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어쩐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케빈 스페이시가 올해 드디어 건수를 올렸다. 데이비드 핀처가 감독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그는 국회의원을 연기했다. 그럴듯하고, 극악무도하고,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역할. 그가 진짜 정치인이 아니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다.

케빈 스페이시는 자신도 야망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오래전 이야기라고 덧붙이면서. “<아메리칸 뷰티>가 나오기 11년쯤 전 일이에요.” 그가 서른이 되기 직전이었던 1988년 무렵이다. “마치 두꺼운 눈가리개를 쓰고, 말에 올라타서 스스로 영화계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달리던 시절이에요. 한 가지 목표가 있고 그게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이기적으로 변하죠. 12년 동안 그랬어요. 내가 했던 모든 일이 다 이기적인 의도였다거나 성공할 수 있는 역할만 맡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스스로 뭔가를 이뤄낼 수 있을지 알아내려는 데 엄청 몰두하고 있었어요.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공하고, 내가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과 어울리고요. 난 어느 정도 급까지 올라서고 싶었어요.” 최정상급? “물론이죠. 스포츠와 비슷해요. 테니스를 한다면 당연히 윔블던에서 우승하고 싶고, U.S. 오픈에서 우승하고 싶잖아요.”

스페이시는 <유주얼 서스펙트>와 <아메리칸 뷰티>로 오스카상을 두 번 탔다. 그리고 2003년, 데뷔 초기에 품었던 야망이 이미 사라지고 없을 때 런던의 올드빅 극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난 10년 동안 똑같은 꿈 을 좇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아마 안 하는 게 나았을 영화에 돈을 벌기 위해 출연하면서 또 다른 10년을 보내는 건 더 싫었죠. 그래서 좌회전을 했어요. 내 평생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지금도 올드빅 극장에 서 관리와 프로그래밍을 맡는다. 2015년에 사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거의 매년 그는 제작도 맡았다.) “영화에서는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크랭크업을 하고 나면 그보다 더 나아질 수 없어요. 하지만 연극에선 다음 주 화요일에 더 나을 수도 있죠. 그게 연극의 스릴이에요.”

그렇다고 스페이시가 영화와 아예 담을 쌓은 건 아니다. 올해 그는 보 는 사람의 넋을 쏙 빼놓을 만한 캐릭터을 연기했다.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넷플릭스가 제작한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의 국회의원 프랭크 언더우드. 그가 악의와 협잡을 얼마나 제대로 연기하는지 아무리 칭찬해도 그는 웃지 않았다. “난 그저 죽여주는 직업을 가져서 미친 듯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사람들은 악역을 좋아해요.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냉철한 분석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페이시의 여러 재주 가운데 하나가 억눌린 악의를 드문드문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해도 반대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가 눈을 도사리고 번득일 때마다, 이제 곧 안 좋은 일이 닥칠 것이라는 기운을 몸으로 먼저 느낄 수 있다.

스페이시가 야망을 품고 있던 시절에 맡았던 빛나는 역할들 중 하나가 <세븐>의 연쇄살인범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그는 <세븐>의 감독 데이비드 핀처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얼마 전 스페이시는 핀처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핀처와 일하는 걸 즐기는 가장 큰 이유는, 마치 잘 드는 칼을 지닌 사람과 일하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핀처는 쓸데없는 것, 헛소리, 군살,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없애버리는 법을 알아요. 이 장면에서 캐릭터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오직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와 감정만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되면 면도날처럼 아주 날카로워지고, 깔끔하고 효율적이고 단순해져요. 단순해지는 법을 익히는 데 25년이 걸릴 수도 있는데 말이죠.” 핀처는 스페이시를 어떻게 그렇게 연기하게 할까? “핀처는 잔혹해요. 진짜요. 나를 조각조각 내버린다고요. 배우를 다루는 솜씨가 끝내주는 감독이에요.”

핀처가 배우들을 다루는 방식에 압박을 느꼈다고 말한 사람들이 그동안 많았다는 사실을 일러줬다. 보통은 핀처가 가차없이 같은 장면을 계속 반복해서, 끝이 없는 것처럼 찍는 것을 불만에 찬 목소리로 언급한다. 하지만 스페이시는 핀처가 일하는 방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만 약 누가 배우를 괴롭혀서 좋은 연기를 끌어낼 수 있다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배우가 나라고 해도 같은 생각일걸요.”

<하우스 오브 카드>로 스페이시는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방송에도 케이블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에미상 후보에 오른 첫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스페이시와 핀처가 적당한 파트너들을 찾다가 얻은 기회였다. 넷플릭스는 그들에게 26개의 에피소드를 찍는 대가로 1억 달러를 계약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럼에도 (스페이시에 따르면) 파일럿을 먼저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은 유일한 회사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빅뱅이 되지는 않을까 모두 걱정했죠.”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기우였다. “아주 난리가 났죠.” 스페이시는 이제 시즌 2 이후로도 계속하고 싶다고 한다. “그쪽에서 계속하겠다면 나도 가요, 가야죠.”

넷플릭스는 <하우스 오브 카드>를 시청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발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늘 최신 정보를 들어요.” 스페이시 말을 빌라자면 <하우스 오브 카드>는 진출한 40개 국가 모두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한 스트리밍 쇼가 되었다. 스페이시는 <하우스 오브 카드>의 성과가 새로 운 형태로 관객을 끌어들인다는 것에 흥분했지만 프로그램의 콘텐츠 자체 를 바꾸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자기가 영화 카메라인지 TV 카메라인지 스트리밍 카메라인지 몰라요. 카메라는 그냥 카메라죠.”

“요즘은 야망이라는 단어조차도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구나 원하는 게 있고, 스페이시도 인간이다. 그는 아주 오래전, 우디 앨런 영화의 배역으로 자신이 고려된 바조차 없다는 사실에 한참 실망한 적도 있다. 배역을 맡는 데 자존심을 내세우면 안 된다는 건 스페이시의 오래된 철학이다. “내가 믿는 건 이런 겁니다. 만약 배우가 역할을 따내고 싶거나 누군가와 같이 일하고 싶다면,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무슨 일이라도 다 해야 합니다. 오디션을 보라고 하면 봐야죠. 스크린 테스트를 하자고 하면 하고요. 복도에서 탭댄스를 춰보라고 하면, 가서 춰야 돼요.” 그래서 그는 이런 정신을 실천하고자 올해 초 우디 앨런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일단 나를 배우라고 먼저 소개했어요. 우디 앨런이 내 연기를 봤으면 해서 넷플릭스 시청권을 같이 보냈죠.”

기쁘게도 이 편지에는 긍정적인 답장이 돌아왔다. 스페이시는 우디 앨런이 보낸 답장에 대해서 “정말 환상적인 한 통의 편지였다”고 말했다. 앨 런은 편지에서 ‘차후 작품에 스페이시를 캐스팅할 가능성이 있다’며 넷플릭스 시청권을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했다. “다음엔 마틴 스콜세지에게 편지를 쓸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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