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GQ 어워즈<4>

신중히 생각하고 완전히 멋대로 뽑았다.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로따로 올해의 수상자와 수상작과 수상한 것들을 가려냈다. 갈채와 꽃다발과 위로와 유감과 냉소와 분노 또한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로따로 전하고자 한다.



올해의 여왕 / 박인비
올해 LPGA는 메이저대회가 하나 더 늘어 총 5개가 되었다. 그 중 박인비는 세 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것도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대회까지 연이어서. 메이저 5관왕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한 시즌에 메이저대회를 싹쓸이한 LPGA 선수는 이제껏 딱 두 명 뿐이다. 경력을 통틀어 모든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도 고작 6명이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 부르는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박인비는 더 이상의 메이저대회 트로피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세계 랭킹 1위다. 당장 내년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미 메이저대회 우승만 네 번인 강심장이다. 박인비는 1988년생으로, 류현진보다도 한 살이 어리다.

올해의 직구 / 임창용
임창용은 인터뷰에서 메이저리그에 처음 등판하면 초구는 직구를 던지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처럼 첫 타자를 상대하며 여덟 개의 직구를 던졌다. 임창용은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면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말했다.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말이지만, 임창용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전성기에 엄청난 혹사를 버텼고, 그로 인한 수술도 견뎠다. 그 사이 구속이 떨어졌다며 혹평과 수모에 시달렸지만, 돈보다는 꿈을 좇았다. 헐값에 일본 리그에 진출, 2년 연속 30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고 한 번 더 달리는 쪽을 택했다. 메이저리그에 가기 위해. 시카고 컵스와 단 1억 원만 보장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최대 50억이 넘는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보장된 게 없는 세일즈맨 같은 계약. 올해가 끝날 때쯤, 한국 야구에선70억, 75억의 FA 계약이 쏟아졌다. 프로가 돈을 좇는 건 완벽한 이치다. 그래서 임창용의 인생은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치기 어려운 직구로 기억될 만하다.

올해의 시구자 / 모연희 할머니
“제가 아나운서를 할 때 김 감독님은 한일은행 1루수였어요.” 모연희는 한국 야구 최초의 여성 장내 아나운서다. 한화 김응용 감독과 나이가 같다. 60년대 동대문운동장에 가면 어김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있었다. 올해 정규 시즌엔 레깅스 시구, 360도 회전 시구, 공중 360도 회전 시구가 나왔다. 한국시리즈 4차전. 모연희는 마운드에 서서 공을 던지기 전에 마이크를 잡았다. “삼성라이온스 1번 타자, 세나필다 배영수.” 익숙하단 생각이 든 건 그 발음과 리듬이 요즘 장내 아나운서들의 교본으로 자리 잡아여서였을까? 더 이상 중견수를 센터필더, 유격수를 숏 스탑이라 말하진 않지만, 모연희의 목소리는 그런 옛말조차 당장 지금의 것처럼 들리게 했다. 야구가 기록의 스포츠라면, 남겨둬야 할 것이 선수들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올해의 슛 / 김민구
김민구는 3점 라인 밖에서 공을 잡았으면 했다. 결국 한국 농구가 인기와 함께 잃어버린 건 슛 아니었나? 아시아선수권은 농구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대회였다. 김민구는 림에 돌진하기보단 빈 곳부터 찾는 습성이 있는 천생 슈터다. 필리핀과의 4강전에 벼락같이 등장해 3점 슛 5개를 포함해 27점을 넣었다. 개최국 필리핀의 국기는 농구다. 경기장 분위기는 남미의 월드컵, 중국의 탁구대회 못지않았다. 아직 멋 내는 법도 잘 모르는 것 같은 대학생 김민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시원하게 던졌다. 주변을 살피는 건 딱 공을 손에 쥐기 전까지였다. 멀리서 쏜 슛이 림에 도달할 때까지의 긴장은 홈런 타구를 지켜보는 순간과 비슷하다. 골밑 슛, 덩크슛에는 없는 우아한 유희. 한국 농구가 맥이 빠진 건 그 희열이 사라지면서부터였다. 3,4위전에서도 김민구는 어김없이 3점 슛 5개를 퍼부으며 21점을 올렸다. 대표팀은 3위로 16년 만에 농구월드컵에 진출했다.

