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 의한 인문학

한국에서 종교가 그렇듯, 대중화된 인문학은 근본적 깨달음 대신 자기계발과 처세술을 배우는 데 유용하게 소비된다.

‘대중의 시대’를 살고 있다. 민주주의는 대중의 여론과 선택으로, 자본주의는 대중의 노동과 소비로 유지된다. 사회는 대중사회로, 문화는 대중문화로 헤게모니가 옮겨간 지 오래다. 대중의 시대는 20세기 이후에 도달했다. 인류 역사에서 대중은 언제나 지배당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수와 양으로 표현되는 대중의 모습을 소수의 지배층들은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플라톤은 대중의 지배가 결국 독재자를 부를 것이라고 봤고, 니체는 대중의 모습을 삶의 안락에 젖어 자기 극복을 할 줄 모르는 ‘최후의 인간’에서 찾았다. 세종은 이들을 제 뜻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어리석은) 백성”으로 보고 “가엾게 여겼”지만, 그들이 권력을 잡은 세상까지 상상하지는 못했다. 대중의 시대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반발은 유사한 논리를 가진다. 먹고사느라 바빠 자기 이외의 더 큰 문제를 사유할 능력이나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사람들의 지배는 곧 재앙이라는 것.

사람들은 이러한 논리가 반민주적이며, 소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꼼수라는 걸 안다. 대중교육의 확산은 대중을 더 이상 어린 백성으로 두지 않았고, 인터넷과 통신기술은 이들을 매체의 주인으로 만들어냈다. 혹은, 그렇다고 모두가 말한다. 하지만 과연 대중은 주인인가? 대중은 자신의 안락함과 이해 범위를 넘어선 곳에 뛰어들어 스스로 사유하고 있는가? 오히려 민주주의는 정치인들에게 자본주의는 기업가들에게, 사유의 노력은 지식인들에게, 문화의 생산은 연예인들에게 맡겨놓은 채, 자신은 선택의 자유만을 누리거나, 심지어 이들에게 선택당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

최근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의 성황은 이런 비판적 질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움의 욕구를 드러내는 사건, 자신을 수양하고 세상을 성찰하려는 대중의 각성에 관한 사건인 것 같다. 인문학이라는 말을 단 수백 종의 책이 쏟아져 나오고, 대통령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강신주나 고미숙 같은 이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고전 강의가 텔레비전에도 방영되는 중이다. 과장하여 ‘대중 인문학 운동’이라 부를 법한 최근의 현상은 정확히 대중을 호출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대중의 모습, 나아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의 대중적 인문학 열풍은 이제는 지나간 유행이 된 ‘힐링’ 산업을 대체하는 인기상품이다. 개인의 삶부터 국가의 경영까지 경제학 법칙에 종속되는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 자체가 투자, 경쟁, 효율성의 논리로 설명될 때, 개인은 지칠 수밖에 없다. 이 현실을 파악한 심리상담 패키지가 바로 힐링이다. 책, 토크쇼, 클리닉, 강의 등을 통해 사람들은 불안을 다스리는 치유의 말을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이 치유는 불안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탐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최근 대중적 인문학 강의들은 힐링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삶의 문제를 개인화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힐링 상품의 수정주의 판본이다. 강사로 나선 지식인들은 고전의 한 부분을 강의하면서 온갖 재밌는 일화로 방청객을 쥐락펴락한 후 공통적으로 꾸짖는다. 네 삶을 바꿔라!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삶이 완전히 잘못 되었다고 사뭇 급진적으로 말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계기에 대해서는 침묵한 다. 대중은 자신이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믿겠지만, 실은 입담 좋은 강사가 리더스 다이제스트 식으로 요약해놓은 알맹이를 즐기며 힐링되는 것이다. 대중 인문학 강의가 취하는 ‘콘서트’라는 형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인문학의 기원은 그리스의 시민교육이었다. 목적은 공적인 분야에 참여하는 자유로운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 인문학의 영어 번역어인 ‘리버럴 아츠Lliberal Arts’에서 ‘리버럴’은 바로 이러한 자유를 의미한다. 개인적인 동시에 공적인 역할과 관련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탐구를 통해 나의 삶, 나아가 시민적이고 공적인 영역의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왜 죽어야만 했는가? 그의 철학이 청년들을 뒤바꾸고, 결국은 아테네를 위태롭게 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공적인 성격은 따라서 기득권층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이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인문학은 기득권층을 위태롭게까지는 아니어도 불편하게는 해야 할 텐데, 과연 그런가. 오늘 한국의 대중 인문학은 대중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나 기업가에게도 인기가 많다. 즉, 누구도 불편하지 않다.

이것이 대중적 지식의 한계다. 대중적인 지식은 언제나 ‘쉽고 편하게’ 다가가야만 인기를 얻을 수 있는데, 이를 위해 근본적이고 난해한 가시들은 제거된다. 모두에게 인기를 얻어야 하므로, 대중적인 지식은 삶이 이루어지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의 구체적이고 불편한 문제들은 겨냥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비판해도 삼성을 비판하지 못하며, 민주주의를 비판해도 박근혜를 비판하지는 못한다. 대중적 지식의 ‘대중적’은 ‘Popular’이지 ‘Public’이 아니다. 대중적 인문학은 따라서 인문학이 가진 공적 성격을 빼고 쉬운 부분만 취하는 셈이다. 대중적 인문학의 인기 저자들이 지식인이라기보다 엔터테이너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재밌게 글을 쓰고 말하는, 그래서 즐거움을 주는 이들이지 텍스트가 가진 복잡성, 자기모순성, 사회적 성격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이들이 아니다. 이 즐거움은 책으로, 강의로, 칼럼으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는 브랜드 상품이 되고, 유행이 되어 소비된다.

대중을 위한 인문학, 대중을 위한 지식은 마치 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요약 정리될 뿐 아니라 즐거움과 치유까지 주는 인문학에 대중이 환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인문학이 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게 아니라, 대중이 그런 인문학 상품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이 환호하는 ‘그’ 인문학의 지식은 절대 대중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품화된 인문학은 경제적 이성의 가차 없는 행진에 대한 윤활유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종교가 그렇듯, 대중화된 인문학은 근본적 깨달음 대신 자기계발과 처세술을 배우는 데 유용하게 소비된다. 그 소비는 다시 내일의 생존경쟁 장에서 더 강하고 더 치유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대중을 만들어낸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대중의 시대에 대중은 주인인가? 주인은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공부하고 사유하며 개척한다. 반면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 주인은 책임을 지고 노예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위대한 것은 대중이 스스로 인식하고 토론하고 사유하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그들은 귀족정 시대에서와 달리 노예적이지 않았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대중이 주인이 아닌 노예로 살기 때문에 발생한다. 유권자이자 소비자로서, 대중은 책임지지 않고 사유하지 않은 채 주어진 선택지를 고르며 안주한다. 마찬가지다. 대중이 인문학 강의에 열광하더라도 스스로 읽고, 사유하고, 비판하고, 실천하지 않은 채 강사와 저자 앞에서 열심히 반응하는 데 그친다면, 그는 인문학의 노예다. 대중적 인문학 열풍이 오늘날 대중의 노예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쓰디쓴 역설이다.
글/ 문강형준(문화평론가)