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새로울 게 없는 새로운 시대의 징후

HD-스마트폰-SNS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현실이 주는 현실감의 저하다.



HD-스마트폰-SNS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현실이 주는 현실감의 저하다. 1970년대 후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인간 감각의 수용 한계를 넘어서는 지구촌 스펙터클의 이미지’는, 9·11 테러를 기점으로 하강 국면에 접어들더니, 이제 유효성을 잃고 옛것이 됐다. 여기서 ‘인간 감각의 수용 한계를 넘어서는 지구촌 스펙터클의 이미지’란,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던 동시대 시각 정보들이 뇌 속에서 채 해석되지 못한 채 뭉치고 엉긴 결과, 혹은 그것을 다시 파노라마/만화경적으로 재구성한 것 이었다. 하나하나의 이미지를 접착해 스펙터클을 만드는 주요한 힘 가운데 하나는, 개개인이 무차별적 시각 정보에 노출될 때 느끼던 “대체 어디서 지금 저런 일이?” 라는 당혹감과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HD-스마트폰-SNS 시대에 접어들자, 거의 모든 시각 정보는 지리적 위치 감각(구글 지도로 재매개 된 장소성)을 획득했다. “아, 저거 거기서 벌어지는 일이구나”라는 감각이 “대체 어디서 지금 저런 일이?”라는 감각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지구촌 스펙터클의 이미지’가 붕괴된 현재, 이미지/비이미지를 다루는 현대 미술가와 현대 디자이너는 현실 인식을 새로이 수정하는 데서 재출발을 시도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죽기를 거부하는) 20세기가 이제 거의 모든 인간 활동의 규준이 되는, 수정 불가능한 의사-자율성의 데이터베이스’가 됐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고화질 영상과 정보로 끊임없이 우리 앞에 되살아오는 20세기는, 21세기의 인간을 옥죄는 템플릿이며, 일찌감치 (1980년대의 어느 시점에) 미래를 상실한 현재는, 이제 생생한 과거에 제자리를 잠식당할 위기에 처했다. 분명히 말한다. 2013년 오늘, 인간을 압도하는 힘은 ‘새로운 것the new이 아닌 ‘오래된 것the old’에 있다. 이 새로운 ‘오래된 것’은, 전통이 될 수 없는, 낡기를 거부하는, 20세기의 기록-데이터베이스로서, 스킨처럼 납작해진 21세기의 시공간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두고두고 지배하게 될 터. 로버트 휴즈가 20세기 문화 예술의 핵심을 “새로운 것의 충격”(과 인간의 문화적/예술적 대응)으로 설명했다면, 이제 막 본격화한 21세기의 기대 감소 시대는 “(낡기를 거부하는) 오래된 것의 충격”(과 인간의 문화적 예술적 (무)대응)으로 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적으로 뵈지 않는 적, 죽일 수 없는 적만큼 해롭고 두려운 존재는 없다.
21세기의 시공간이 문화적 불모지로 변하는 현상은, 미디어 환경 탓도 있지만, ‘품질이 낮아진 인간’ 탓이기도 하다. 24시간 내내 소비자-시민의 자세를 버리지 않는 그런 인간들 말이다. 나는 그런 의사-인간들이 일군 오늘을, 좀비-모더니즘의 시대로 규정한다. 무감각한 소비자-좀비들은 마케팅의 이름으로 (인터넷 지도 서비스로 재매개된) 시공을 지배하지만, 사회 전역에서 넘쳐나는 좀비-물건들이 그들의 넋을 빼앗는다. 좀비-물건이란, 소실점(조형과 유행과 라이프스타일의 차원에서 추구된 유토피아적 이상형)을 지녔던 20세기의 물건(제품)을 틈새 마케팅의 방법으로 (단가에 맞춰 어설프게) 혼성적으로 모사하는, (인간의 의도가 작용했지만 그 의도도 좀비의 것이라 부재하는 바와 다름없는) 메타-의태-상품들을 뜻한다.
좀비-모더니즘의 특성을 달리 표현해볼 수도 있다. “집 비스무레한 데서 살며, 음식 비스무레한 걸 먹고, 옷 비스무레한 걸 걸친 채, 책 비스무레한 걸 읽으며, 학교 비스무레한 곳에서 공부하고, 사람 비스무레한 존재들과 교류 비스무레한 걸 시도하는, 청년 비스무레한 젊은이가, 직업 비스무레한 걸 구하는 데 도전 비스무레한 어려움을 겪는, 시대 비스무레한 오늘의 풍요 비스무레한 빈곤.” 당신은 여전히 인간인가? 당신의 친구 가운데 좀비와 인간의 비율은 어찌 되는가?