올해의 초심 / 양학선
말이 말을 잡아먹는 세상이라서, 어떤 말은 그저 거절하게 된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그렇고, 초심이라는 말도 그렇다. 초심이 나쁜 것도, 진정성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 휩쓸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10월 23일 인천 남동체육관, 광주 대표 양학선 선수가 도마 결승전 2차 시기를 앞두고 있을 때, 객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초심을 잃지 마!” 양학선 선수에겐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스카하라 트리플을 시도하고 안정적으로 착지했을 때, 그 말은 참 값지게 메아리쳤다. 전국체전 3연패. 그보다 한 달 전에는 세계선수권대회 2연패. 누구나 알 듯이 그는 지난해 런던올림픽 금메달로 유명해졌다. 관중이라곤 없던 국내 대회에 사람들이 그의 사인을 받겠다 몰려들었다. 양학선은 올해 모든 걸 그대로 보존했다. 아니, 이겨냈다. 비닐하우스에서 아파트로 옮겼지만, 새집증후군 같은 건 없었다. 그의 정확한 착지를 보며, 초심이라는 말이 생생하게 아름다웠다.

올해의 스트로크 / 정현
정현은 올해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에서 준우승했다. 이탈리어 선수 잔루이지 퀸치에게 졌다. 하지만 물집 잡힌 오른 발바닥에 붕대를 감고 뛰었던 17세 선수가 보여준 번쩍하고 빛나는 순간들이 윔블던 잔디 위에 있었다. 결승에 오르기까지의 놀라운 경기력, 이미 세계 수준의 백핸드를 적재적소에 구사하는 능력…. 타이브레이크까지 이어진 결승에서, 중요한 건 승패가 아니었다. 한 소년이 모든 걸 걸고 녹색 공을 향해 뛰는 아름다운 순간의, 매우 고전적인 울림이었다.

올해의 신기록 / 이인국
수영선수 이인국은 올해 제33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다. 모두 한국신기록이었고, 배영 100m는 1분 00초 59, 세계신기록이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 더 많은 희망이 그의 스트로크를 따라 물결칠 전망이다.

올해의 선수 / 류현진
처음엔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박찬호의 커브, 김병현의 업슛, 김선우의 투심 패스트볼처럼 보는 사람의 눈까지 속이는 공의 움직임은 없었다. 직구는 150킬로미터를 넘지 않았고, 슬라이더는 좀 밋밋했다. 체인지업은 중계 카메라로는 위력이 정확히 보이지 않는 구질이었다. 공보다 류현진의 얼굴에 의지하며 경기를 봤다. 그 표정만큼은 바위산 같아서 별 문제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4승 8패 평균자책점 3.00. 내셔널리그 다승 공동 10위, 평균자책점 9위였다. 내셔널리그엔 총 15개 팀이 있으니, 1선발급 활약이다. 류현진은 기자회견에서 시 “내년 목표는 마찬가지로 10승과 2점대 평균자책점”이라고 했다. 1점대 평균자책점이나 15승을 노리겠단 약속은 없었다. 류현진은 한국에서 경쟁자가 전혀 없을 때도 2점대 평균자책점 이외엔 별 욕심이 없는 선수처럼 행동했다. 여전히 불펜 피칭은 생략한다. 아프면 쉰다. 새 구종을 추가하겠다고 요란을 떨지도 않는다. 마운드에 올랐을 때의 얼굴처럼 변함없다는 점에서, 내년에도 안심하고 TV를 켤 수 있겠다.

올해의 작전타임 / KCC vs. 경희대학교 4쿼터
과거 농구대잔치의 영광을 잇는 ‘프로-아마 최강전’이 작년부터 열리고 있다. 경희대학교와 KCC의 경기 이전에 열린 대학팀과 프로팀 간 세 차례의 대결은 모두 프로팀이 승리한 상황이었다. 4쿼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KCC는 경희대학교에 20점 뒤져 있었다. KCC의 감독은 농구대잔치가 낳은 최고의 스타 허재였다. 감독 허재는 작전 타임을 요청해 선수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야!” 한참의 정적이 흘렀다. 방송 사고인 줄 알았으나 허재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이게 뭐 하는 거야, 디펜스하는 거야 뭐 하는 거야?” 농구대잔치 시절에 보여준 징그러울 정도의 근성과 기개가 겹쳤다. 공교롭게도 장내에는 조용필의 ‘청춘시대’가 흘렀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사공처럼 내 청춘을 시작하리/ 저 높은 그곳으로 저 넓은 세상으로 내일을 찾아서.” 농구의 인기가 예전 같으려면, 그때 “우리 한번 끝까지 해보자”라고 외쳐줄 선수 한 명이 필요해 보였다.

올해의 컴백 / 김연아
그녀가 돌아왔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조금 더 연장되었다.

