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GQ 어워즈<3>

신중히 생각하고 완전히 멋대로 뽑았다.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로따로 올해의 수상자와 수상작과 수상한 것들을 가려냈다. 갈채와 꽃다발과 위로와 유감과 냉소와 분노 또한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로따로 전하고자 한다.



올해의 형님 / 박성웅
박성웅이 <신세계>에서 연기한 이중구는 세 명의 주인공, 강 과장(최민식), 정청(황정민), 이자성(이정재)를 제외하곤 제일 비중이 큰 인물이다. 분량은 많지만, 자칫 관객의 애정과는 멀어질 수 있는 위험부담이 큰 캐릭터. 박훈정 감독의 말처럼, 계속 주류의 삶을 살았던 이중구이기에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느와르 영화에선 이런 캐릭터가 노선을 정확하게 정해야 한다. 내면 연기라는 변명 아래,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다간 주인공들과의 갈등 구조가 틀어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성웅은 다행히 흔들리기보단 한 번 더 독해지는 쪽을 택했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라는 대사에서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힘을 뺀 채 고개를 뒤로 젖힌다. 이중구도 불쌍하다는 듯한 흔들리는 눈빛, 떨리는 입술 따윈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중구를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이중구가 가장 멋있는 순간이다. 부모도 다른 사람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남자가 이중구를 보며 자신이 ‘믿고 따르고 싶은 리더’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올해의 소년 / 서영주
영화 <뫼비우스>에서 서영주가 어깨에 칼을 꽂고 두려움과 설렘이 섞인 채 눈을 치켜 뜨던 장면을 기억한다. 영화 <범죄소년>에서 서영주가 아픈 할아버지의 몸을 닦다가 콧김처럼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기억한다. 정말 열여섯일까, 열여섯에 이런 장면이 괜찮을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배우 서영주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채웠다. “어려 보이고 싶지 않아요. 어른들이 날 어리게 봐서 괜히 기분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서영주는 소년이었지만 여느 소년보다 배포가 컸다. “<뫼비우스> 찍고 며칠간 좀 끙끙 앓다가, 금방 이겨냈어요. 오래 힘들어하면 부모님이 아파하실 게 뻔하니까요.” 소년이었지만 여느 소년보다 더 여렸다. “배우가 평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또래 역할만 하는 건 연기에 제한이 있잖아요.” 소년이었지만 여느 소년보다 더 어른이었다. 그는 요즘 <황금무지개>에서 어린 ‘김만원’으로 출연하고 있다. 교복을 입고 동생들을 챙기는 소년 가장 역할이다. 세고 강한 역할들로 터질 듯 팽팽해진 마음에 휴식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교복이 이렇게 지루해 보이는 소년이라니….

올해의 추태 / ‘먹방’
시작은 하정우의 입 속으로 접혀 들어가는 김 한 장이었지만, 끝은 그저 아무 데서나 아무 음식을 마구 입 안으로 집어넣는 모든 장면으로 흐르고 말았다. 연예인들이 뭘 먹는 장면이라면 아침 정보 프로그램에서부터 저녁 연예 프로그램까지 늘상 있어 왔던 일인데, 무언가 대단한 일인 양 포장해 클릭을 유도하기에는 신조어 ‘먹방’만 한 것이 없었던 걸까? 추태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정글에 가서도 먹방, 촬영 현장 스태프들의 국밥 먹방, 부부의 입술 먹방, 물만 마셔도 먹방…. 컴퓨터 앞에 앉아 배달 음식을 마구 먹어치우는 1인 방송국에서 시작된 ‘먹는 방송’의 기원도 썩 아름답진 않았지만, 그 말에 들러붙은 이슈 생산자들의 의도도 추접스럽긴 마찬가지다.