그렇다면, 한국에서 기대 감소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양상은 잘 모르겠지만, 아파트 시대의 종말과 함께 찾아올 것만은 명약관화하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신간 <아파트 게임>은 한국사회가 아파트의 구매와 아파트의 공간 경험과 그를 통해 실현한 차익으로 어떻게 중산층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었는지, 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욕망의 동역학이 형성됐는지를 ‘비평적 픽션’의 형태로 제시하고 분석한다. 한국인의 주제 파악을 위한 문제작이다.
그런데 중산층이 사라지면, 한국사회는 어찌 될까? 중산층이 사라지면 대중문화는 허약 체질이 되고 말 터, 한국대중문화산업의 주역들은, 소위 한류, K-팝으로 호명되는 수출형 콘텐츠의 생산/유통에 더욱 집착하게 될까? 그러나, 정작 수출용 콘텐츠의 생산자 가운데 K-팝과 한류 드라마의 성공 요인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유럽의 경우 K-팝의 주요 소비층을 보면, 다문화 가정의 청소년들이 주축이다. 즉, 자국의 대중문화가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콘텐츠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또 주류 문화의 스타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인종으로서 정서적 거부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문화 상징을 반복 구사하기 때문에, 이국적 현대미를 갖췄으되 정서적 구조는 다문화 가정의 배경 문화권과 유사한 K-팝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K-팝이 대단한 환상을 제공하지는 못하더라도,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기는 한다. (K-팝과 사극에 몰입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 시청자들에 관해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작년 이맘때, 문화평론가 존 시브룩이 K-팝을 취재한 결과를 ‘팩토리 걸스’란 글로 정리해 <뉴요커>에 기고했고, 꽤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그 또한 K-팝의 핵심이 되는 어떤 특징은 간과했다. 지구상의 청소년 절대 다수가 느끼는 끔찍한 소외감과 K-팝의 ‘등신미(병신미)’가 어떻게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인류학자처럼 발로 뛰어 뻔한 결론을 도출해냄으로써 백인 중산층 독자에게 인도감을 선사하는 능력’으로 유명한 필자니까, 별로 놀랍진 않았다만.
여기서 ‘등신미(병신미)’란, 어떤 갭모에(문화적 요소의 편차/낙차에서 느낄 수 있는 모에)의 조화로운 불균형에서 야기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단순한 예를 들어, <우주전함 야마토>의 주제가를 완벽한 바로크 메탈로 연주해냈을 때, 누구나 ‘등신미’를 느낄 수 있다. (비고: ‘싹트다/타오르다’라는 뜻의 신어인 ‘모에萌え’는, 1차적으로 ‘애호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볼 때 가슴에 솟는 흐뭇한 감정’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제 ‘모에’는 단순한 취향이나 성적 페티시 이상의 뜻이 됐다.) 그런데 K-팝의 어떤 요소와 – 안무일 수도 있고, 의상일 수도 있고, 가사일 수도 있다 – 그에 대비되는 높은 퀄리티의 프로덕션은, 아주 손쉽게 ‘등신미’를 발생시키는 구도가 된다. 예를 들어,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신곡 ‘에브리바디’의 안무는(안무가는 토니 테스타) 정녕 이 분야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태엽장치와 스위치를 등에 달고 있는 기계 인형이 기본인데다 의상은 미학화한 게이 S&M을 연상케 하는 백색 제복이고, 모든 멤버가 체중을 크게 감량해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간 서양인 평자들이 K-팝의 남자 아이돌을 “게이 같다”고 비아냥거린 걸 생각하자면, 이는 무슨 정면 승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2013년 오늘, 미국식 ‘등신미’의 대표 주자였던 레이디 가가는 제프 쿤스를 새롭게 끌어들여 ‘망하는’ 이미지의 대표가 됐다. 레이디 가가의 새 앨범 <아트팝> 커버에서 몰락의 장식으로 전락한 제프 쿤스의 모습을 보면, 망하는 건 순식간이라는 교훈을 실감하게 된다. 가가의 비주류-이미지-파트너였던 테렌스 고는 어디로 도망쳤을꼬? 또한 ‘망하는’ 이야기라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 <바람이 분다>를 빼놓을 수 없다. 3·11 도호쿠 대지진 이후 두드러진 역사 리셋의 욕망도 문제고, 전쟁 시기 일본 사회의 모순을 낭만으로 가려버린 것도 문제지만,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라는 인물을 통해 제시하는 긍정적 남성성의 이미지/캐릭터는 더 문제다. 과묵하고 세태에 휘둘리지 않고 줏대 있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조직에서 현명하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타입, 또한 죽어가는 여자에게 헌신하면서, 짧게 끝날 꿈이지만 아낌없이 사랑하는 타입의 남자. 멋있기는 한데, 21세기에 재현 가능한 남성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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