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의 맨 얼굴

한정식, 식어서 뻣뻣해지고 삐덕삐덕 겉이 마른 음식이 과연 맛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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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방송국의 음식 프로그램에서 전라남도 어느 지방의 한정식을 다루게 되었다며 인터뷰를 따간 적이 있다. 장장 2시간이 넘게 녹화를 했다. 그러나 그 방송에 내 인터뷰는 단 1초도 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방송을 보며 속으로 흐뭇했다. 한정식을 차려놓고 물산이 풍부한 남도의 자연이니 아낌없이 음식을 차려내는 남도 사람의 넉넉한 품성이니 하며 너스레를 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정식의 상은 짧게 스치듯 지나가고 옹기니 뭐니 하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제작진이 일종의 타협을 한 것인데, 한정식의 실상을 말하는 내 인터뷰를 내보내자니 시청자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렇다고 거짓으로 꾸며 방송한다는 것도 바르지 않을 듯하여 아예 언급하지 않는 전략을 쓴 것이다.

한정식 하면 다들 한국음식을 대표하는 상차림으로 여긴다. 상견례나 귀한 접대를 하는 자리는 으레 한정식이 깔려야 하고 외국인이 와도 한정식 정도는 먹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한정식은 어느 집이나 그 차림이 비슷하다. 구절판, 신선로, 생선회, 대하찜, 갈비찜, 불고기, 잡채, 삼합, 굴비 등이 한 상 가득 나오거나 이를 코스화하여 차례로 낸다. 여기에 지역에 따라 특색 있는 젓갈이며 김치, 나물 따위를 곁들인다. 한정식으로 차리는 여러음식은 낱낱으로 또 다른 상차림에 올릴 수 있다. 한정식에만 있는 음식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한정식에는 어떤 음식을 올려야 한다는 원칙 같은 것도 없다. 구절판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며 신선로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식이다. 이 무원칙한 한정식에 그럼에도 딱 하나의 원칙이 존재한다. 절대 다 먹지 못하게 차린다는 것이다. 물론 강호동이나 정준하 급의 사람은 제외다. 절대 다 먹지 못하게 차린다는 한정식 차림의 원칙은 대체 언제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한반도에서 음식을 넉넉하게 먹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조선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근대화 초기까지 내내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넉넉하게 살았을 것이고 그러니 잔칫날에는 그렇게 차리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 양반들이 잔치를 벌였을 때의 기록화 같은 것이 전해오는데 그때 그들은 외상을 받았다. 한 사람씩 개다리소반을 꿰차고 앉아 음식을 먹었다. 혼례나 회갑에서의 교자상은? 이건 일종의 전시용 상이지 그 잔치의 주인공이 그 음식을 다 먹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왕은? 평소에 12첩의 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제법 꼼꼼하게 조선 왕의 밥상을 연구한 이에 따르면 7첩 정도가 기본이었다고 한다. 조선이 유교 국가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유교에서는 음식을 탐하는 일은 악덕이다. 그러니 조선에서는 다 먹지 못하게 차리는 상 따위는 없었다.

한반도에 절대 다 먹지 못하게 차리는 상이 등장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기생집에서 이런 상을 차렸다. 기생집을 요릿집이라고도 했는데, 음식보다는 기생과의 음주가무가 주목적이었으니 기생집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최초의 기생집은 명월관이다. 구한말 궁내부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던 안순환이란 자가 열었다. 그는 궁궐의 대소사에 차려내는 음식 따위를 관장하는 관리였다. 그 관리 대상에 궁중 기생도 있었던 모양이다.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궁중 기생들을 모아다 문을 연 것이 명월관이다. 안순환은 명월관의 음식을 두고 조선 궁중음식이라 했다. 조선 왕족의 음식을 담당하던 숙수들이 명월관의 주방에 들어갔을 것이니 그리 주장 한 것이지 조선의 왕이 먹던 일상의 음식을 낸다는 것은 아니었다.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먹는 음식으로 내기에는 조선 왕의 끼니는 부족한 면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조선 궁중의 연회 음식을 중심으로 내었을 것이다. 1883년 조일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조선과 일본의 관리들이 궁중에서 연회를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이 연회 상 위에 칼과 포크, 와인잔 등이 놓여 있어 그때 이미 조선 왕가의 연회 음식이 ‘세계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월관도 그랬을 것이다.

