 걸 해보라는 거야.

보컬리스트에게 강조하는 건 좀 달랐을 것 같습니다.
가곡은 이탈리아 말로 하듯이, 재즈는 영어로 해. 그래서 영어 발음이 그대로 나와야 한다 이거지. 발음을 먼저 흉내 내라고 해. 근데 그대로 흉내 내라고 하면 잘 못해. 그걸 흉내 내야 이야, 참 재즈 같다 이러지 .

박학기, 인순이, 심수봉, 윤수일처럼 재즈 보컬리스트가 아닌 분도 많이 가르치셨는데요.
보컬리스트에게는 꼭 피아노를 치게 해. 노래하는 애들은 음악 공부를 굉장히 싫어하거든. 왜냐하면 자기 목소리에 자신이 있으니까, 나는 공부 안 해도 목소리로 먹고산다, 내 몫은 내가 차려 먹을 거다, 이런 식이야. 다 좋은데, 자기가 노래를 하는 그 범위의 코드는 쳐야 돼. 노래 중간에 반음을 살짝 내는 게 금방 되는 게 아니라고.

이번에 재발매되는 <째즈로 들어본 민요, 가요, 팝송>의 아티스트 이름을 이판근으로 달 거라고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이판근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는 달리 들을 수 있는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가요 작업이 들어오긴 했는데, 돈 때문에 음악 하는 거였으면 안 했다고. 음악의 어떤 아름다움을 살린다가 목표였어. 돈은 다른 방법으로 번다고 생각했지. 1세대 수제자가 있고, 2세대 수제자가 있고, 3세대 수제자가 있고. 걔들이 연결돼서 이끌잖아. 내가 죽어도 권위가 이어지도록 만들긴 했어요. 내 곡이 남아 있는 게 너무 없대서 좀 염려스럽지만…. 제 잘하는 애들이 많이 생겼으니까, 더 뛰어난 애들이 나올 가능성도 있고. 내 음악을 연주하는데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돼가는 것처럼 보여서 희망을 갖고 있다고.

2011년에 후배들이 모여 <이판근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헌정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앨범 제목에 이름이 들어간 앨범.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기대를 많이 했지. 많이 했지만 힘들 거란 생각은 했어요. 요즘 애들이 민요의 감각을 모르거든. ‘따라라라 디다’가 악센트가 들어가면서 끊어지는데, 그게 아니라 ‘따라라라디다’ 하면서 흘러야 돼.

<이판근 프로젝트>에서 연주자들이 가장 까다로웠을 부분 같긴 합니다.
브라질에서 민속 음악을 재즈화해서 보사노바로 발전시켰듯이 국악을 재즈의 이디엄으로 풀어내는 게 내 음악이니까. 폴리리듬이 여전히 안 되더라고. 내가 한국적인 재즈를 작곡하는 전략은 폴리리듬을 이용해서 음악에 문외한인 한국 사람이 들어도 아, 방금 지나간 게 한국 리듬 아니야, 하도록 이끌어내는 거거든. 그 리듬으로 작곡한 게 30년 전인데, 그때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직도 해결이 안 됐어. 앞으로 50년은 더 가야 해결될 수 있다고 봐. 그러니까 기대는 했지만, 결국 못하더라고. 베이스가 ‘두가둠 두가둠’ 하는데 정확하질 않고, 자꾸 빨라진다든가 해, 그게 정확해야 리듬이 나오거든. 내 아이디어를 너희 아이디어랑 섞어서 맘대로 하랬는데, 자기들 아이디어를 풀어 쓴 그런 부분은 잘했더라고.

직접 진두지휘했던 <째즈로 들어본 민요, 가요, 팝송>은 어떻게 자평하세요?
그땐 더 안 됐지. 하지만 김수열이 자연스럽게 잘했고, 또 손수길이 참 잘했지. 손수길하고 김수열에 대한 기대로 그 판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리고 ‘My aFvorite Thing’.