올해의 앵커 / 손석희
알아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데, 어떤 뉴스에서는 “비 오는 날 소시지빵 소비 늘어” 같은 꼭지를 봤다. 허탈하게 웃을 힘조차 없을 때,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에 거는 기대는 환절기처럼 당연한 거였다. MBC는 그가 30년 동안 일한 회사였다. 그는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나름대로 고민했던 것을 풀어줄 수 있는 자그마한 여지라도 남겨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제가 믿는 정론의 저널리즘을 제 의지로 실천해보고 훗날 좋은 평가를 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 jTBC <뉴스9>는 그가 꿈꾸던 뉴스 룸이었을까? 직접 말한 바 없지만, “모든 뉴스를 다 알 필요는 없지만 더 알아야 할 뉴스는 있다”는 말로부터의 믿음은 있다. 앵커와 인터뷰이가 마주 보고 하는 인터뷰는 질문과 대답의 정석 같았다. 질문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다. 물으면 답해야 한다. 따라서 일종의 다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묻지 않는 언론이 너무 많았다. 모종의 이유로, 싸움을 피하는 것이다. 손석희는 거기서 묻는다. 그 순간에 대한 기다림만으로도 그가 앉아 있는 자리의 가치는 있다. 진행 2개월 만에 시청률 3퍼센트 돌파를 앞두고 있다는 건 이제 대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야말로 앵커의 힘이고 역할 아닐까? 뉴스에 엔딩곡이 있다는 사실도 새롭고, 그걸 그가 직접 선곡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이제, 손석희의 작별 인사를 다시 듣고 싶지는 않다. 첫 방송에서 그는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손석희입니다. 매일 밤 다시 뉴스를 전해드리게 됐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매일 밤 ‘뉴스’를 볼 수 있게 됐다. 바른 시작이었다.

올해의 사장님 / 윤종신
작년의 사장님은 양현석이었다. <힐링캠프>에서 보여준 우직함과 에서의 아량 덕분이었다. 윤종신은 작년의 사장님과 정반대에 서 있다. 그는 올해도 변함없이 <라디오스타>에서 깐죽거렸다. 야심차게 시작한 <화신>은 서둘러 종영됐으며, 심사위원으로 복귀한 <슈퍼스타K 5>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예능에서의 윤종신만 보면 그랬다. 하지만 프로듀서이자 사장님인 윤종신은 달랐다. <월간 윤종신>을 똑같이 월간으로 내는 와중에 김예림을 진부하지 않게 데뷔시켰으며, 박지윤이라는 오래된 이름을 신선하게 재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퓨어킴 같은 인디 음악가, 김연우처럼 확고한 음악적 지분을 가진 가수, 아나운서 박지윤처럼 음악가가 아닌 인물까지 공격적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매우 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음악보다는 일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이 성장세가 괜찮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올해의 건축 / 선벽원
뭘 부수지 않고, 벽돌 한 장이라도 지키려는 노력은 언제나 반갑다. 건물은 사람보다 오래 살기에, 하나의 건물을 보존한다는 건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선벽원은 말 그대로 ‘착한 벽돌집’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정한 선한 마음처럼 공간도 참 참하다. 선유도공원이나, 어린이대공원의 꿈마루처럼 예전부터 있던 건물을 섬세하게 다시 매만졌다. 1937년, 과거 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인 경성공립농업학교 시기에 만든 경농관과 박물관, 자작나무를 보강했다. 낮은 건물이라 웅장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내로 들어서면 생각이 달라진다. 천장의 구조물을 드러내 목재 트러스가 그대로 보인다. 그 모습은 공룡 안에 들어가 거대한 갈비뼈를 보는 기분이다. 선벽원의 총지휘를 맡은 이충기 교수는 최대한 이 트러스들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단지 뭘 새로 짓지 않고 지키려는 신념만으로 올해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지어졌다.

올해의 공포 / 제2롯데월드 공사장
잠실의 풍경은 어느 날부터 공포가 됐다. 제2롯데월드의 경우 123층, 높이가 555미터,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높이다. 게다가 서울 한복판, 그것도 가장 붐비는 장소에 마천루를 만들고 있으니 작은 사고라도 있다면 큰 인명 피해는 불 보듯 뻔하다. 당연히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 하지만 제2롯데월드는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빠르면 일을 그르치는 법, 최신 공법이라고 들여 온 이동식 거푸집은 결국 사고를 만들어 여섯 명이 크게 다치거나 죽었다. 또한 근처 석촌호수는 올여름부터 악취가 심해지고, 물높이가 1미터(15만 톤)나 줄었다. 전후 관계가 확실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언론에서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시공사는 한강의 물을 퍼다 석촌호수를 채우겠다고 발표했다. 심지어 최근엔 삼성동 아이파크에 헬리콥터가 충돌했다. 걱정은 더욱 커진다. 더 큰 걱정은 다른 데 있다. 애널리스트 앤드루 로런스가 주장하는 ‘마천루의 저주’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고층 빌딩을 건축하고 나면 경제 위기가 찾아온다는 이야기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대만의 타이페이 101,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를 짓고 각 나라의 경제는 휘청거렸다. 주식시장의 격언. “어느 나라가 가장 높은 건물을 짓겠다고 하면, 빨리 그 나라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와라.” 과연 서울 시민은 제2롯데월드의 공포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올해의 빨리감기 / 박태환
이미 세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후였다. 자유형 400미터, 계영 400미터와 자유형 200미터. 10월 22일, 제94회 전국체전 남자 수영 800미터 계영은 박태환의 네 번째 우승이었다. 마지막 주자로 출전, 박태환이 출발하던 순간의 팀 순위는 5위였다. 50미터 트랙을 네 번 가로지르는 동안 앞서 있던 네 명을 차례로 앞질렀다. 스트로크 하나하나 주먹을 날리는 것 같은 투지, 짐작할 수 있는 근육의 강도와 정신력, 다른 모든 레인은 일시 정지된 것 같은 비현실적인 속도…. 그가 수영하던 트랙 아래에만 빨리 감기 버튼이 있는 것 같았다.

