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주연 배우

멀티 캐스트라서 투자를 선호하는 건 아니다. 이야기의 성격상 캐릭터의 숫자가 많고, 그들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한다면 스타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변호인>의 송강호 캐스팅은 신의 한 수였다. 한 해에 2천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그의 전무후무한 티켓 파워를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변호인>은 1월 12일 현재 관객 900만 명을 돌파하기는 커녕 극장에 걸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변호인>을 제작한 위더스필름 최재원 대표는 “극중 송우석의 나이가 30대라 처음에는 30대 남자배우들에게 시나리오을 돌렸다. 여러 이유로 전부 거절당했다. 주연배우가 캐스팅되지 않으니 투자도, 조연배우도 해결되는 게 없었다. 그래서 해외 동포들을 상대로 돈을 구하러 다녔고, 아예 독립영화로 찍을 가능성도 열어뒀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고초려 중이었던 송강호가 송우석을 맡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오달수, 곽도원, 김영애, 임시완 등 조연배우들이 흔쾌히 합류했으며,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투자도 단번에 해결됐다. 그리고 최근 배급에 물이 오른 NEW가 배급을 맡았다. 송강호의 합류로 <변호인>은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탈바꿈하게 됐다. 그것은 ‘멀티 캐스팅’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던 충무로에서 오랜만에 선보인 원톱 영화의 정석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충무로는 몇몇 대작을 중심으로 멀티 캐스팅에 재미가 들려 있었다. 김윤석, 이정재, 김혜수, 전지현 등 배우들이 <도둑들>이 되었고, 한석규, 하정우, 류승범, 전지현은 냉전의 용광로였던 <베를린>으로 갔다. 송강호, 이정재, 백윤식, 조정석, 김혜수 등은 <관상>에 휘말려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야 했다. 이 같은 영화들은 한 작품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배우들을 한데 모아 관객들의 눈을 호강시켰다. 멀티캐스팅을 한 영화 대부분 배우들 간의 화학작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1+1은 2가 아니라 3, 4, 그 이상의 숫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장에 입증했다.

얼마 전 촬영을 완료한 액션영화 <표적>(2014년 상반기 개봉 예정) 역시 류승룡, 유준상, 조여정, 진구, 김성령이 함께 출연하는 멀티 캐스팅 영화다. 사실 주인공 류승룡을 제외한 캐릭터는 조연급 배우들이 연기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럼에도 유준상, 조여정, 진구 같은 주연급 배우들을 한꺼번에 캐스팅한 이유는 사건이 릴레이처럼 일어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표적>을 제작하는 용필름 임승용 대표는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류승룡을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는 물리적인 출연 시간이 다른 영화에 비해 짧다”며 “류승룡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릴레이처럼 진구, 조여정, 김성령, 유준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 연기력으로나 스타성으로나 대중들에게 흡인력 있는 배우들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캐스팅이 흥행의 절반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긴 하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캐스팅이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선택할 때 관객의 우선 고려 조건이 ‘누가 나오는가’에서 ‘누구와 누구가 함께 나오는가’로 바뀌어가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나 맨체스터 시티 같은 유럽 축구계의 큰손들이 매시즌 스타 선수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충무로의 대작 영화 역시 스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원톱 송강호가 이끈 <변호인>의 흥행은 전통적이고, 신선하다. 최근 개봉했던 원톱 영화 중 성공한 작품은 617만명을 불러모은 원빈의 <아저씨>정도뿐이지 않는가. <아저씨>를 제외한 원톱 영화 대부분 박스 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특히 한 영화를 꼽자면 <아저씨>를 벤치마킹했던 소지섭의 원톱 영화 <회사원>은 100만 명을 겨우 넘겼다. 투자, 배급사들이 <변호인>의 시나리오를 다시 받아도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CJ엔터테인먼트 투자팀 이창현 부장은 “처음 <변호인>의 제안이 들어왔을 때 <변호인> 같은 법정 드라마 서너 개를 동시에 고려하고 있었다. 