‘나의 모든 것’이란 제목으로 들어가 있죠.
앞에 피아노가 ‘뚠다둔 뚠다둔’ 하는데, 반 박자를 쪼개야 ‘뚠다’ 이렇게 된다고, 그대로 하면 클래식이고. 도입부에서 그런 피아노가 나와야 하는데 수길이가 아주 제대로 쳤지. 그때 수길이가 아마 열아홉 살이었을 거야. 우리가 맥코이 타이너라고 불렀다고. 수열이는 재즈를 위해 살았어. 20대 때부터 연습을 엄청나게 했어요. 수열이는 스물한 살인가에 럭키 톰슨이 한 ‘My Funny Valentine’을 그대로 했다니까.

사이키델릭이나 록의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는 음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렉트릭 베이스를 쓰신 것도 그렇고요.
그때가 고고 시대, 록 음악의 시대야. 5인조, 4인조 팀들. 일렉트릭 베이스를 쓰는 사람들밖에 없기도 했고, 이 음반의 리듬은 일렉트릭 베이스가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았어. 왜냐하면 콘트라베이스는 포용성이 있잖아요. 일렉트릭 베이스는 포용성이 없고, 드라이하다고. 그리고 그 시대 뮤지션들이 재즈를 하긴 했지만, 음악을 여러 가지 했거든. 베이스의 이수영은 조커스라는 유명한 4인조 밴드에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봉고인지 콩가인지 모르겠지만, 꾸준히 등장합니다. 재즈에서 기본이 되는 편성이 아닌지라 어떤 연유였는지 궁금했습니다.
봉고는 아니고 콩가를 썼을 거예요. 드럼 치는 최세진 씨가 그걸 잘해서, 해보라고 한 거지

인터뷰의 반은 싣지못했다. 사건 혹은편집상의 문제는 없었다.이판근은 음 이름과 화음,혹은 스캣, 악보 기호로대부분을 설명했다. 글로옮길 수 없는 게대부분이었다. 이판근은대화를 나눌 때도 악보를그렸다.

인터뷰의 반은 싣지
못했다. 사건 혹은
편집상의 문제는 없었다.
이판근은 음 이름과 화음,
혹은 스캣, 악보 기호로
대부분을 설명했다. 글로
옮길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판근은
대화를 나눌 때도 악보를
그렸다.

‘나의 모든 것’의 기가 막힌 클라이맥스는 편곡에 의한 건가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나요?
재즈는 편곡 상 클라이맥스를 넣기도 하고, 연주자가 클라이맥스를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는 편곡자가 엔딩 부분을 따로 조금 만든다고. 엔딩으로 연결할 때 클라이맥스를 유도하는 순간이 많지. 수열이랑 수길이가 그 곡에서 참 잘했지만, 그 외에는 좀 실패했다고 생각했어. ‘빈 바다’는 수길이가 엄청 잘 쳤고. 코드가 바뀌어도 그 위에 멜로디가 코드를 안 따라가. 터치도 굉장히 좋았어. 다시 들어보면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은 그래. 근데 지난번에 음악 평론가 황덕호 선생을 만나니까 이야, 소름이 끼쳤다고 그러대. 그래서 다시 들어봐야겠다…. 내가 판을 오래전에 잃어버렸어. 그러고 들을 기회가 없었어요.

CD로는 나오지도 않았고, 약 25년 만의 재발매니까요. 사람들이 이 앨범의 ‘아리랑’을 듣는다면 꽤 충격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가락을 재즈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셨는데 후배들 중에서도 많은 음악가가 이른바 ‘국악 퓨전’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요즘 보면 좋은 아이디어는 많던데, 또 국악을 팝 식으로 대중화시키려고 애쓰고. 근데 애드립을 시원하고 멋있게 해내질 못해. 이런 게 있어. 내가 미8군에서 음악 할 땐 AFKN에서 나오는 새로운 팝이건 재즈건 전부 다 땄거든? 내가 따는 건 또 귀신같이 땄으니까, 오늘 나오면 내일 바로 연주했어. 꼭 재즈 아니래도 미국 음악이라는 것은, 재즈하면 재즈 되고 팝 하면 팝 되는 거라고. 누가 불러도 자기 필링대로 부르면 되는데, 우리나라는 그걸 흉내만 내니까 변화가 없어. 나는 팝도 재즈로 바꿔서 연주하고 그랬어.