올해의 국내파 / 김신욱
김신욱의 장점은 큰 키다. 하지만 기대되는 능력은 헤딩 말고도 많다. 그의 장점은 오히려 엄청난 활동량이다. 현재(11월 15일) 득점 열아홉 골과 도움 여섯 개의 놀라운 활약은 그가 부지런히 움직여 공간에 금을 내기 때문이다. 골을 넣을 때마다 자신이 만든 창의적인 자리에 있었고, 김신욱이 수비수에게 막히면 빈 공간이 생겨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작년,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가 교체 투입되었을 때마다 골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전히 국가대표엔 높이가 뛰어난 공격수가 필요하다. 김신욱은 높이로 선출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이브라히모비치 같은 공격수를 꿈꾼다

올해의 해외파 / 기성용
경기장에서 덩치 큰 기성용을 건드리면 혼쭐이 난다. 기성용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대신, 폭발시키며 에너지를 얻는 쪽에 가까운 선수다. 뭐든 쓸 수 있고, 화르르 타올랐다 금세 사그라지는 SNS는 기성용과 잘 맞았다. 그의 말이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을 겨냥하기 전까지만. 사건 이후 홍명보 감독은 기성용을 대표팀에서 제외했다. 복귀까진 세 달이 걸렸다. 최강희 감독은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직접 와서 사과할 필요 없다”며 적절한 선을 그었다. 그간 기성용이 없는 대표팀 중원은 황폐했다. 공을 든든히 지키고 전방으로 뿌려주는 선수가 없었다. 11월 15일, 스위스전에서 공격진의 이청용과 손흥민, 김신욱은 자유롭게 자리를 바꿨다. 윙백 이용과 김진수도 수시로 전방을 노렸다. 그럴 때마다 기성용은 절묘한 위치에서 역습을 차단하고 빈 곳을 메웠다. 단짝 구자철, 브라질과 말리전에서 호흡을 맞춘 한국영도 없었지만 혼자서도 너끈해 보였다. “리더는 묵직해야 한다”더니, 경기장에서 십자가를 지듯 스스로 리더가 됐다.



올해의 아찔한 순간들
첫째, 걸스데이의 민아가 ‘멜빵’을 내렸을 때. 민아는 혜리처럼 한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얼굴은 아니다. 유라처럼 굴곡이 선명한 몸은 더더욱 아니다. ‘기대해’는 걸스데이의 야심작이었다. 허리를 완전히 드러내고 골반을 움직이는 멜빵 춤은 카라의 엉덩이춤만큼 위력적이었다. 민아는 아무래도 다른 멤버들에 비해 ‘풀샷’으로 돋보이기 어렵다는 걸 짐작했던 걸까? 무대에서 클로즈업 카메라만 왔다 하면 암호 같은 행동을 보여줬다. 찰나에 벌어지는 일이라, 보는 입장에선 알아채는 쾌감이 있었다. 입 꼬리를 슬쩍 올리거나, 윙크를 하거나, 눈을 찡긋 감고 방긋 웃거나. 2절의 같은 파트에서 혹시나 한 번 더 비슷한 행동을 할까 기대해봤지만, 정해놓고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걸 보며 예쁘거나 귀엽다기보다 알몸을 본 것처럼 뭔가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든 건, 민아의 표정이 방송을 보는 모든 시청자를 향하는 게 아닌, 꼭 찍어놓은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만 은밀하게 보여주는 얼굴을 훔쳐보는 듯해서다.

둘째, 강예빈이 <라디오스타>에 나왔을 때. 강예빈은 네 MC들의 말을 받아쳤다. 목소리는 의 스컬리나 샤론 스톤 역을 전문으로 하던 성우처럼 진하고 낮게 깔렸다. 대답을 준비해온 것 같기보다, 그저 여자의 본능이란 인상이었다. 탁구공 넘기듯 좋은 리듬으로 질문을 받고, 또 돌려줬다. 질문을 세게 쳐낼 땐 찰싹 손등을 맞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프기보단 다른 쪽 손도 내밀고 싶어졌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누나라도 불러도 괜찮을 것 같은 얼굴과 몸. 그렇게 불렀을 때, “왜, 짜샤!”라며 팔을 목에 확 감는 상상도 뒤따랐다. 그런 포즈라면 상체가 꽤 밀착될 것이다. 함께 출연한 지나와 박은지를 말로 압도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찼는지, 중간엔 벌떡 일어나 정수리부터 발목까지 꿀렁꿀렁 ‘웨이브’를 탔다. 하필 사과껍질처럼 얇은 드레스에, “양치할 때마다 그렇게 한다”고 강조하면서.