올해의 되감기 / 전두환
1997년 4월. 그에게 선고된 추징금은 2천2백5억원이었다. 1997년 확정 당시 예금 1백7억, 각종 채권 등 3백12억 9천만원이 추징된 이후로는 피차 주고받을 의지가 희박한 비현실적인 액수였다. 이후 검찰의 핑퐁게임은 온갖 숫자와 수 싸움, 보이지도 않는 ‘높은 곳’의 정치였다. 그러다 1천6백72억을 완납하겠다는 지금의 약속이라니. 그 위로 겹치는 건 잔액 29만원의 통장, “왜 나한테만 그래”, “당해보지도 않고” 같은 말들. 그 자신, 그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감당하게 될 추징금은 모두 국고로 환수될 예정이다. 모든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더라도, 뭔가 바로잡히고 있는 일인 건 맞다. 하지만 누군가 갖고 있는 그 정도의 재산이라니, 좀 허탈해지기도 했다. 또, 그런다고 내 주머니가 두둑해질 일은 없다는 것이, 그가 한 약속보다 더 정확한 사실 같았다. 옳지만 여전히 씁쓸한 일, 옳은 일을 바로 하는 데 15년도 넘게 걸렸다는 냉소는 사라지지도 않는 채.



올해의 래퍼 / 이센스
분노가 엇박을 부르는 건지도 모른다. 화난 상태에서 박자를 정확히 탈 수 있나? ‘개뼈다귀’는 2008년 이센스가 발표한 디스곡이다. 오케이본이란 래퍼가 대상이었다. 화났다고 화난 티를 내진 않았다. 참을 만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느긋한 목소리로 박자를 세게 밀고 당겼다. 분노는 목소리가 아니라 리듬에 있었다. 이센스의 압도적인 승리. 이번 상대는 전 소속사의 설립자 다이나믹 듀오였다. 그곳에서 이센스는 슈프림팀으로 활동했다. 낄낄대며 넘길 법했던 오케이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계약과 회사가 걸려 있는, 리듬에만 담기엔 넘치는 분노였다. 디스곡 ‘You Can’t Control Me’의 가사엔 언어 유희와 조롱 대신 숫자, 증언, 실명이 있었다. “이거 듣고 나면 대답해, 개코. 뒤로 빼지 마, 병사 대 병사로 전투.” 승리를 확신하는 래퍼의 자신만만한 출사표. 이 노래를 들은 개코는 반격을 했고, 그것은 가장 힙합의 방식에 가까운 대응이었다. 이센스의 디스곡으로 힙합 신은 활기를 얻었다. 슈프림팀 활동 내내 채로 거른 것같이 성기던 이센스의 랩에도 차진 끈기가 다시 생겼다.

올해의 1번 트랙 / 장필순 ‘눈부신 세상’
의 1번 트랙 ‘헬리콥터’는 더 이상 포크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전자음부터 치고 나왔다. 그렇게 낯선 1번 트랙이 새로운 의지를 말하는 용도로 쓰인다면, 올해 나온 의 ‘눈부신 세상’은 완전히 반대의 지점에 있다. 두 음반 사이엔 11년의 세월, 서울과 제주도만큼의 거리가 있다. ‘눈부신 세상’은 조동진의 노래다. 이번엔 조동익이 편곡했다. 장필순이 부르는 노래를 조동익이 매만지는 건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한편, 유난히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하물며 그녀의 음악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조동진의 이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내가 태어나 사랑한 곳.” 좋은 1번 트랙은 어떤 식으로든 듣는 사람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눈부신 세상’은 장필순이 자기 음악의 시작이자 밑바탕을 비로소 고백하는, 그래서 더욱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1번 트랙이다.