외국 노랫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은, 재즈가 토착화되면서 좀 더 대중적이 되길 의도하신 건가요?
재즈가 인기 있으려면 재즈 노래가 사람들한테 알려져야 하니까. 사람들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국 가사로 바꿔서 노래하라는 거지. 내가 주도적으로 계속해온 작업은 아니야. 영어로 하면 안 퍼진다, 한국말로 해봐라….

권했다고만 하기엔 좀 많던데요? 250곡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재즈곡이어도 팝 가수는 팝으로 불러. 프랭크 시나트라도 토니 베넷도 재즈 가수가 아니라 팝 가수잖아. 일본이나 미국은 벌써 그 단계에 들어갔어. 근데 우리나라는 재즈 하면 벽이 있다고. ‘아이언 커튼’이 쳐져있어. 근데 요즘 보면 우리나라 대중음악도 따라갈 것 같아. 싸이가 빌보드에 오를거라고 꿈에라도 생각했겠어? 내 옆에서 벌어진 일인 거야. 우리나라에서 듣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이나 의식이 달라졌어. 재즈 하는 사람들도. 커튼 딱 쳐놓고, 재즈 하는 사람만 모여라, 그건 한때야. 대중의 파워가 점점 더 세질 거야. 말기 자본주의가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재즈를 배경 음악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긴 합니다만.
아니지, 대중음악하고는 게임이 안 되지. 우리나라 재즈 뮤지션은 아직도 갈라져있어. 야, 니들하고 우리는 달라, 우리는 대중음악이 아니야, 귀족 음악이야.

재즈가 대중음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대중음악으로 대접받는 건 돈벌이가 된다는 거거든. 대중들이 산다 이거지. 근데 음악을 팔아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감각이 없어. 우리나라 재즈 커뮤니티 내에서 먹고살아야겠다, 이런 식으로 견디는 거지. 근데 일본이든 미국이든 제작자는 돈을 벌려고 애를 쓴다고.

그만큼 투자할 생각이 드는 뮤지션이 없는 건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저널리스트가 필요해. 우리나라는 저널리스트가 없다고. 재즈 전문지에 실리는 글들을 보면 옛날보단 많이 나아졌어. 근데 이슈화를 못 시켜. <째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 가요, 팝송>도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가 있었으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묻혔겠어?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음반인데.

이판근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그 앨범이 나왔을 때였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학생이 최고로 많았을 때지. 내가 해외여행을 정말 많이 했거든. 돌이켜보면 해외여행으로 인생의 반은 보낸 거 같아. 내 제자들이 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음악 하고, 또 선생님 하고있어 지금. 내가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때가 190년부터 2001년 사이거든. 대단한 작품을 남긴 것도 없었고, 학생들 가르쳤을 때가 전성기지. 근데 학생이 너무 많아서 레슨을 충실히 못한 10년이기도 해. 그때 충실히 못한 게 이후에 영향을 미치더라고. 다 지나고 나서 아, 실패했구나, 선생으로서 생명이 끝났구나, 했어.

그렇게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얻은 건 뭔가요?
내가 공부시킨 애들이 다 유학 가 있잖아? 걔들 보러 유럽에 한 번, 미국에 한 번씩 간다고. 근데 어떤 애는 공부를 거꾸로 하고 있어. 영어는 부정으로 물어보면 부정으로 답해야 하는데, 부정이면서 긍정으로 답해온 거야. ‘Didn’t you?’ 그러면 ‘No’라고 해야지 ‘Yes’라고 해. 음악은 코드 하나로 수준이 바뀌는 예민한 분야인데, 버클리 갔다 왔다는 녀석들이 그런 실수를 하고 있더라고.

