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갑의 조건

장지갑을 고른다. 그리고 시계 태엽을 감듯 우아하게 돈을 꺼낸다.

190X100, 총 19개의 주머니. 1백20만원대, 루이 비통.

1 DINING ROOM
조심스레 안을 살폈다.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실내’는 반듯함의 정수.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니 몇 해 전 일기를 읽듯 편안하게 이리저리 들춰본다. 뭔가 모호한 검정색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수송아지 가죽을 오묘한 방법으로 가공한 토뤼옹 가죽이었다. 열고 닫기 편하니 씀씀이가 헤퍼질까 봐 은근히 걱정된다.

208X103, 총 17개의 주머니. 생 로랑 파리.

2 LOUNGE
편안한 게 제일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딱 이 포도주색 장지갑을 보기 전까진. 특유의 불편함은 파리 출신 물건들의 특권이다. 이 지갑에 카드를 끼워 넣기란 여러 번 반복해도 도무지 쉽지 않다. 색깔이며 매끈한 송아지 가죽이며 어느 곳 하나 한눈팔 틈이 없다. 최신 유행이 다 이 지갑 같다면 좋겠다.

220X130, 총 12개의 주머니. 83만원, 알프레드 던힐.

3 AIRPORT
툭 던져도 나뒹굴지 않는다. 비행기 티켓도 너끈하게 들어간다. 공항과 단짝. 지갑 중간에 펜도 꽂을 수 있다. 지퍼가 달린 큼지막한 수납공간이 있어 동전이나 USB 혹은 작은 배터리를 보관하기도 좋다. 카드 홀더는 여섯 개뿐. 신분증이며 체육관 회원권까지 넣다 보면 신용카드는 한두 개나 들어갈까. 현금만 주로 쓰는 사람이 더 알차게 쓰겠다.

230X120, 총 17개의 주머니. 60만원대, 프라다.

4 DOWNTOWN
‘활짝’이란 말이 정말 잘 맞는다. 꽉 다문 입을 벌리면 활짝 열린 채 가지런히 눕는다. 뱃속을 보란 듯이 드러낼 땐 속이 다 시원하다. 지갑을 움직이면 중앙에 달린 주머니가 양옆으로 할짝댄다. 사피아노 가죽은 쉽게 길들여지진 않지만 자자손손 쓰고 싶을 만큼 강인하다. 태양이며 야자수, 바다까지 아름다운 문양만 모았다.

195X103, 총 17개의 주머니. 91만원, 디올 옴므.

5 HOTEL
기존의 방식에서 일찌감치 벗어났다. 낯선 첫인상은 잠시. 자꾸 보니 이제는 옆자리 후배처럼 친근하다. 지퍼를 열어도 속이 시원스레 드러나지 않는다. 안은 가죽을 얇게 저민 듯 빼곡하다. 말쑥하고 예쁘니 그냥 두기도 뭐하고, 활짝 열어 젖히는 것도 망설여졌다. 비밀이 착하게 쌓여 있는 듯 은밀해 보이지만 한참을 보면 고요함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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