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젊은 작가의 사회

2014.01.20GQ

Book판형

처음 듣기엔 그럴듯한데 생각해보면 찜찜하고 고개가 갸웃해지는 호칭이 있다. 마치 어느 여직원이 ‘우리 사무실의 꽃’이라고 불릴 때처럼. 문단에서 들려오는 호칭도 간혹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만든다. ‘젊은’ 작가, ‘젊은’ 소설 같은 호칭이 그렇다.

새로운 호명은 기존의 이름이 차지한 경계선을 흔들어야 한다. ‘젊은’이라는 호명은 어떤 구별을 허물고 젊은 작가나 젊은 소설의 자리를 마련하는가. 까칠하게 접근하지 않더라도, ‘젊은’ 이라는 구별짓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상상력을 드러내는 신선한 목소리라고 포장되는 이 수식이 텅 빈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다. 호명하는 쪽의 사정을 헤아려보면, 순문학의 위기에 대한 마케팅적 수사로서도, 문단의 은밀한 서열주의로서도 손쉽고 편안한 선택이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호칭을 부여하는가에 담긴 호명의 정치를 생각해보면, 특정한 연령대나 작품 활동 기간이 짧은 작가들에게 자연스럽게 부여된 호칭처럼 보이기도 한다.

호명을 당하는 작가들은 자신 앞에 붙는 이 수식이 반가울까. 얼마 전 <문장 웹진>에 실린 좌담에서 서효인 시인은 말했다. “일단 젊은 시인이라고 자주 호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이게 묘해요. 젊은 시인의 범주가 모호하잖아요. 의미도 불분명하고. 본인이 젊은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은 스스로 커밍아웃을 했으면 좋겠어요. (중략)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젊음’이란 게 너무 느슨하게 사용되니까 그 말이 오히려 변화를 막고 있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느슨한 만큼 마냥 편하지는 않았을 호칭에 작가들이 바로 손사래를 치지 않은 이유는 순문학의 위기에 대한 초조함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묵시적인 합의를 통해 얻은 게 뭘까. ‘젊은’이란 수식으로 포장된 작업들을 상업적으로 반짝 환기시킨 효과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독자는 정작 소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조금 다른 구별을 끌어오려고 한다. 젊은 소설이라고 호명되지 못한 작품을 늙은 소설이라고 하BOOK면 서러워질 것이고, 낡은 소설이라고 하면 억울해질 것이다. 그러니 젊은, 늙은, 낡은과 같은 수식 대신 ‘아이의 소설’과 ‘어른의 소설’이라는 조명을 비춰보고 싶다. 갈수록 아이를 닮아가는 세상에서 소설이 소설로서의 혜택은 누리면서도 소설 바깥 세계와의 연루는 감당하지 않을 때, 독자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피면서 동시에 문단의 분위기 또한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을 때, 그 소설은 아무리 생기가 넘치고 상상력이 가득하더라도 ‘아이의 소설’이라고 부르면 좋겠다.

‘아이의 소설’은 자신의 독립에 넘치게 마음을 쓰지만 동시에 관심과 보살핌을 요구한다. “제발 날 좀 내버려둬요. 그런데 엄마, 용돈 좀 더 줘요.” 이렇게 자립을 하면서 당연히 소멸되는 권리까지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한다. 또, 누릴 것은 누리되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긴밀하게 연루된 작은 세계에 대한 책임은 미루고, 멀리 떨어진 사회적 의제에 대한 책임을 앞세운다. 전자야말로 자신만이 떠안을 수 있는 긴급한 과제일지라도.

물론 아이의 소설 역시 단독성과 자율성을 얻으려는 시도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실상 ‘어른의 소설’이란 말은 동어반복이다. 소설은 결국 그 누구의 재현도 아닌, 한 개인이 되려는 실험이 아닌가. 어른이란 그렇게 되려는 시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연습을 하는 삶의 형식이 아니던가. 아이의 소설이란 소설의 비용을 치르지 않은 소설이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그 비용은 소설가로서 자신이 치른 열정으로는 부족하다. 소설의 비용은 소설가로서 세상에 치른 비용이어야 한다.

소위 젊은 소설이 어른의 소설이 되기 위해, 우선 문단의 옅은 서열주의에 비용을 치러보면 어떨까. 박완서는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했지만, 일상에서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작은 분개들이 결정적일 때가 많다. 사장보다는 상사가, 리더보다는 보스가, 대표보다는 선배가, 우리가 맞서야 할 ‘일상의 악’인 경우들. 사회의 커다란 의제에 분노하는 큰 가슴보다는, 자신들을 ‘젊은’이라는 달콤한 말로 순치하려는 선한 의도에 쪼잔하게 분개하는 ‘작은 가슴’, 그런 작가부터 돼보는 건 어떤가. 젊은 아이가 아닌, 젊은 어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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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준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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