셋째, <신세계>의 송지효가 포박당했을 때. <신세계>엔 피가 많이 나온다. 예쁜 피는 아니다. 정말로 칼에 찔리면 저런 모습이 되겠구나, 짐작하게 될 뿐. 좀 잔인하다 싶은 장면도 편집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연출이 투박하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남자들이 우르르 수트를 입고 나와서 한바탕 싸움을 벌이곤 너절해진 모습으로 또 다른 남자를 죽이러 가는 영화에서, 송지효는 그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번쩍 눈에 띈다. 그녀는 주로 단정한 옷을 입는다. 무릎길이보다 좀 짧은 스커트, 몸에 꼭 붙는 원피스. 안경도 쓰다. 사무직 여성에 대한 페티시즘의 관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리 특별하진 않다. 이런 설정은 최후의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감독의 장치였던 걸까? 송지효와 <신세계>를 포털사이트에 검색어를 넣으면 ‘드럼통’이 자동 완성된다. 송지효는 영화 말미에 총격전을 벌이지만, 생사에 대한 정확한 언질은 없다. 그러다 갑자기 드럼통에 사지가 포박된 상태로 묶여 등장한다. 속옷 차림으로, 피를 뒤집어쓴 채. 그리고 서 있는 남자들을 올려다본다. 당장 구출하고 싶은 마음과, 미안하게도 그 장면을 좀 더 보고 싶은 맘이 동시에 생겼다. 피가 콱 솟긴 솟는데, 그 피가 어째서 솟는 건지.

올해의 서울의 밤 / 올빼미 버스
서울시는 올해 4월 19일부터 심야버스 N26(강서~중랑), N37(은평~송파) 노선을 시범 운행했다. 시행 이후 시민 88퍼센트가 확대를 원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N13(상계동~송파 차고지), N16(도봉산 차고지~온수동), N61(양천 차고지~노원역), N62(양천 차고지~면목동), N10(우이동~서울역), N30(강동 차고지~서울역), N40(방배동~서울역) 노선이 추가됐다. 환승도 가능하므로, 사실상 서울 어디든 2천원 수준의 금액으로 심야에 오갈 수 있게 됐다. 현재 하루 평균 6천여 명이 이용 중이며, 심야버스 확대 이후 택시 승차 거부 신고가 10퍼센트가량 줄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안 그래도 그냥 잠들기 억울한 도시에서 더 자기 힘들어졌다. 서울의 밤이 밝아졌다.

올해의 술집 / 싱글몰트 바
올 한 해 ‘올해의 술집’으로 끝까지 경합한 곳이 있다면 경리단길에 깨소금처럼 뿌려진 크래프트 맥주 펍들이다. 3년 전부터 경리단길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양조 맥주의 유행이 드디어 올해 대중적으로 폭발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남동 오거리 일대에 조용히 자리 잡은 싱글 몰트위스키 전문 바를 올해의 술집으로 선정한 이유는 해묵은 숙원 사업이 해결된 것 같은 시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여기저기서 싱글 몰트위스키의 부흥을 설파했지만, 오랫동안 극소수만의 취미에 머물렀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맥주에 위스키를 타서 내 맛도 네 맛도 아닌 술을 마시게 되는 음주 문화, 위스키라면 고개를 젓고 혀를 내두르는 여자들, 두어 종류의 위스키만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쏠림 현상 같은 것들이 올해 드디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엔 맛집 골목처럼 상생 효과를 만든 한남동의 싱글 몰트위스키 바들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한번 붙은 불꽃은 빠르고 강력하게 번져, 기존의 칵테일 바에서도 싱글 몰트위스키를 촘촘히 구비하는 곳도 많다. 이런 변화 덕분에 좋아하는 싱글 몰트위스키의 이름을 말하는 일이, 좋아하는 맥주 이름을 말하는 일처럼 쉽고 편해졌다.

올해의 날씨 / 비
‘장마가 끝났다’는 발표 이후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비는 비이되 장맛비가 아니라는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그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비라는 데 맞는 입장에선 다를 것도 아니었다. 2013년의 장마는 역대 가장 길었다. 총 51일간 지속됐다. 지난 7월 8일부터 22일까지, 비가 오지 않은 날은 단 하루뿐이었다. 실연하고 일부러 찾아 듣는 슬픈 노래 같은 날씨, 그래도 우울한 날은 “일조량이 모자라서 그래” 논리적으로 위안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나? 비는 우산이라도 들고 피할 수 있었지만 뭔가에 짓눌려 있는 것 같은 기분만은 가시지 않았다. 그게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는 걸 누구나 알았지만…. 애꿎게, 제습기만 새로운 생필품 목록이 되었다. 그런 채 비가 내리면 젖는 게 순리라고 억지로 달래는 것 같은, 차갑고 눅눅한 여름이었다.