안순환은 그 당시 이미 영업 중이던 일본식과 중국식 기생집을 보고 명월관을 발상했다. 조선이 개항하면서 일본과 중국의 파견 관리와 상인들이 경성과 제물포 등지에 진을 쳤고 그들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기생집도 생겼는데, 그들 식으로 따라한 것이다. 명월관 이후 조선식 기생집은 크게 번창했다. 1932년 12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다. “조흔 의미로 사교장도 되지마는 유야랑(遊冶郞 ; 주색잡기에 빠진 사람)의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행락의 전당인 료리집의 수효는 조선료리집 이 팔백구십 호, 일본집이 칠백육십일 호, 중국료리집이 일백사십이 호 도합 일천칠백구십삼 호이다.”

기생집은 자신이 자신의 돈으로 음식을 먹자고 가는 데가 아니다. 누군가를 접대하기 위해 간다. 남자들의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이때 접대의 원칙이 있는데,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나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허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인배로 보여야 하는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고가의 술을 주문하고 이 음식 저 음식 추가로 내오라 하며 기생은 물론 주방의 사람들까지 불러 팁을 날려야 한다. 이때 차려진 음식을 다 먹겠다고 상에다 코를 박고 있으면 접대는 성공할 수 없다. 옆에 앉은 기생이 입에 넣어주는 음식 정도만 받아 삼켜야 한다. 절대 다 먹지 못하게 차리는 음식상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기생집은 번창했다. 남자들의 접대 공간이었으니 온갖 음식에 술과 여자가 따랐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강력한 경쟁업체가 등장한다. 룸살롱이라는 접대 공간이다. 룸살롱은 요리 없이 음주가무만으로 남자들을 유혹했고, 이 새로운 방식에 남자들은 환호했다. 많은 기생집이 문을 닫았으나 일부 기생집은 유흥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음식점으로 탈바꿈해 그 생명을 유지했다. 한때 기생집이었던 그 음식점의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두고 한정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버릇이 크게 번진 것도 그 즈음부터다.

한정식은 한자로 ‘韓定食’이다. 한국식 정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조선에도 대한제국에도 없었다. 조선정식이라는 말도 없었다. 정식은 일본 여관에서 내는 음식의 한 종류에서 비롯한 것이다. 손님이 특별히 주문하는 일품의 요리 말고, 여관에서 알아서 그날그날 식재료의 사정에 따라 차려내는 ‘세트 메뉴’가 정식이었다. 이 정식에다 ‘한’이라 붙인 것은 일러봐야 1950년대의 일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정식이라는 의미가 확장돼 돈가스 정식, 덴푸라정식 같은 식으로 쓰인다.(우리에게도 이런 식의 활용이 물론 있다.) 한정식처럼, 화정식和定食도 있다. 풀자면 ‘일본의 정식’이다. 한국처럼 한 상 가득 차리는 것이 아니다. 밥과 된장국에 채소절임, 그리고 생선구이 하나 정도 오르고 끝이다. 가장 소박하달 수 있는 상 차림이 화정식이다.

한정식이란 단어가 어디에서 왔건, 음식물 쓰레기를 양산하든 말든, 기생집에서의 전통도 우리의 전통으로 삼자 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말이다, 적어도 음식이 맛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많은 음식을 한꺼번에 차리려면 당연히 미리 해놓을 수 밖에 없는데, 식어서 뻣뻣해지고 삐덕삐덕 겉이 마른 음식이 과연 맛있는가? 맥도날드 햄버거보다 더 빨리 나오는 한 상의 음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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