그때 CJ가 선택한 작품은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소수의견>이었다”며, “주인공의 적이 이야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였던 <변호인>과 달리 <소수의견>은 용산 참사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고군분투기를 다루는 작품이라 더 세게 다가왔다. 그게 <변호인> 대신 <소수의견>을 선택한 이유”라고 밝혔다. 송우석 변호사와 노무현 그리고 현재의 정치상황의 화학작용이 이 정도로 폭발할지 몰랐던 상황이니, 남의 자식을 변호하는 것보다 죽은 아들을 변호하는 쪽이 훨씬 더 애절할 테고, 지난 MB정권 때 일어난 사건인 만큼 관객의 관심을 환기하는 데 수월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또, 그는 “원톱이냐, 멀티캐스트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투자사들이 원톱이라서 투자를 하지 않고, 멀티 캐스트라서 투자를 선호하는 건 아니다. 이야기의 성격상 캐릭터의 숫자가 많고, 그들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한다면 스타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반대로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가야 하는 이야기라면 당연히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를 원톱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2014년 CJ, 롯데, 쇼박스, NEW 투자배급사 4사의 라인업은 원톱 영화도 있고, 멀티 캐스팅 영화도 있다. 그리고 원톱 영화로서 <변호인>이 성공한다고 해서 “지금 투자를 결정하는 영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게 투자사와 투자배급사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원톱 영화로서 <변호인>의 흥행은 하나의 흥행 사례 정도로만 의미를 가질 뿐, 영화산업에 큰 흐름을 바꿀 만큼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흥미롭게도, 올해 설 극장가에서 충돌할 두 편의 영화는 마케팅 전략을 원톱으로 정했다. CJ의 <수상한 그녀>와 NEW의 <남자가 사랑할 때>는 각각 주연 심은경과 황정민을 선봉장으로 내세웠다. 현재 공개된 메인 예고편도, 포스터도, 언론 인터뷰도 두 배우 중심으로 영화를 포장하고 있다. <남자가 사랑할 때>의 경우, 지난해였더라면 영화 속 커플 황정민과 한혜진이나 곽도원, 정만식 같은 잘나가는 조연배우와 함께 묶어서 홍보 일정을 소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가 사랑할 때>의 홍보대행사 엔드크레딧 박혜경 실장은 “<변호인>의 원톱 전략 영향을 받은 건 당연히 아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는 남녀의 연애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라 가족, 친구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살아온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간 소홀히 했던 가족도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라 황정민 씨를 부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가 서사를 이끌어간다. 시종일관 대립하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사이에 수많은 방해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서사는 하나의 주인공, 원톱만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멀티 캐스팅 영화라고 알려진, 2014년 여름 시장에 대격돌할 세 편의 사극, CJ의 <명량-회오리바다>, 롯데의 <해적 : 바다로 간 산적>, 쇼박스의 <군도 : 민란의 시대>를 한번 살펴보자. <명량-회오리바다>의 경우, 12척을 가진 조선의 수문장 이순신(최민식) 장군이 330척의 배를 거느린 왜군(류승룡)에 맞서는 이야기고,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은 산적(김남길)과 해적(손예진)이 조선의 국새를 삼킨 귀신고래를 찾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이야기다. <군도 : 민란의 시대>는 조선 철종 10년 도적(하정우) 무리가 탐관오리(강동원)들의 착취에 맞서 백성 편에 서는 이야기다. 묵직한 이름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세 편의 영화를 ‘멀티 캐스팅’ 영화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세 편 역시 최민식, 김남길, 하정우의 원톱 영화의 또 다른 변형이라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도둑들>처럼 어떤 무리가 하나의 목표를 쟁취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닌 이상 ‘멀티 캐스팅’이라는 단어는 마케팅 용어로밖에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
글/ 김성훈(<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