올해의 명령 / “내 다리를 봐”
노래는 추측으로 시작한다. “맨날 손만 잡았다 놨다 그게 충분하니. 뽀뽀도 안해 넌 언제 진도 나갈거니. 밤새워 얘기만 해 취해도 집에 가고. 너 남자 맞니 혹시 너 쑥스러운거니.” 후렴구에선 명령한다. “내 다릴 봐 예쁘잖아. 짧은 치마 입었잖아. 관심 있게 보란 말야. 눈 말고 다리를 봐. 손을 놓고 나를 안아.” 마지막엔 설득한다. “애기라고 부르지마. 나도 여자란 말이야. 길을 걷다 남자들이 자꾸 돌아본단 말야. 너만 빼고 다 아는 걸. 너만 빼고 다 넘 볼걸.” 이런 추측과 명령, 설득의 과정엔 ‘다리가 예쁘다’가 전제인 것 같다. 그래야 명령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에겐 여자 다리보다 전제되는 게 있을 텐데…. 남자가 술에 취해 그냥 집에 가는 건 쑥스러워서가 아니다.

올해의 팩트 / “우리나라 대통령도 여자분이신데”
‘여자 대통령이 당선됐으니 이제 여자가 먼저 고백하고 키스하자, 잡혀가는 것도 아닌데….’ 요약하면 이런 노래다. 재치라기엔 비약이 심하고, 놀이라기엔 재미가 덜하고, 실상 역사적 방점은 ‘여자’에 찍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서 오는 당혹감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노래를 꼭 이해해야 맛인가?’ 자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여자 넷이 부르는 노래가 여간해선 그냥 노래로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이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이라서. 그야말로 맞는 말이고, ‘여자 분이신’ 것도 너무 맞는 말이라서. 그 와중에 이 가사만은 정확히 들린 연유가 뭘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여자가 먼저 키스한다고 잡혀가는 나라는 아니지만, 어디가 아파서 아픈지도 잘 모르겠어서. 그저 청춘이라서, 삼십 대라서, 마흔이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올해의 헤드라인 / ‘여심 흔들’
검색창에 ‘여심 흔들’이라고 치면 4천 가지가 넘는 방법으로 여심을 뒤흔든 남자들이 주르륵 줄을 선다. 시구 한번 했다고, 복근 노출했다고, 손 한번 흔들었다고, 수트 자태가 완벽하다고, 눈빛 한번 날렸다고, 그냥 서 있었다고…. 올 한 해 대한민국 여심은 걸핏하면 흔들흔들, 휘청휘청하고 말았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는 기사의 헤드라인은 대개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다. 취재 기사 없이 사진만 송고하는 경우가 많고, 행사장이나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포털에 업로드를 마쳐야 하며, TV 리뷰 기사 역시 방송이 끝나자마자 올린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헤드라인을 바로바로 붙여야 하는 담당자들이 어쩔 수 없이 ‘여심 흔들’, ‘아찔한 뒤태’, ‘여신 미모’ 같은 전형적인 관용구를 우르르 그대로 쓰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여심보다는 읽는 이들의 손가락과 눈동자를 흔들 재치 있는 헤드라인이 더 절실해 보인다. 게다가 생각보다 여자의 마음은 흔들기가 쉽지 않다.

올해의 시대정신 / ‘안알랴줌’
사건은 끊임없이 터졌다. 사회면에 실을 법한 것도, 정치면을 털어서 소화해야 할 일도 있었다. 잠재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것도 있었고, 갑자기 부모님 세대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사실 이런 것이다’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돌연 버림 받은 것 같은 심정이 됐다. 용서를 구하는 일은 바라지도 않았다.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걸 보자는 마음도 언감생심. 말을 팔아 먹고 사는 소위 ‘논객’들은 애초에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밀라 쿠니스 같은 여자와 세 번 데이트하는 게 더 현실적일 만큼 지금, 여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검색창에 ‘안알랴줌’을 치면 나오는 연관검색어에서, 이 말이 왜 올해의 시대정신인 줄 거의 정확히 알 수 있다. 혹시, 알고 싶으면 직접 찾아 공부하라는 교훈이었나? 한국 미디어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은 해외 언론을 검색하라는 국제화인가? 됐고, 이런 말은 할 수 있겠다. “짱시룸.”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