올해의 마지막 트랙 / 조월 ‘ 악연’
조월의 <깨끗하게, 맑게>에 수록된 아홉 트랙을 한 곡 한 곡 차례로 듣다가, 문득 이 트랙을 모두 동시에 재생하고 싶다는 충동에 빠졌다. 소리가 겹치고 겹쳐서 만들어낸 것이 결국 ‘공간’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해보며, 계이름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멜로디를 듣는다. 기타는 기타를 연주하고 비브라폰은 비브라폰을 연주하고 조월은 조월의 목소리를 연주하는 소리의 전체. 그러다 마지막 트랙 ‘악연’이 흐를 때쯤엔 ‘최후’라는 말이 육박해온다. 그건 안심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제 끝났으니까.(비밀을 말하자면, 5분 5초짜리 히든 트랙이 하나 더 있다.)

올해의 록밴드 / 서교그룹사운드
누군가 로큰롤을 정의했다. “남자가 기타를 들었으면 이런 소리 한번은 내봐야지!” 서교그룹사운드의 ‘불야성’을 들으면서였다. 듣자마자 대번 뼈가 딱딱해지는 소리 혹은 기운. 올해 서교그룹사운드는 11곡이 들어 있는 앨범을 발표했고, 많은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걸 중단했다. 누군가 그 사정을 두고 “록은 그런 거지” 한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만큼 서교그룹사운드가 보여준 것이 한 떨기 순정에 가까운 것이라서다. 2008년에 자체 제작해 발매한 앨범에서 ‘불야성’을, 그리고 올해 비트볼에서 발매된 앨범에서 ‘야행성’을 골라 이어 듣는다. ‘야행성’ 전주에서 냉큼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기타 소리를 듣는 순간, 뭐가 어떻게 될는지는 신도 모를 것이다. 그 또한 “ROCK”.

올해의 뉴 웨이브 / 썸데프 & 그레이
뉴웨이브란 이름을 달면 무슨 일이든 해도 괜찮다. 4인조 펑크 밴드에 신시사이저를 집어넣어도 좋고, 자연의 소리를 퍼커션이라고 우겨도 그럴듯하다. 올해는 뉴웨이브란 이름을 비트 신으로 치환해도 좋겠다. 뉴웨이브처럼 비트 신의 정의는 좀 모호하다. LA를 중심으로 퍼진, 실험적인 비트를 연구하는 음악집단 정도라면 정확한 의미일까? 썸데프의 와 그레이의 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비트 신의 한 자리를 만들었다. 차지했다는 표현보단 그게 좀 더 알맞다. 누군가는 우주를, 누군가는 원초적 영감을, 누군가는 그저 소리의 조화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 신이 생겼다.

올해의 D.I.Y / 언리미티드 에디션
기획자 이로는 2013년 가을 이틀에 걸쳐 열린 책과 잡지, 음반, 문구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붙여 이런 말을 했다. “책이 죽었다는 건 책이 멸종됐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아직 있지만 이미 없는 것으로 보는 상태”로 고쳐 생각하게 됐다고.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지속해야 하는 스스로의 당위로 들렸다. 숱한 독립 잡지 제작자들의 시장과 강연, 공연, 아티스트 토크, 다큐멘터리 상영 등 빼곡한 프로그램이 준비됐고, 장안의 눈 밝다고 자처할 법한 사람들이 다 모였다. 하지만 올해의 이벤트가 아닌 올해의 DIY 부문을 안긴다. 독립적인 행동과 노력 지지하고 싶은 뜻이 크지만, 편중된 향유층만 고수하느냐, 공론화된 장으로 나아갈 것이냐에 따른 선택이 필요할 것처럼 보여서다.

올해의 클럽 / 케이크샵잌
‘테이스티 소울’에선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알앤비를 들을 수 있었다. ‘스워브 & 린’은 점점 가까워지는 힙합과 전자음악 사이의 거리를 좀 더 좁혔다. ‘스트릭틀리 바이닐’은 레코드로만 플레이하는 디제이들의 무대였다. ‘더 프로듀서스’는 디제이가 아닌 프로듀서들의 신곡 경연장이었다. 올해 케이크샵에서 열린 파티들의 면면이다. 케이크샵에선 매 주말 다른 파티가 열렸다. 부지런히 기획하고 새 얼굴을 찾았다. 확고한 음악색이 있느냐가 좋은 클럽을 고르는 보편적 기준이었다면, 케이크샵은 당장 오늘 어떤 음악이 나올까에 대한 궁금증을 동력으로 서울의 밤을 밝혔다.