검사 도장 찍으러 다니신 거군요.
한 번씩 돌아다니면, 거기서 공부 잘한 것, 못한 것 다 표가 나더라고. 한 번 가면 애들 모여라, 해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고 그랬지. 그런 식으로 제자 만나면서 돌아다닌 거야. 굉장히 큰 소득이 있었어. 해외여행 다니면서 회고록 쓸 결심을 했어. 내 회고록인 동시에 음악 교과서가 될 수 있는 회고록을 써야겠다. 그게 여행의 효과지.

하지만 정작 이판근과 제자들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촌의 건물은 헐려서 없어졌습니다.
개인 기념관을 만들려고 했어. 3년 동안 싸웠는데, 안 되더라고. 보상금 얼마준다 그것만 말하고, 다른 데서 의논해보라고. 결국 헐리고 다른 장소에 기념관을 내려고 했는데 적당한 장소가 없어. 지금 보류 상태야. 정치하는 녀석들뿐만 아니라 관료제에 사로잡힌 공무원들, 돌대가리야. 머리가 안 돌아가. 황덕호 선생이 참 애써줬는데 안타깝지.

이판근의 과거를 기념하는 박물관 말고 앞으로 염두에 두신 작업이 있나요?
시조에 음을 붙여서 재즈화했거든. 좋은 가수 만나서 불러보게 하고 싶어요. 100곡 정도 되니까, 우리나라의 이름난 시조는 거의 다 만들었다고 보면 돼. 그리고 지금까지 ‘아리랑’ ‘밀양아리랑’ ‘한오백년’…. 많이 했는데, 민요를 20곡 정도는 더 재즈로 작업해야지.

작업량이 너무 많지 않을까요?
70~80곡이 보컬 빼고 녹음은 돼 있어. 근데 여기에서 무리수를 둘 것이냐, 좀 쉬워지는 쪽으로 할 것이냐 하는 고민이 있지. 우리 시조가 3444의 음수율로 가다가 마지막에 5가 나오잖아요. 그걸 음악으로 표현하려면 없는 형식을 고안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한번 보여주고 싶다, 하는 게 마지막 희망이지.

이미 동갑내기이신 강대관 선생은 은퇴를 선언하고 현역에서 물러났습니다.
강대관은 이빨도 흔들리고 기운이 없었어. 그럼 연주가 안 되잖아. 그래서 은퇴한 경우야. 이동기나 김수열은 임플란트 해넣고 버티고 있어요. 강대관은 집안 문제도 있었다고. 그리고 원래 이봉조 씨도 재즈 하다가 방송국에 들어간 건데, 강대관도 들어갔다가 눈치 보면서 재즈 연습했다고. 방송국에는 재즈 필요 없으니까, 연습도 열심히 못하고 점점 자신도 없어지고.

한국 재즈 1세대의 현재를 다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에서도 어렴풋하게나마 읽히는 내용입니다. 한국 재즈 1세대에 대한 헌정인 그 작품은 어떻게 보셨나요?
글쎄, 강대관이 소주 한잔 하면서 나팔 불고 이런 게 제대로 멋있게 나와야 하는데 멋있게 안 나왔어. <브라보 재즈 라이프> 앨범은 웅산이가 잘했지. 남무성 감독이 없는 돈에 뛰어다니면서 참 열심히 준비했는데, 음악은 보름인가 만에 만든다고 그렇게 내서 아쉬움이 커요. 모르는 사람들이 멋있다고 그러긴 해. 한국 재즈 1세대에 그런 분위기가 있는가 보죠. 음악 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할지 모르지만, 보통 관객들은 좋아하니까 거기에 만족하는 거지.

한국 재즈 1세대보다도 윗 연배이신데, 은퇴를 고려해보신 적은 없나요?
나이 먹은 사람은 나이를 생각하면 안 돼요. 요새는 일곱 살 빼라던데? 신중년 시대래. 예순다섯 넘은 사람들은 자기 나이에서 일곱 살을 빼야 한대. 확실히 옛날 할아버지는 아니야. 내가 42일까지 <째즈로 들어본 민요, 가요, 팝송>에 실린 ‘아리랑’ 악보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에디터
    정우영
    포토그래퍼
    안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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