올해의 인테리어 / 턴테이블
레코드가 돌아왔다. 하지만 유행은 재봉틀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 그 자체로 성급한 판단을 내릴 순 없다. 어떤 문화든, 흥망은 지속에 달렸다. 반갑게도 소규모 레코드숍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는 건 긍정적인 가능성이다. 턴테이블과 레코드를 찍은 사진이 타임 라인에 무성한 걸 보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가지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무엇보다 음악을 들어야 한다. 음악을 듣지 않는다면, 턴테이블과 레코드는 금세 고물로 전락한다. 이사할 때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묻게 될 것이다. 음반을 뒤집는 습관 없이는 인터넷 주소창에 유튜브를 치는 빈도가 늘어날 확률이 높다. 듣지 않고 방치한 사이 레코드가 휘거나 슬리브에 곰팡이가 피고, 믹서의 볼륨 페이더를 움직일 때 잡음이 들리기 시작하면 통째로 창고에 들어갈 날이 머지않다. 인테리어용으로 쓰지 말란 뜻이 아니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인테리어에 쓰려면 음악을 들어야 한다.

올해의 액세서리 / 갤럭시 기어
갤럭시 기어는 ‘스마트 워치’라 불린다. 스마트 워치에서 상상 가능한 모든 게 담겼다. 스마트 워치로는 유일하게 200만 화소 카메라가 포함됐다. 하지만 손목에 차면 렌즈와 디스플레이가 90도로 고정돼 아래쪽을 찍을 때 디스플레이를 볼 수 없다. 당연히 음성 통화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어폰을 낄 수 없다. 보통 시계는 왼손에 차고, 통화는 오른쪽에서 한다. 사실상 스피커폰 통화를 해야 한다. 시곗줄에 음성 통화용 스피커를 넣어 버클도 두껍다. 스마트 워치를 찬 채로 책상에서 뭘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갤럭시 기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갤럭시노트 3, 갤럭시 10.1과 호환하는 갤럭시 시리즈의 ‘액세서리’다. 대체로 화면이 큰, 갤럭시 시리즈를 보조하는 용도다. 장치 연동을 위한 앱이건 카메라 등의 기본 앱이건 모두 삼성 앱스에서 제공하는 앱을 써야 한다. 삼성이 액세서리에도 제품 철학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올해의 ‘여친’/ 걸스데이
모든 걸그룹엔 ‘개국공신’이 있다. 가장 먼저 인지도를 넓히는 멤버를 표현하는 말일 텐데, 걸스데이에선 민아가 그랬다. 민아는 초창기 온갖 예능을 돌며 ‘고등어’ 춤을 췄다. 가슴을 펄떡거리며 하늘로 부러질 듯이 튕기는 모습이 운동회에서 전력 질주하는 조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절실한 몸부림을 보고 있으면 민아의 생명력은 물론이고, 걸스데이도 끈질기겠거니, 싶었다. 그럼에도 한동안 완벽한 한 방이 없었다. 올해 걸스데이의 ‘기대해’는 홈런이었다. ‘멜빵’을 반쯤 내리고, 엉덩이로 팔자를 그리는 모습은 ‘올해의 탈의’로 꼽을 만하다. 그 상징적인 안무보다 중간중간에 허벅지를 완전히 벌리고 엉덩이를 위아래로 튕기며 “네 전화만 기다리는 바보 같은 나는 뭐니”라고 할 때, 순간 멍해졌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처럼 서둘러 발표한 ‘여자 대통령’도 연타석 홈런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 두 곡을 거치며, 민아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혜리의 단발, 소진의 입술, 유라의 엉덩이는 어떤 남자도 흡수할 수 있었다. 이제 걸스데이 안엔 남자들의 다양한 이상형이 있다.

올해의 ‘남친’ / 빈지노
그러니까 이런 거다. 주위의 많은 여자들이 (나이를 초월함) 빈지노를 얘기할 때, 어딘지 조금 수줍은 표정을 내비친다. 대화는 이런 식이다. “어제 홍대에서 그 사람 봤어.” “누구?” “빈지노. 귀여워.” 처음부터 ‘나는 어제 홍대에서 귀여운 빈지노를 봤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두 번이라면 취향과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겠지만, 이미 그런 정도가 아니다. 게다가 그는 하루 종일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지 하루에만 목격담이 서너 곳에서 나오기도 한다. 한 여자는 이 ‘빈지노 현상’을 두고, ‘남자들이 소녀시대에서 태연 좋아하는 마음’과 연결짓기도 했다. “이종석, 김수현은 너무 멀고. 안 나타나고. 또 있어. 서울대잖아.” 맙소사, 어쨌거나 빈지노는 올해 서울에서 가장 바쁘고 멋있는 래퍼였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